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45) 통영별로 11일 차

요즘 우리 지역의 낮 기온은 섭씨 30도를 내려오지 않는 무더운 나날이라 밤 또한 열대야로 우리의 쉼을 어지럽게 합니다. 장마철이라지만 비는 중북부 지역으로 몰려가 있어 그야말로 마른장마가 따로 없습니다. 이런 날 내리쬐는 폭염과 아스팔트로 포장된 찻길에서 치솟아 오르는 복사열을 견디며 걷기란 정말이지 힘든 일입니다. 길가의 푸성귀들도 축 늘어져 있는 한낮이면 우리 길손들은 그저 비만 바랄 뿐입니다. 오늘 우리가 걷는 길은 차령에서 공주로 이르는 차령로(車嶺路)입니다. <여지도서>에는 공주까지 50리에 이르는 한길이라 했습니다.

◇광정역(廣程驛)을 향하여

오늘 여정은 지난 길을 마무리한 차현(車峴) 남쪽의 인풍에서 출발합니다. 이 고개를 내려서면 만나게 되는 인풍리는 옛 인제원(仁濟院)이 있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 북쪽 52리에 있다"고 했으며, <대동여지도>에는 차령 아래에 표기해 두었습니다. 원집의 자리가 차령 북쪽의 원터와 짝을 이루고 있어 이곳의 원은 북쪽으로 길을 잡아 떠나는 길손에게 쓰임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바로 그 즈음 신암(辛岩)에서 내려오는 물길이 만나는 곳에는 옛 팔풍장(八豊場)이 섰던 곳입니다. 이곳에서 사곡(沙谷)을 지나 남쪽으로 곧장 길을 잡으면 정안농공단지를 지나 감나무골에 있는 김옥균(金玉均)이 난 곳에 듭니다. 이곳은 삼일천하(三日天下)의 풍운아 김옥균이 태어나서 세 살 때 차령 너머의 원터 마을로 이사 갈 때까지 살았던 곳입니다. 그는 기울어가는 나라를 바로잡기 위해 개화당을 조직하여 갑신정변(1884년)을 일으켰으나 3일 만에 실패하고, 뒷날을 기약하며 일본으로 건너갔지만 일본 정부의 핍박을 받으며 어려운 생활을 하다가 망명지 중국 상해(上海)에서 수구파가 보낸 자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습니다.

김옥균 생가지가 있는 감나무골에서 광정역을 향해 가다보면, 창말을 지나게 됩니다. 바로 이즈음이 <여지도서>에 나오는 북창(北倉)이 있던 곳입니다. 이 책에 북창은 "8칸이다. 관아 북쪽 40리 정안면에 있다"고 했고, <대동여지도>에는 광정역의 서쪽에 나란히 표시하였습니다. 그곳에서 정안천을 건너면, 옛 광정역이 있던 장터마을에 듭니다. 지금 그곳은 정안면 소재지가 되었고, 강변에는 장터가 서 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주 북쪽 45리에 있다"고 했고, <여지도서>에는 "관아의 북쪽 40리 정안면에 있다"고 나옵니다. 역이 있던 곳은 새터마을 동쪽 장터마을 일원인데, 이곳에는 지금도 오래된 옛집들이 남아 있어 옛 역마을을 헤아릴 수 있게 해 줍니다.

광정역 옛터를 지나는 길손들.

◇궁원(弓院)을 지나다

옛 역터를 나서면 길은 동쪽으로 연기(燕岐) 방면으로 이르는 604번 지방도와 갈라져 정안천 가를 따라 줄곧 남쪽으로 이어집니다. 갈림길에서 얼마지 않은 정안천 보호사면에는 강변의 보호림에 둘러싸인 낚시터에서 주말을 맞아 이곳을 찾은 강태공들이 한가롭게 세월을 낚고 있습니다.

광정역이 있던 곳을 나서서 10리쯤 걸으니 궁원이 있던 장원리 아랫말에 듭니다. 한길에서 동쪽으로 250m 정도 떨어진 곳에 효자 최익항(崔益恒: 1684~1733)을 기리는 정려각이 있어 발길을 그리로 돌려 살펴봅니다. 그의 효행은 <여지도서>와 <순조실록>에도 실려 있습니다. 앞의 책에 따르면, 그는 어머니 정씨가 병이 들자 10년을 한결같이 봉양하였고 부모님이 돌아가시자 한 번도 상복을 벗지 않고 예법대로 장사 지내니 영조 때 호조정랑을 증직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이때의 일은 바로 조치되지 못하였던 듯 <순조실록>과 이곳의 정려각에 기록하기로는 순조 17년(1817) 3월에야 정려를 받게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정려각을 뒤로하고 궁원교를 건너면 바로 이곳이 <여지도서>에 "주 북쪽 40리에 있다"고 한 궁원이 있던 곳입니다. 궁원은 활처럼 생긴 마을의 형국에서 비롯한 이름이라 전하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곳을 화란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궁원을 풀어 읽던 활원이 그리 변한 것으로 보입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를 보면, 궁원은 동쪽의 불당고개와 질마고개 서쪽 골짜기의 구활원에서 옮겨 온 듯합니다. 이 지도에 구활원인 고궁원(故弓院)과 궁원 사이에 서궁원 등의 지명이 명기되어 있어 그리 헤아리게 되는 것이지요.

