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인류를 싣고 달리는 열차. 아니 인류의 최후일까. 열차가 멈추거나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고, 안에 있어도 생존은 불투명하다. 달리는 좁은 열차 안에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이며 물은 또 어떻게 구할 것인가. 대부호이자 '철도 덕후'인 윌포드(에드 해리스 분)는 이 불가능을 가능케 한 인물이다. 반영구 엔진에 물과 식량 조달 시스템까지 갖춘 설국열차는 2014년 빙하기 도래 이후 마지막 생존자 수천 명을 싣고 무려 17년 동안이나 지구를 달리고 있다.

물론 평온할 리 없다. 열차엔 애초 계획하지 않았던 1000여 명의 불청객이 탑승했고 물자는 늘 부족하다. 윌포드의 선택은 이들 모두를 열차 '꼬리칸'에 몰아버리고 엄격한 통제 속에 최소한의 생활만 보장하는 것. 최악의 음식, 최악의 환경은 물론, 인구 조절과 생체 노동의 희생까지 감내해야 한다. 저항은 곧 죽음이다. 덕분에 부자임이 분명한 설국열차 고객들은 앞칸에서 스시와 스테이크를 즐기며 윤택한 삶을 영위한다.

봉기는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열차 맨 앞 엔진칸만 점령하면 '해방'이라는 믿음 속에 꼬리칸 사람들의 죽음을 무릅쓴 돌진이 시작된다. 마침내 온갖 사투 끝에 엔진칸에서 윌포드와 마주하게 되는 반란 지도자 커티스(크리스 에반스 분).

윌포드는 뜻밖에 태연하고 당당하다. "기차는 세계고 우리는 인류 그 자체. 균형을 위해선 질서가 필요해." 그리고 드러나는 끔찍한 진실들. 지난 17년간 처절했던 꼬리칸 '폭동'의 역사는 사실 모두 생태계 균형을 위한 윌포드의 자작극이었다. 권력에 맞서봤자 사악한 체제의 수명 연장에 기여할 뿐이라는, 저항 주체들 역시 지배자와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봉준호의 지독한 냉소주의와 비관주의(의 재확인).

달려도 죽음이고 멈추어도 죽음인 설국열차. 당신의 선택은?

영화는 두 가지 선택지를 우리에게 던진다. 이 죽음만도 못한 열차를 계속 달리게 할 것인가, 아니면 모두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열차를 멈춰 세울 것인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어 인류를 이끌어달라는 윌포드의 제안을 받고 갈등하는 커티스. 이 따위 체제라면, 존엄을 잃은 인류라면 차라리 없어지는 게 나은 걸까. 커티스, 아니 봉준호의 결단은 후자다.

일부 평론가와 관객은 이 선택에서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두 명의 아이가 살아남았고 어느새 얼음은 녹고 있었다. 절멸한 줄 알았던 생명체(북극곰)까지 등장한다. 그러나 열차와 함께 눈 속에 처박힌 수천 명의 시신은 누구도 '발견할' 생각이 없다. 이들은 죽어 마땅한 사람들이었는가. 그들 스스로 빙하기를 불렀고 야만을 선택했던 것인가. 환경과 시스템에 의해 그렇게 밀려갔을 뿐, 대다수는 그저 체제의 피해자 또는 기껏해야 수동적 수혜자 아니었을까.

계급과 혁명을 다룬 영화라며 경외하는 시선이 많지만 사실 봉준호의 최종 선택은 테러리즘에 가깝다. 잘못된 체제는 어떠한 희생을 치러서라도 '전복'해야 한다는 섬뜩한 결론. 그럼 열차는 계속 달려야 했나, 라고 반문한다면 '그렇다'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열차 바깥이 생존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먹을 것을 쪼개고 또 쪼개 나눠 먹어서라도, 생체 노동 등 희생이 필요한 부분은 서로서로 도와가며 감내해서라도 일단은 달리는 게 옳았다. 최악의 환경이라도 어떻게든 함께 살 길을 찾아나가는 게 단 두 명만 살아남는 것보다는 낫다고 믿기 때문이다. 최후의 인류에겐 자기 팔과 다리를 잘라가면서까지 공동체를 지켰던 숭고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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