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46) 통영별로 12일 차

오늘은 지난 여정을 마감한 백제큰다리에서 다시 옛 일신역이 있던 신관동으로 자리를 옮겨 길을 잡습니다. 현재 역이 있던 신관동 일원은 한창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어 옛길을 살필 수 있는 곳은 신관초등학교 서쪽에 남은 길이 전부입니다.

이제 공주가 멀지 않습니다. 이곳에서 일신역-터를 지나 얕은 재를 넘으면 게서 바로 금강과 그 너머의 공산성이 한눈에 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직 왕건의 훈요십조에 나오는 차현 남쪽 공주강 바깥 땅에 있는 것입니다. 예서 다시 생각하니 훈요십조에서 말한 지리적 범위가 더욱 뚜렷해지는군요.

◇일신역

옛길이 지나던 곳은 지금은 공군 예비군훈련장과 신도시가 차지하고 있어 길을 잡기가 쉽지 않지만, 신관초등학교 서쪽에 옛길이 남아 있습니다. 당시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던 한길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도시 속의 골목길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이곳 신관동은 일신역(日新驛)과 관골마을을 합친 이름이니 이즈음에 일신역과 그에 딸린 역관이 있었음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일신역은 "관아의 북쪽 10리 동부면에 있다."고 나옵니다. 이곳에서 공주로 향하는 길은 일신역길을 거쳐 역뒤마을길을 지납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관골과 일신 사이로 길이 열려 있고, 두 마을 사이에는 한적동에서 내려오는 길과 만나는 사거리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서 남서쪽으로 길을 잡으면 금강을 건너 공산성 공북문으로 들고, 남동쪽으로 내려가서 감나무골 앞 나루에서 강을 건너는 길이 옛길입니다.

◇금강진

그러나 우리 일행은 강을 건너 공산성을 거쳐 가는 길을 택하여 옛 웅진시대 백제의 역사를 살피기로 합니다. 옛 사람들은 예서 금강진(錦江津)을 통해 강을 건넜습니다. <대동지지>에는 공산성 공북루 근처에 있다고 했는데, <해동지도>를 보면 공산성의 동쪽에 표시되어 있습니다. 일신역에서 공북루 방면으로 이르는 길은 공주터미널로 이르는 지금의 매산동길로 헤아려집니다. 그러하다면 옛 나루터는 공산성과 공주대교 사이에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나루의 이름은 금강진이고 지금은 장기대라는 이름이 남았는데, 1960년대까지도 나룻배가 강을 오갔다고 전합니다. 이곳 금강에는 나루도 있었지만 <삼국사기>에는 동성왕 20년(498)에 "웅진교(熊津橋)를 건설하였다."고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공산성

공산성은 금강에 연한 공산에 쌓은 웅진시대 백제의 궁성입니다. 성이 자리한 곳은 북쪽으로 금강(錦江)에 접하고 있고, 남쪽은 공주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천혜의 요충지입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으로 한성시대를 마감하고 이곳에 자리 잡을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았고, 그 뒤에 돌로 고쳐 쌓아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에서 임류각(臨流閣) 터, 추정 왕궁(王宮) 터, 지당(池塘)터, 목곽고(木槨庫) 등과 저장구덩이 또는 함정으로 헤아려지는 구덩이들이 확인되었습니다. 각각의 유구에서는 토기 기와 벼루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유물들은 5세기말~6세기 전반 무렵에 만들어진 것이어서 공산성을 쌓아 운용한 시기와 잘 들어맞습니다.

◇효자 이복과 국고개

공산성을 둘러보고 원래의 행선을 좇아 동쪽으로 길을 잡아 나서니 장기대(將旗垈) 마을 들머리에서 고려 때 효자 이복의 행적비를 만나게 됩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이즈음을 '비선거리(碑先巨里)'라 표기한 것으로 보아 그곳에 서 있던 빗돌은 바로 이곳에 옮겨져 있는 '효자이복지리(孝子李福之里)'를 이르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지도서> 공주 효자에 이복은 고려 때 고을의 향리라 했습니다.

