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방송사의 아나운서가 강용석 전 의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공인이 자숙은커녕 뻔뻔스럽게 오락 방송의 아이콘 행세하는 게 과연 적절하냐는 내용이었다. 만일 그 글이 강용석 개인 비판에서 끝났다면 일종의 사사로운 '구원'(舊怨)에서 비롯된 것이라 여기고 마뜩잖았을 것이다. '물의'의 시작이 '설화'였고, 그 내용이 아나운서라는 직업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글은 강용석 개인에 머물지 않고 그를 기용한 방송사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즉 방송사가 그를 쓰는 것은 욕먹으면서도 계속 막장 드라마를 제작하는 것과 같으며, 이는 방송사가 대중을 쉽게 여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특히 "강용석을 보면 돈세탁하듯 이미지 세탁도 가능하다는 걸 느끼게 된다"는 대목이 압권이었다. 현대 미디어, 특히 방송의 본질을 가장 적확하게 표현한 부분이었기에 그렇다.

지난 3월 청와대에서 열린 고위직 임명장 수여식에서 김장수(맨 오른쪽) 국가안보실장이 옆을 지나가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그의 주장대로 방송은 힘이 세다. 맘만 먹으면 하루아침에 악마를 천사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그런 이유로 대다수 국가가 주파수를 사회적 공기로 여겨 엄격하게 관리한다. 신문은 특정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할 수 있지만 방송은 절대 그럴 수 없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선거에 TV 토론이 도입된 이후 방송의 힘은 더 세졌다. 제아무리 정치적 식견이 훌륭하다 한들 이미지 제고 없인 입문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정당들이 정체성과 전문성보다 당선 가능성에 목을 매고 방송을 통해 알려진 인물 위주로 공천을 하기 때문이다.

지난 며칠간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그 중 한 인물이 눈에 띈다. 김장수 청와대 안보실장이다. 그는 당시 국방부 장관으로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 않고 악수했다는 단 한 가지 이유로 '꼿꼿 장수'라는 애칭을 얻었다. 이후 치러진 2008년 총선에서 그를 영입하기 위한 여야의 전쟁이 벌어졌다. 그런 그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NLL 관련 발언' 파문 과정에서 보여준 처신에 분개하는 이들이 많은 것 같다. 배신자니 패륜이니 하는 글들이 넘쳐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에게 무슨 죄가 있으랴. 그는 늘 지금 같은 삶을 살아왔을 뿐이며 다들 '또 다른 그'를 상상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누군가를 탓해야 한다면 '돈세탁 하듯 이미지도 세탁해 주'는 미디어와 그들이 쉽게 여긴다는 시청자들이니 결국 제 얼굴에 침 뱉기인 셈이다.

최근 벌어지는 기이한 일들을 보면 더욱 그렇다. MBC는 <시사매거진 2580>에서 국정원 관련 아이템만 삭제한 채 방송하는 만행을 저질렀고, YTN은 국정원 전화를 받은 뒤 관련 기사가 사라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그리고 KBS는 어수선한 틈을 이용해 오직 수신료 인상에만 목을 매고 있으니 이 모두가 시청자가 무섭다면 절대 동시에 일어날 수 없는 일들 아닌가.

'멍청이'라는 뜻을 가진 'Idiot'라는 단어는 세상일에 무관심하거나 판단할 능력을 상실한 이들을 가리킨 데서 유래했다. 고대 그리스에선 그런 이들에게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TV의 또 다른 이름은 'Idiot Box', 즉 '바보상자'다. 요즘 그 바보상자에선 '먹방'이 유행이다. '먹는 방송'의 준말이라고 하지만 원래는 '24시간 내내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방'을 일컫는 말이다. 온 세상이 먹방이다.

/김갑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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