[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47) 통영별로 13일 차

오늘은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향덕(向德)이 살았던 효가리에서 길을 잡습니다. 여기서부터 남쪽으로 이르는 길은 남북으로 곧게 뻗어 있는데, 공주-논산 사이에 선형으로 발달한 골짜기를 따라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판치(板峙)에 이르는 구간이 그러한데, 지금은 그 길을 선형을 개량한 국도 23번이 덮어쓰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선형을 직선으로 고치고 길의 바닥을 크게 끌어올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옛길을 걷는 우리들로서는 부득불 새 길의 아래로 열린 통로를 통해 도로의 양쪽을 넘나들며 걷게 됩니다. 다리가 고생하는 것도 견디기 어려운 노릇이지만 도로의 양쪽을 한 눈에 살필 수 없는 답답함은 더합니다.

◇널티 가는 길

이곳 효가리에서 널티까지는 15리, 그렇지만 걸어보니 첫 구간의 이 시오리길이 그리 낭만적인 노정은 아니었습니다. 혈저천 서쪽에 열린 길을 23번 국도가 선형 개량 공사를 하면서 옛길을 양분했기 때문입니다. 자동차라는 교통수단이 새로 난 길을 이용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게 되었지만, 옛길을 찾아 걷다보면 늘 느끼지만 도대체 사람을 위한 길은 어디에도 없는 듯합니다. 물론 새로 난 국도의 곁으로 보도 또는 농로라는 이름의 길이 있습니다만, 이 또한 도시를 벗어나면 없어지고 말지요. 시골에서도 사람이나 손수레 경운기 트랙터 등의 통행에도 갓길의 쓰임이 많은데 말입니다.

23번 국도를 따라 그 서쪽으로 낸 농로를 따라 걸으니 요골을 지나 효포(孝浦)에 닿습니다. 작은 초등학교가 있고, 서쪽으로는 지금도 공주 가는 길이 남아 있습니다. 지난 길에서 만났던 효현(孝峴), 효가리, 효포는 모두 향덕의 효행에서 비롯한 이름인데, 공주와 논산 사이의 구조곡을 따라 흐르는 혈저천(血底川) 또한 그런 이름입니다. 혈저천은 달리 혈흔천(血痕川)이라고도 하는데, 효자 향덕이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그의 허벅지 살을 베어낸 고사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이곳 효포에서부터 남쪽으로 널티, 경천역, 노성으로 이르는 길은 전통시대의 역제가 폐기될 즈음에 발발한 동학농민전쟁을 치른 역사적인 길이기도 합니다.

효포에서 은지평을 지나 부동(釜洞)으로 이르는 고갯마루에는 효자 이기원(李基遠:1802~83)을 기리기 위해 1891년에 세운 정려각이 있고, 그 곁에는 오래된 나무가 같이 자리하고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줍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효포를 지난 화은리 거시원 마을에 거수원(巨水院)이라 적어 두었는데, 조선시대에 간행된 지지에는 그런 이름의 원은 나오지 않습니다. 기산리 달라올에서 휴족교를 건너면 원동이고, 옛 지도에는 원당리(院堂里)라 적혀 있어 당집이 있던 곳으로 여겨지지만 물어볼 이가 없어 확인하지는 못했습니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 월암리 들머리에서 본 널티. /최헌섭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나지막한 널티는 <신증동국여지승람> 공주 산천에 '판현(板峴)은 주 동남쪽 31리에 있다'고 나오며,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판치(板峙)라 적고 널티라 병기해 두었습니다. 대개의 글에서는 널티를 판자처럼 낮은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었다고 하지만, 그보다는 너른 고개라는 의미가 더 강해 보입니다. 그런 느낌은 실제 올라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습니다. 달리 무넘이고개라고도 하니 이 고개가 분수령이란 인식은 덜해 보입니다.

