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문방구 운영하는 이능숙 할아버지

빨간색, 파란색, 초록색 형형색색을 내뿜는 볼펜들이 한곳에 어지러이 섞여있다. 이리저리 눈으로 획 둘러보고는 개중에 필기 기능을 가장 충실히 이행할 것 같은 녀석을 골라낸다.

실이 가는데 바늘이 빠질 수 있나. 주변을 둘러보며 메모지가 있을 법한 자리를 찾는다. 수납장 한구석에 크기가 엇비슷한 종류끼리 대충 꽂혀 있다. 짐짓 신중한 표정으로 한 녀석을 뽑아 든다. 투명한 포장지 위로 묵은 먼지가 풀풀 날린다. 역시 눈으로 한 번 훑은 후 계산대 앞을 먼저 선점한 볼펜 옆에 놓는다.

"이게 얼마더라…." 주인 할아버지가 메모지를 둘러 싼 포장지를 손으로 한번 쓰윽 닦으며 말한다. "아, 2000원이네." 뿌연 먼지 위로 손이 지나간 자리가 선명하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려는 찰나 구매용품 리스트에서 빠진 사무용품 집게가 생각났다. 직접 찾는 대신 혹시 용품이 있는지 물어 봤다. 자신감 넘치는 말투로 없는 게 없다고 말하는 주인 할아버지. 그 말 한마디에 33㎡(10평) 남짓한 가게 안을 관망하듯 둘러보기 시작한다. 각종 학용품에서부터 게임기, 장난감, 드라이버, 자물쇠까지…. 벽이며 천장이며 눈 돌리는 곳마다 온갖 잡화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마치 작은 만물 세상에 들어 온 느낌이다.

   

"옛날에는 먼지가 쌓일 틈이 없었어. 아침에 문 열기 무섭게 등굣길 아이들이 들이 닥쳤거든. 그때는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

창원시 진해구에서 문방구를 운영하고 있는 이능숙(71·사진) 할아버지는 소위 잘나가던 시절을 회상했다. 18년 전 학교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할아버지는 그때만 해도 아이들과 어울리는 일이 익숙지 않았다. 두 딸에게는 친근한 아버지일지 몰라도 다른 아이들을 대할 때면 서툴고 낯설었다. 하지만 매일 학교를 제집처럼 드나들며 교내 각종 궂은일을 도맡아 해오던 사이, 어느새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게 편안하고 자연스러워졌다. 2000년 퇴직할 당시 새 주인을 찾던 문방구를 선뜻 맡았던 이유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벌이가 나쁘지 않았다. 한창 경기가 좋을 때는 단돈 몇 천 원하는 학용품 등을 팔아 한 달 최고 500만 원 매출을 올리기도 했다. 특히 설, 추석 명절에는 그야말로 대목 특수를 누렸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찾았던 연, 팽이, 폭죽 등 명절 놀이용품은 하루 평균 50만 원어치 팔려나갔다.

"사무, 팬시, 완구용품 종류도 어찌나 많은지. 처음 문방구를 맡고 물건 이름, 가격, 수납 위치 외운다고 고생했어. 가격을 몰라 제값보다 싸게 판 적이 허다했지."

손해 아닌 손해를 보면서 한 달 넘게 문구류와 씨름했던 할아버지는 이제 아이들 눈빛만 봐도 안다. 똑같은 물통, 저금통을 구경하더라도 색깔, 디자인 따라 달라지는 미묘한 차이를. 고요하던 아이 눈에 작은 생기가 돌면 물건이 잘 팔릴 것을 직감한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물건이 불티나게 팔리면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는 할아버지. 단순히 하나라도 더 팔아서가 아니라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아이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 가는 자신을 발견해서이다,

하지만 스스로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은 언젠가부터 상실감으로 바뀌었다. 진해에 대형마트가 하나 둘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문이 닳도록 드나들던 아이들이 부쩍 줄어들었기 때문. 수업 준비물을 학교에서 일괄 구매해 나눠주는 '준비물 없는 학교' 정책이 2011년부터 시행된 것도 악재로 작용했다.

"문방구 앞은 미니 오락기를 즐기는 아이들로 항상 북적댔었지. 지금은 하루에 아이 한두 명 볼까 말까 해. 예전에 인기 있던 제품들이 여기 다 있는데 말이야."

할아버지는 씁쓸한 표정으로 10년 전에나 봤을 법한 게임기들을 손으로 가리킨다. 다마고치, 테트리스, 지뢰 찾기 등 한창 잘나가던 최신식 인기 제품들이 골동품 신세가 되어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한 번씩 20~30대 성인이 어릴 적 향수를 좇아 사가는 경우 말고는 아날로그형 게임기와 장난감을 찾는 이가 거의 없다.

팔리지 않아 재고로 차곡차곡 쌓인 제품을 볼 때마다 할아버지는 새삼 세월의 무상함에 마음 한구석이 짠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더욱 애착이 간다. 한때 자신을 울리고 웃겼던 자식 같은 문구들이 아닌가. 지금 아무도 찾지 않는다 하여 자신마저 외면할 수 없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끝까지 함께 할 것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할아버지.

조그맣고 낡은 문방구에는 최신식 인기 장난감은 없다. 대신 어린 시절 추억이 수북이 쌓여 있다. 문방구를 나설 때 즈음에는 잊고 있던 빛바랜 기억 한 조각을 들고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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