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인터뷰]조카 박은숙이 쓰는 고모 박희순 이야기

나 박은숙(45·사회복지사)과 생김새가 똑 닮아 더 좋은 우리 막내 고모 박희순(60) 씨. 그녀 명함에는 '한국연예인협회 진해지부 가수' '진해 실버 관현악단 전속가수' '웃음치료사' '요가강사' '국악강사', 이렇게 화려하게 적혀있다. 어르신들에게 인기 있는 민요 선생님, 우리 가족들에게는 언제나 즐겁고 행복한 에너지를 팍팍 넣어주는 '해피바이러스'인 우리 고모는 예순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멋지시다. 항상 유쾌하신 고모에게 가족 안에서 행복을 만들어가는 비법을 배워보는 시간을 가졌다.

-제가 알기에는 5남매 중에 귀염둥이 막내딸인 고모가 7남매 맏아들한테 시집가셨잖아요?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그걸 이야기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깜짝 놀랄 거야. 내가 시집가고 싶어서 간 게 아니고, 우리 아버지하고 시아버지는 동네에서 잘 아는 사이였어. 동네 사랑방에서 이야기 나누시다가 아버지는 딸이 있다고 하시고 시아버지 되시는 분은 아들이 있다고 이야기가 나온 거야."

-그럼 부모님 간 중매로 만나셨네요.

"그런 셈이지. 시아버지 되시는 분이 워낙 점잖으셔서 아들한테도 당연히 믿음이 갔던 거 같아. 1975년 당시 너희 고모부(윤판식·67세·회사원)는 외국 배 타는 일을 했기에 동네에서는 잘나가는 사람이었지. 한번 만났는데 멋쟁이같은 모습이 좀 괜찮더라고. 집안 어른이 나더러 만나보니 어떠냐고 물어보시길래 '인물은 괜찮네예'라고만 말했어. 그런데 그날이 함안가야장날이었어. 아버지가 장에 가서 시아버지 되실 분 만나시고는 그날 바로 결혼날짜를 받으셨어. 8일 후 시집가는 걸로 날을 받아왔더라고."

-그때 고모가 21살이었던 걸로 아는데, 갑자기 시집가시게 돼 황당하셨겠어요?

"아버지가 술이 거나하게 되어 집에 오셔서 막내딸 시집보낸다고 하니까 큰오빠가 난리를 쳤어. '왜 그렇게 서두르시느냐'면서…. 오빠들이 날 예뻐했거든."

진해 군항제 행사 때 노래하는 고모 모습.

-시집가서는 어떠셨어요?

"힘들었어. 시집가서 얼마 안 있어 고모부가 다시 외국 배를 타고 나가셨는데 그때 나는 임신 중이었거든. 아이 낳고 얼마 안 있어서 한국에 들어온 고모부가 나를 두고 다시 배를 타는 게 정말 싫었어."

-그래서 고모부는 배 안 타셨어요?

"아니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다시 배를 타고 가다가 홍콩에서 내리셨어. 사표를 내신 거지. 아마 배 타는 것도 많이 힘드셔서 그랬을 거야. 근데 그때부터 고생을 많이 하게 된 거 같아. 배에서 내리고는 먹고 살려고 함안에서 구멍가게도 하고, 벽돌도 찍고, 한 2년 살다가 다시 부산으로 갔어. 다시 배 타려고 간 거지. 그런데 배는 못 타고 취직을 했는데 월급이 형편없었어. 살기 어려워서 작은 오빠인 너희 아버지한테 부탁해서 진해에 와서 자리 잡은 거지."

-맏며느리라서 어깨도 무거웠겠네?

"고모부 나이가 나보다 7살 많으니까 벌써 시누들은 몇 명 시집갔고, 시동생은 조금씩 도와서 취직시키고 장가보내고 그랬어. 시아버지 돌아가시면서 시어머니가 촌에 혼자 계시니 10여 년을 매주 한 번씩 반찬 해 가서 돌봐 드렸지. 맏며느리로서 도리를 다하려고 했는데 모르겠다. 더 노력했어야 하는지…."