지금이야 잘 닦인 도로를 자동차라는 편리한 교통수단을 이용해 고도 85m 정도 되는 이 고개를 쉽게 넘지만 전통시대에도 그랬을까요? 고개의 경사도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방법이 전통시대에는 짐을 가득 실은 수레를 몰고 넘는 것이고, 요즘 같으면 자전거를 타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어지간한 근력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경사가 10도만 되어도 쉽지가 않거든요. 지금 널티 고갯마루에는 나라꽃 무궁화가 만발해 있고, 고개를 가로지르며 호남고속철도 공사가 한창입니다.

영규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널티를 넘으면 계룡면 소재지에 들게 되는데, 이곳 월암마을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임을 헤아릴 수 있는 자료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면사무소 앞에는 옛길을 헤아릴 수 있는 정려각과 오래된 느티나무가 지금도 제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정려를 살펴보니 이곳에서 나신 영규대사(~1592)를 기리는 것으로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5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곁에 세운 안내 간판은 대사가 옆 마을 버들미(유평柳坪)에서 태어나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승병을 일으켜 조헌(趙憲)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는 등의 공을 세웠고, 그 뒤 금산 연곤평(延昆坪) 전투에서 큰 상처를 입고 이곳 월암리에 와서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정려각 옆에는 1813년에 세운 의병승장영규지려(義兵僧將靈圭之閭)라 적은 빗돌과 최근에 세운 하마비가 있습니다. 영규대사의 무덤은 여기서 다소 떨어진 버들미에 있습니다. 대사의 무덤은 갑사의 승려들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며, 무덤 앞의 빗돌은 1810년(순조 10년) 무렵에 후손들이 세웠다고 전합니다.

이밖에도 바로 옆 한길 가에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자리를 지키고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충임을 일러 줍니다. 이런 까닭에 자연스레 주막거리가 형성되었고, 지금도 도로명 주소에 마방길이란 이름을 쓰고 있습니다. 옛길은 여기서 동남쪽으로 꺾여 23번 국도와 선형을 달리 합니다. 옛길로 들어서자마자 맞이하는 다리도 마방교라는 이름을 쓸 정도이니 이곳 사람들은 여기를 확실하게 마방(馬房)이라 여기고 있는가봅니다. 이 근처의 가게가 옛 주막이었다니, 흔치 않은 풍경이라 가슴에 깊이 담고 떠납니다.

◇경천역(敬天驛)

주막거리에서 경천역에 이르는 옛길은 교통량이 많지 않아 지금도 옛 선형을 잘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막거리에서 동남쪽으로 들을 가로지른 옛길은 산자락을 따라 마을들을 이으며 경천역으로 향합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점촌 마을 남쪽 고개 즈음에 불당리(佛堂里)라 적어 두었고, 상평 마을 남쪽에 경천장과 역을 표시하였습니다. <여지도서> 공주 역원에 '관아의 남쪽 40리 익구곡면(益口曲面)에 있다'고 했고, 이 책 도로에는 '관아로부터 남쪽으로 이산(尼山)과의 경계에 이르는 경천로(敬天路)는 40리인데, 대로이다'라고 나옵니다. 지금도 이곳에는 장터가 남아 있어 2일과 7일이면 5일장이 섭니다.

   

최근까지 이곳에는 역이라 쓰인 빗돌이 있었는데 지금은 신원사로 가는 길가로 옮겼다고 합니다.

주민들에게 비석을 물으니 아는 이가 없어 식당 주인은 여러 곳에 전화를 내어 수소문하지만 역시 아는 이가 없습니다. 도도로키 씨의 책에 쓰인 대로 신원사 가는 길가에서 빗돌을 찾아 두 번이나 오가며 헤매지만 행방을 알 수 없어 포기하고 예정대로 남쪽으로 길을 잡으니, 그제야 칡덩굴에 가려진 빗돌이 눈에 듭니다. 그것도 큰길가에 3기나 나란히 서 있는데도 아는 이가 어찌 그리도 없었을까요. 우리 것에 대한 무관심이 이렇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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