◇석송정(石松亭)

궁원 옛터를 지나면서 다시 옛길 위로 23번 국도가 잠깐 겹쳐 지납니다. 장원리 새말을 지나면서 옛길은 산자락에 자리 잡은 석송리를 찾아 듭니다. 석송리 안말을 벗어나는 산모롱이에는 마을의 이름이 비롯한 석송정이 있습니다.

석송정은 1624년에 인조 임금이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가던 길에 어가(御駕)를 잠시 멈추고 쉬었던 것을 기리기 위해 지역 유림이 세운 정자입니다. 당시 지역 유림들이 백성들의 어려움을 호소하자 세금을 감면해 주었다고 하며, 그들의 청을 받들어 석송동천(石松洞天)이라는 친필을 내렸다고 전합니다. 지금도 정자 뒤 바위에는 인조의 친필 각자가 남아 있어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주는 깃대 구실을 톡톡히 해 주고 있습니다.

   

◇모로원(毛老院)을 지나다

석송정을 지난 옛길은 모로원이 있던 모란마을 들머리까지 약 3km 구간을 다시 23번 국도에 자리를 내어주고 마니 어쩔 수 없이 굉음을 쏟으며 질주하는 국도를 따라 걷습니다. 모로원 동쪽 봉화산(226m)은 고등산(高登山) 봉수가 있던 곳입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지지에는 "주 북쪽 30리에 있는데 남쪽은 월성산 봉수에 응하고, 북쪽은 쌍령에 응한다"고 했으니, 이 또한 차령 서쪽의 쌍령 봉수가 옛길과 나란히 열린 것과 마찬가지의 상관성을 보여주고 있는 사례입니다.

모로원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주 북쪽 26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원집은 지금의 오인리 모란마을에 있었는데, 예전에는 다리를 통해 정안천 동쪽의 오룡리로 이르는 갈림길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이곳 모로원에서 공주를 오가던 옛길은 지금의 국도와는 선형을 달리 하고 있어 걷기에 편합니다. 옛길은 국도를 사이에 두고 동서쪽을 오가는데, 오인들 남쪽에서 정안천을 건너 수촌들과의 사이에 난 둑길을 걸으니 그곳 둔치에는 경비행기장이 개설되어 있습니다.

수촌들을 벗어날 즈음에서 마주하는 정안천 서쪽의 목천리는 인절미라는 떡의 이름이 비롯한 곳입니다. 이괄의 난을 피해 공주로 내려가던 인조 임금은 당시 이곳에 살던 임씨가 만들어 올린 떡을 먹고 너무 맛있어서 '절미(絶味)로다'고 한데서 임(인)절미라는 떡의 이름이 생겨났다는 유래 설화입니다. 이 이야기를 다시 들으니 어릴 적에 가을걷이를 마치면, 그해 거둔 쌀로 어머니께서 만들어 주시던 인절미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또렷이 떠오릅니다.

인절미에 얽힌 유래 설화를 되새기며, 수촌들을 지나 둑길을 벗어나는 즈음에 23번 국도와 갈라지는 갈림길이 열려 있고, 그 동쪽 산모롱이에는 돌모루라는 마을이 있습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도 석우(石隅)라 적고 도루모루(トルモル)라 병기해 두었습니다. 이로써 모퉁(롱)이를 뜻하는 모루는 앞서 지나온 모로(毛老)와 그 뜻이 닿아 있을 듯 보입니다만, 앞으로 더 관심을 갖고 살펴볼 일입니다. 지도를 살펴보니 이 갈림길의 서쪽으로 돌모루와 비슷한 거리에 검바위가 있는데, 그 이름이 예사로워 보이지 않습니다. 검바우는 한자로 구암(龜岩)이라 적지만 '검'은 우리말로 우두머리 또는 지모신(地母神)을 뜻하는 '곰' '감'과 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하다면 이 지명은 공주(公州)의 옛 이름인 웅천(熊川), 곧 곰내와 어떤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 예서부터 옛길은 산자락을 따라 열려 있지만, 그 길은 걸을 수 없어 우리는 최근 공주시에서 조성한 정안천 가의 수변공원 사이로 열린 길을 따라 공주로 향합니다. 지나는 길에 마주치는 공원 안 연못에는 홍련과 백련이 가득하여 연지(蓮池)라는 이름값을 제대로 해 내고 있습니다. 이 길을 벗어나니 일신역(日新驛)이 지척입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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