-그럼 진해에 자리 잡으면서 형편은 좀 나아지셨어요?

"지금 신세계백화점이 예전엔 성안백화점이었어. 거기서 돌솥밥 가게를 7년이나 했잖아. 힘들었지만 그때 돈을 좀 벌었어. 근데 백화점에서 장사하는 걸 고모부가 반대하는 거야. 여자들이 나가는 걸 싫어하셨지. 그래서 갈등이 엄청나게 많았지. 그래도 남편 뜻 존중하면서 잘 추슬렀지. 고모부도 하시던 일 그만두고 식당을 같이 하면서 조금씩 좋아지더라고."

-기억나요. 저도 고모 가게에서 아르바이트했었잖아요. 근데 고모 식당 하시면서 많이 아프셨죠?

"그때 골병 많이 들었어. 그러다가 조금 쉬면서 진해에서 농협주부대학 1기 활동을 했었는데 그때 잠재된 내 모습이 조금씩 나온 거 같았어. 몇 년 후 주부대학에서 풍물반을 만들었는데 그때부터 날개를 달았지. 내가 풍물에서 상쇠를 했는데 신명이 절로 나는 거야."

-그래서 그때부터 풍물이랑 민요도 배우신 거예요?

"그렇지. 우리 풍물반이 봉사활동을 계속했어. 그러다가 나에게 강의 요청이 오는 거야. 풍물이나 민요도 제대로 가르치려니 자격이 필요하더라고. 그때부터 창신대학에서 2년 동안 국악 강사 자격이랑 어르신과 소통하기 위해 웃음치료사, 요가강사 자격을 갖추기 시작했어."

-50살 다 되어 고모의 제2의 인생이 시작된 거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렇지 그러다가 2005년에 진해에서 실버악단을 창단했는데 전속가수가 되어 지금까지 각종 행사에 참여하고 있어. 지금은 일주일에 10여 곳에서 강의하고 있는데, 나름 인기 많은 강사란다."

-고모는 워낙 성격이 좋으시니 힘든 것도 웃음으로 승화하시고, 지금은 즐겁게 사시는 거 같아요.

"내 성격이 원래부터 이러진 않은 거 같아. 막내딸이라서 고집도 있고 품이 넓지도 않았을 거야. 근데 너희 고모부랑 살면서 이렇게 변한 거 같아. 나이 차이도 나고 고지식하신 고모부랑 살려니 수행하듯이 내가 바뀌지 않으면 안 되겠더라고. 나는 그릇이 작은 사람인데 자꾸 물을 부어대니 결국은 내 그릇이 커진 거라고나 할까. 내가 변하는 길만이 너희 고모부를 변화시키는 길이었어. 지금은 많이 너그러워지시고, 나를 잘 이해해주고 내가 바깥에서 활동하는 것도 많이 인정해주니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싶어."

-행복 에너지로 뭉친 고모를 보니 예순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아요. 마지막으로 고모에게 가족이란 어떤 의미예요?

"내 얘기만 실컷 하다가 우리 아들들 이야기는 못 했네. 둘 다 해군이 되어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을 보면 대견하지. 이런 가족이 나의 삶이고 바로 내가 사는 힘이지. 살면서 힘든 순간을 버티게 해주는 안식처이고 영원한 내 팬들이지. 고맙고 사랑한다~ 우리 가족~"

나이 들어 할 게 많아서 행복하다는 고모. 힘드신 어르신들한테 노래 한 자락 들려드리면 다들 무척 좋아하셔서 '내가 가진 작은 재능 하나가 저분들에게 삶의 위로가 되고 또 내가 그 속에서 위로받으니 이 일을 놓을 수 없다'는 고모. 그런 고모를 보면서 아름답게 나이 듦의 의미를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었다.

/박은숙 객원기자

경남건강가정지원센터-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으로 가족 이야기를 싣습니다. '건강한 가족이 건강한 사회를 만든다'는 취지로 마련한 이 지면에 참여하고 싶은 분은 남석형 (010-3597-1595) 기자에게 연락해주십시오. 원고 보내실 곳 : nam@idomin.com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