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공무원]박영숙 통영해경 복지 담당

30년 전이다. 청소를 하고 커피를 끓이고 온갖 잔심부름까지 하면서 그는 지칠 때가 많았다. 타이핑이 그의 일이었지만 사무실 내 잡일이란 잡일은 다 해야하는 처지였다.

승진 기회가 없는 사무보조 공무원으로 통영해양경찰서에서 처음 일을 시작한, 그의 이름은 박영숙(49·경무기획과·사진)이다.

1982년 5월 해경은 통영해양경찰서란 이름으로 통영에서 업무를 시작했다. 84년 1월 박영숙 씨는 보험회사를 그만두고 고용직 공무원(사무보조원)이 됐다. 그리고 29년 6개월을 이곳에 몸담았다.

당시 그는 경찰관이 수사 과정이나 업무에서 휙휙 적어온 사건 기록과 각종 보고서, 경위서 등 온갖 서류를 타이핑하는 일을 했다. 그랬기에 모든 해경 서류는 그를 거쳐 문서화됐다.

구형 타자기는 정말 답답했다. 한 글자 오타만으로도 문서를 송두리째 다시 쳐야 했다. 업무는 처음부터 착착, 탑처럼 쌓여 있었다.

   

타자기를 하도 두들기다 보니, 그는 '타이핑만 하다가 늙어버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경무과 소속이었지만 해경 관련 모든 타자를 자신이 해야 했다. 사건 사고는 계속됐고 타이핑 분량은 끝이 없었다. 상부 보고용 문서나 검찰 송치, 각종 경위서 업무보고서 등 거의 모든 업무가 그를 거쳐갔다.

"입사하고 거의 10년을 휴가는 물론, 휴일 쉬기도 눈치가 보였다. 할 일이 쌓였으니까."

말이 10년이지, 새파랗던 아가씨가 통영해경에서만 10년을 일하고 있었다. 하도 일이 많아 쉬지 못하는 날의 연속이었다.

하루는 억울한 상황이 벌어졌다. "우리 과 업무는 제쳐놓고…도대체 개념이…."

같은 과 업무를 먼저 하지 않았다고 상사는 노발대발했다. 박영숙 씨는 화장실을 핑계로 지하에 있던 문서 창고로 들어가 숨어버렸다.

그 속에서 칸칸이 쌓여 있는 문서 중 하나를 집어들고 읽었다.

'이거, 내가 썼지.'

서류를 넘기며 그가 읊조렸다.

한 장 한 장 문서를 넘기는데 서럽고 아픈 기운이 밀려오고 있었다. 21세, 젊고 어린 여자가 타이핑하던 모습. 바로 자신이었다. 넘기는 서류마다 타이핑 당시의 기억이 서류를 통해 고스란히 흘러나오고 있었다.

82년 통영해경이 시작된 이래, 그가 숨어버린 10평 문서고에는 엄청난 공식 서류 더미가 차곡차곡 쌓여있었다. 통영해경이 생기고부터 시작된 공식 서류의 전부였다.

이렇게 먼지가 쌓인 이 문서들이 자신의 과거였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한 자신이 대견스럽고 기특했다.

"그래, 그래, 장하다. 내 청춘."

20대를 송두리째 문서와 산 그는, 문서고에서 이미 30을 넘어섰음을 알았다.

해양경찰 전경 출신 남자를 사귀었고 다시 해경으로 들어온 그와 결혼했다. 아이를 낳았고 그렇게 살아왔다.

타 지역 전출 한 번 없이 박영숙 씨는 통영해경에서만 30대를, 그리고 40대를 살았다.

"구식 타자기부터 전동타자기, 전자타자기 286컴퓨터. 얼마나 많은 타이핑을 했는지, 타자기가 바뀌는 모든 종류를 다 다뤄봤어요. 저는 한국 타이핑의 역사이기도 하지요."

고용이 보장되고 승진이 되는 평범한 공무원 되기 위해 89년 박영숙 씨는 시험을 쳤다. 기능직으로 전환했다. 2년 전 다시 시험을 쳐 일반직으로 전환하면서 450명 정도 통영해경 구성원 중 경찰이 아닌 1%, 일반 공무원이 됐다.

그리고 현재 그는 복지 업무 등을 맡고 있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특히 지난해 10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다. 통영해경 소속 한 경찰이 함정에서 근무하다 귀가한 뒤 갑자기 숨졌던 것이다.

일반사망으로 처리하려던 즈음, 숨진 경찰의 아내가 찾아와 울며 하소연했다.

'내 가족이라면?'

되든 안 되든 '공무로 인한 사망'을 입증하고 싶었고 유족에게 예의를 갖추고 싶었다.

'이름, 주민번호, ○년 ○월 ○일 ○시 응급 출동, ○월 ○일 ○시 돌발 상황으로 인한 출동, 취약지역 주로 근무, 스트레스 가중….'

이후 그는 숨진 이의 근무 기록을 낱낱이 조사해 서류화했다.

결과를 장담하지 않았지만 '업무상 사망에 해당한다'는 기대 밖의 결과가 나왔다.

"나는 사무보조원으로 통영해경에 들어왔어요. 그리고 기능직으로 전환됐고 일반직이 됐어요. 저는 통영해경의 역사이고 뼛속까지 해경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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