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 볼 나이에 자식 보게 생겼습니다.' 늦은 나이의 임신을 축하하는 주위의 격려에 떨어 본 너스레. 늦은 결혼과 임신을 여유롭게 봐달라는 나의 능청스러운 말은 사실 은근한 근심이 배어 있기도 한 농담 속 진담.

주변에서는 과거보다 나아진 임신부의 영양 상태며 발전된 의술, 임상적으로 드러난 늦은 나이의 건강한 출산 확률 등을 사례로 근심을 줄여주시고 또 그 말들에 한순간은 마음을 편히 내려놓아 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임신부의 태어날 아이에 대한 노심초사는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 순간까지 절대 벗어버리기 힘든 우울증 같은 것이다.

아이를 임신하고 키우고 낳는 열 달의 과정은 그야말로 한 해 농사를 짓는 일과 다름없는 것이어서 혹시나 궂은비에 쓸려가지나 않을까, 햇빛이나 거름이 부족해 삐쩍 마르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과 조바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유전자의 반쪽이나 제공했지만 임신과 출산의 근심과 고통에 관해 그 무엇도 나와 공유할 수 없는 태생적 한계를 지닌 남자, 우리 남편은 신기함으로 묻곤 한다. 아이가 몸속에 있는 것이 과연 어떤 느낌이냐고.

나는 '혼자 쓰던 수건, 함께 나눠 쓸 때 느끼는 냄새를 공유하는 기분', 혹은 '혼자 대자로 누워 자던 침대, 함께 누워 잘 때 느끼는 배분받은 공간감의 느낌 정도라 할 수 있을까'라는 말로 이해를 간단히 도우려했지만, 사실 한 생명체와 또 다른 생명체가 한동안 공생하는 느낌이란 직접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특이한 체험이다.

어느 글에서 남성보다 여성이 인간적 유대의식과 타인의 고통에 대한 감응 능력이 훨씬 뛰어난 이유를 임신과 출산 및 월경에 있다고 한 것을 본 기억이 난다. 나와 다른, 낯선 이(혹은 고통)와 신체적 경험을 함께 겪어본 이가 느끼는 타인에 대한 고통의 감도는 아무래도 그러지 못한 이와는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인 시어머니는 생명은 우리 인간들보다 더 높은 분이 주시는 것이므로 아무 걱정 말라고 하지만 그러한 신앙이 전혀 와 닿지 않는 나에게 오롯한 믿음은 오히려 따로 있다. 배가 싸하니 당기고 아프며, 늘 기분이 개운하지 않고 무겁기 짝이 없고, 게다가 견딜 수 없는 입덧까지 겪고 있는 고난 중에서도 애타게 비는 뱃속 아이의 평안은 참으로 모순적이게도 그저 순풍 타듯 지나가는 시간의 흐름에 운명적으로 맡겨버리는 마음과 함께이기 때문이다.

   

어느 진화생물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유전자를 실어 나르는 수단일 뿐, 생장하면 당연히 사멸하는 세상의 자연스러운 이치와 순환의 수레바퀴 속에서 다만 끝없이 새로운 개체를 낳아 키우는 일만을 이어갈 뿐이다. 그 길게 이어진 흐름 속에서 느끼는 '시간의 결'. 오직 그 '시간'만이, 그 '결'만이 존재할 뿐 사실 안타깝게도 우리 자신 하나하나는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내가 아이를 낳아 기른다는 것은.

/서은주(양산범어고 교사)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