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 길을 되살린다 (44) 통영별로 10일 차

오늘은 오랜만에 통영별로 옛길 걷기 길벗들이 함께 시간을 내어 걷습니다. 각자 주말에는 바쁜 일정이 있어 일요일 새벽 5시에 창원을 출발하여 8시 25분에 공주시외주차장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오늘 출발 지점인 행정으로 향합니다. 거리가 만만찮아 아침부터 거마비로 2만8800원을 지출합니다. 행정에서 남녘으로 길을 잡은 시간은 8시 50분, 이제부터 오늘 여정이 본격적으로 펼쳐집니다.

◇태평원을 지나다

출발지인 행정(杏亭)은 이름으로 보아 혹 은행나무 정자가 있던 곳인가 싶어 우리끼리 이러니 저러니 이야기가 오갑니다. 그러면서 마을을 둘러보니 어디에도 그런 자취를 찾을 수 없어서 논일하는 어른께 여쭈어 봅니다. 어른께서는 행정은 행촌과 구정이란 두 마을의 이름을 붙여 고쳐 지은 이름이라고 하십니다. 역시 모르면 물을 일입니다. 바로 이곳은 옛 덕평점(德坪店)이 있던 곳인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실려 있지 않고, <여지도서> 천안 도로에는 덕평참막(德坪站幕)이라 나옵니다. 아마 그 바로 아래에 있던 대평원을 대신하여 들어선 것으로 보입니다. <대동지지>에 그 거리는 지난 여정에서 거쳐 간 금제역에서 10리라 했습니다.

행정초등학교 삼거리에서 길은 남쪽을 향하는데, 그 자리에는 측량 원점을 세워두었습니다. 두어 걸음 걸으니 옛 태평원(太平院, 또는 대평원)이 있던 대평 1리입니다. 마을 입구에 세운 유래비에는 대평원이 있어 대평리라 한다고 적어 두었습니다. 바로 이곳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 역원에 실린 대평원(大平院)이 있던 곳입니다. 거리는 고을 남쪽 35리라 적었습니다. 옛길은 이곳 사람들의 젖줄인 곡교천(曲橋川) 연변을 따라 열렸습니다. 대평원이 있던 마을에서 피덕으로 오가는 길가에는 아까시·엉겅퀴·찔레·애기똥풀·망초 같은 들꽃이 우릴 반깁니다. 마을 들머리에는 최근에 다시 세운 청백리 양칙의 신도비와 이를 모신 숭의비각이 눈에 듭니다.

길가에 도열한 들꽃들의 환송을 뒤로 하며 피덕을 벗어나는 길가에는 전통 방식으로 꿀을 치는 벌통이 보입니다. 지나는 길에 보았던 저 꽃들에서 융복합적인 꿀이 생산되겠지요. 이 꽃 저 꽃 온갖 꽃에서 모은 꿀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게 조화롭고 나의 공부도 그렇게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피덕에서 새터말로 향하는 길가 들녘에는 부지런한 농부들이 모를 내고 있습니다. 저이들이 보기에는 우리가 얼마나 한가해 보이겠습니까. 제 눈에는 저분들이 그리 보이는데 말입니다. 요즘은 모내는 풍경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예전에 제가 어렸을 적에는 마산수출자유지역이나 한일합섬에서 일손을 거들기 위해 나온 처자들이 한 논에만 수십 명씩 몰려들어 우리 동네 형들, 아제들 가슴께나 벌렁거리게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때는 그야말로 마을 잔치가 따로 없었지요. 그런데 요즘이야 어찌 그렇습니까. 이제 농사일은 마을을 지키는 늙은이들 차지가 되었거나 대리 경작을 통해 노동력 부족을 해소하는 실정이니 격세지감입니다.

   

◇원터에서

새터말을 지나면 곧바로 원터마을이니 이제 겨우 10리를 걸은 셈입니다. 이곳은 예전에 원이 있던 곳이라 그런 이름이 남았는데, <대동지지>가 기록될 즈음에 이미 원의 터만 남아 원기(院基)로 실려 있습니다. 원집은 차령(車嶺)의 북쪽에 두어진 것으로 보아 한양에서 남쪽으로 길을 잡아 가던 길손들의 이용이 많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예서 차령 기스락으로 난 옛길을 놓치고 그만 편한대로 23번 국도를 따라 걸었습니다. 차령 아래서 국도가 심하게 꺾인 곳에는 원의 기능을 대신하는 음식점이 우리 길을 막고 있으니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길을 잡아 나선지 두어 시간이 지났으니 잠시 쉬며 에너지를 보충하자는데 아무도 다른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산채를 넣은 빈대떡과 이곳의 명물 밤막걸리로 목을 축이며 숨을 고릅니다.

◇차령(車嶺)을 넘다

막걸리로 원기를 되찾은 우리는 차령을 향해 부지런히 산길을 오릅니다. 차령을 향해 오르는 길가에는 질경이가 길을 가득 덮고 있습니다. 이 고개가 그 남녘에서 태를 묻은 사람들에게는 그리 달갑지만은 않을 겁니다. 후삼국 통일전쟁을 치르면서 이 지역 사람들에게 곤욕을 치른 왕건(王建)이 죽음에 이르렀을 즈음에 측근 박술희를 불러 남긴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차령(당시에는 차현이라 했음) 이남의 사람을 중용치 말라고 했음인데요, 그런데 당시의 사적을 뒤져보면 그리 불편해 할 만한 일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바로 왕건은 누구보다도 지금의 전라도 출신 인사들을 중용했기 때문이지요.

차령 옛길에는 아까시나무가 만개했다. /최헌섭

<신증동국여지승람> 천안군 산천에는 "차현(車峴)은 고을 남쪽 45리에 있다"고 나옵니다. 같은 책 공주목 산천에는 "차현은 주 서북쪽 57리에 있다. 고려 태조의 훈요(訓要)에 이르기를 '차현 이남과 공주강(公州江:공주 지역을 흐르던 금강의 옛 이름) 밖은 산형과 지세가 모두 배역(背逆)해 달려 있다'고 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나옵니다. 천안과 공주의 산천에 모두 실렸으니 이 고개가 지경(地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여지도서> 공주목 도로에는 이 고개를 통해 천안 지역과 넘나들던 길을 차령로(車嶺路)라 하고 대로(大路)로 분류했습니다.

고개의 서쪽 봉수산(366.4m)은 이곳에 있던 쌍령(雙嶺) 봉수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이곳 고갯마루에는 폐점한 휴게소가 덩그러니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차들이 새로 열린 대체도로로 옮겨갔기 때문입니다. 우리 일행은 여기서 내리막길을 두고 갑론을박을 벌입니다. 고개를 오를 때 옛길을 제대로 찾지 못한 길라잡이가 못 미더워 벌어진 일이지요. 그래서 고갯길이 지향하는 옛길의 경제학을 따라 곧장 내려서는 길을 택한 이와 그냥 국도를 따라 걷는 이로 나뉘어 잠시나마 헤어지기로 합니다. 옛길은 고갯마루에서 남쪽으로 곧게 열려 있는데, 중간에 밤나무 과수원이 들어서서 길이 끊겼습니다. 인풍초등학교 조금 못 미친 곳에서 국도 23호선과 합류하면서 헤어진 이들과 만나 다시 일행(一行)이 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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