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최초의 상업화랑을 연 '예술을 사랑한 아흔의 백발청년' 잠들다

경남 최초의 상업화랑을 운영해온 송인식 동서화랑 관장이 간암 말기로 별세했다. 향년 88세.

미술계뿐만 아니라 예술계의 큰 어른으로 자리를 지켰던 송 관장이 광복절인 15일 오후 12시 55분 영원히 잠들었다. 더는 '빨간 셔츠의 사나이', '예술을 사랑한 아흔의 백발청년'을 볼 수 없게 됐다.

송 관장은 약 두 달 전부터 병세가 급격히 악화해 창원파티마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주위의 만류에도 '화랑을 지키겠다'며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고, 숨을 거두기 며칠 전까지도 화랑에 있었다. 의사에게서 "한 두 달 정도밖에 살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송 관장은 올해 동서미술상을 여느 해보다 일찍 선정하기도 했다.

송 관장은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다.

고 송인식 관장 마지막 인터뷰 사진.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고향이 아닌 경남 마산에 터를 잡은 것은 한국전이 끝나던 1953년. 이후 그는 이 곳에 살면서 1950년대는 남성협동인쇄소를 경영했고 60년대는 경남신문 업무국장을 지내기도 했다. 특유의 유머감각과 입담으로 대인관계의 폭이 넓었고, 특히 문화예술계의 '마당발'로 통했다.

송인식 관장은 1973년 8월 31일 마산 오동동에 '동서화랑'을 열었다. 경남 최초의 상업 화랑이다. 과거 그는 기자에게 "내가 왜 9월 1일이 아닌 8월 31일에 문을 열었게? 첫날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것보다 끝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게 좋다고 생각했지. 동서화랑이라고 지은 이유는 그 당시 그림을 동양화, 서양화로 나눴기 때문이야"라고 고백했다. 1978년 남성동으로, 1987년 창동으로, 1998년 오동동 고려호텔 3층으로 옮겨다니다 지난 2001년 합포구 산호동 337-80 문화빌딩 5층에 둥지를 틀었다.

송인식 관장은 문신·박생광·강신석·정상복·이상갑·최운·유택렬 등 경남화단의 1세대와 인연을 이어왔고 특히 문신과는 각별했다.

그는 생전에 "1976년 문신이 프랑스에서 1년간 귀국했을 때 '문신 귀향 환영회'를 열었어. 당시 남성동 파출소 옆 한일은행 2층에서 말이야. 100여 점 모두 팔렸지. 그 돈으로 문신은 프랑스에 갈 수 있었어. 무척이나 고마워했지. 그 전시가 가장 기억에 남아. 그땐 꼬치와 단무지를 안주 삼아 청주를 마시러 오동동 술집에도 자주 갔었고 다방에도 갔지"라고 회상했다.

고 송인식 관장 마지막 인터뷰 사진.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송 관장은 지역 미술발전을 위해 지난 1990년 사재 1억 원을 털어 동서미술상을 제정했다. 도내 최초의 민간 미술상이다. 올해로 23번째다. 고인은 지역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3년 한국화랑협회 공로상과 2013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제1회 때부터 동서미술상 운영위원을 맡아 온 정목일 수필가는 "송인식 선생은 갤러리 운영자로서만이 아닌 경남지역 문화운동가로서의 역할이 선명하고, 미술 상인의 인상보다는 문화 애호가이자 운동가로서 앞장서 왔다. 마산의 고 이선관 시인 등 어려운 문화예술인들을 소리 없이 도와 온 분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제1회 동서미술상 수상자인 조현계 화가는 "예술을 사랑했던 분이고 지역 미술을 평생 끌고 가신 분"이라며 "자신이 아프고 어려우면서도 고인이 된 남정현, 윤병석, 장영준 등 원로 화가를 마지막까지 챙겼다. 지역 화가들을 위해 평생 희생하신 분이다"고 회상했다.

빈소는 창원파티마병원 VIP실에 마련됐다. 발인은 17일, 장지는 창원시립 상복공원이다.  

고 송인식 관장 마지막 인터뷰 사진.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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