그는 어머니를 모시고 고을의 구실아치로 지냈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자 하루같이 밥과 국을 구해다 봉양하니 사람들이 그의 효성을 가상히 여겨 국을 끓이면 그의 어머니께 드리도록 따로 한 그릇을 떠놓았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복이 국을 얻어서 고개를 넘다가 넘어져 국을 엎지르고 서럽게 울었다고 하여 이곳을 '국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루가 있던 장기대

   

국고개를 지나 동쪽으로 돌아서면 맞이하는 장기대 마을은 대안의 시목동과 오가던 금강나루가 있던 곳입니다. 이 마을을 지나자 나타나는 보통골은 옛 보통원(普通院)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에 "보통원은 주 동쪽 3리에 있으니, 이는 곧 옛날의 영춘정(迎春亭)이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는 승려 연감(淵鑑)이 지은 기문을 실었는데, 영춘정은 입춘 때 그해 농사의 풍작을 바라는 제를 지내고, 고을을 오가는 사신을 영송하였다고 전합니다.

◇효가리에서 향덕을 그리다

장기대를 지나 보통골에서 금강을 뒤로하고 남동쪽으로 향하는 길을 따라 가면, 넙다리를 지나 소학동(巢鶴洞)에 듭니다. 이 마을로 접어드니 멀리 키 큰 느티나무가 눈에 듭니다.

나무에 이끌려 마을로 이르니 그곳에는 작은 빗집 한 채가 있습니다. 안을 살피니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 향덕(向德)을 기리는 빗돌이 세워져 있고, 비갈에는 '신라효자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새겼습니다.

빗돌의 형태로 보아 당시의 것은 아니고, 뒷면을 살피니 영조 17년(1741)에 충청도 관찰사 조영국(趙榮國)이 다시 세웠다고 적었습니다. 그 곁에는 위가 깨어져 나간 파비가 있는데 아래쪽에 '□□□지려(之閭) 삼월일중립(三月日重立)'이란 글이 남아 있어 이 또한 경덕왕 때에 세운 것이 아니라 뒤에 다시 세운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효행은 <삼국사기> 열전에 "향덕은 신라의 웅천주 판적향(板積鄕) 사람이다. …줄임… 천보(天寶·당 현종의 연호) 14년(755) 을미에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굶주리고 이에 더하여 질병마저 돌아 부모는 굶주리고 또 병에 걸렸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는 콧병으로 숨이 막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향덕은 밤낮으로 옷도 벗지 않고 정성을 다하여 간호하였다. 하지만 봉양할 수가 없으므로 곧 넓적다리의 살을 베어내서 그것을 먹이고 또 어머니의 코를 입으로 빨아서 드디어는 병을 고쳐 편안하게 하였다. …줄임… (왕은) 유사에게 명하여 이 사실을 비석에 새겨서 그 뜻을 알리도록 하였는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효가리(孝家里)라고 일컫는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당시 이곳에 빗돌을 세울 때 빗집도 함께 건립했던 듯, 주변에는 두 개의 원형 주초석이 남아 있습니다. 훗날 그의 효행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 <삼강행실도>에도 실렸고, 이러한 사실을 반영하듯 <대동여지도>에도 이곳을 효가라 적어 두었습니다.

이곳 효가리에는 원집도 있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효가리원은 주 동쪽 10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같이 실린 정추의 시에 "단풍잎 몰아치고 원 마을 비었는데, 산 앞에 선 옛 빗돌에 석양이 붉었네. 넓적다리살 베인 효자 지금 어디 있느냐, 밤마다 저 달빛이 거울 속에 떨어지네."라 읊은 것으로 보아 이 책이 편찬되던 16세기 전반경에 이르러 이미 원은 쇠락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이 원집이 뒤에 효가점(孝家店)이 되었는데, <도로고>에 공주에서 13리 되는 곳에 있다고 나옵니다. 아마 효가리원과 효가점은 이곳 소학동 높은행길 즈음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빗집 앞 느티나무와 그 곁의 돌무더기가 그리 헤아릴 수 있는 지표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느티나무는 수령이 500년이나 되었으니 원과 점이 운영될 때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테고, 그 옆의 돌무더기는 옛 길가에 10리마다 세웠다는 후()였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후는 흙이나 돌로 쌓은 작은 대(臺)를 말하는데, <경국대전> 교로(橋路)에 "외방 도로에는 10리마다 작은 후를 세우고 30리에는 큰 후를 세우고 역을 둔다."고 한 규정에 따른 것입니다.

이 마을을 벗어나는 즈음의 동남쪽 구릉에는 월성산(月城山) 봉수가 있습니다. <여지도서>에 "월성산봉수는 관아의 동쪽 5리에 있다. 남쪽으로 이산현의 노성산으로부터 신호를 받아서 북쪽으로 공주의 고등산에 신호를 전한다."고 나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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