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인터뷰]딸 박영희가 쓰는 엄마 이금순 이야기

엄마라는 말은 언제 들어도 가슴 뭉클해지는 단어이다. 나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 한쪽이 뭉클해진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엄마와 속 깊은 얘기를 하는 시간보다는 식사 때 잠깐 시시콜콜한 얘기를 나누는 것이 대부분이다. 직장을 다니게 되면서부터는 그마저도 아침식사 때가 전부이다.

이에 딸 박영희(26)가 엄마 이금순(51·가정주부) 씨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동안 몰랐던 얘기를 많이 듣게 되었다.

-엄마는 어디에서 태어나 자랐어?

"경북 월성군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랐어. 감골이라는 곳이었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앞에는 물이 흐르는 정말 시골이지."

-일곱 형제 중에 넷째로 태어났는데, 어땠어?

"어땠긴. 그대로 컸지. 옛날에는 너희 외할아버지·외할머니가 챙기거나 하는 게 없었고, 엄마가 밑에 동생들을 챙겨야 했지. 그때는 그런 집이 많았어. 위에 언니·오빠들이 밑에 동생들을 챙기고 했지."

-학교는 어떻게 다녔어?

"엄마 사는 곳 근처에는 학교가 없었지. 산을 넘어야 있어서 하루에 5~10km를 매일 왔다 갔다 하면서 다녔지. 아마 한 시간씩 걸어서 다녔을 거야. 동네 친구들이랑 함께 매일 다녔는데 먼 거리를 다니느라 힘들었어. 비가 내려도, 눈이 내려도 다녔지. 그런데 비가 정말 많이 내리는 장마 때는 도랑이 잠기면 학교에 못 갔어."

-엄마는 어렸을 때 동네친구들과 뭐하며 놀았어?

"고무줄놀이나 땅따먹기·공기놀이·숨바꼭질 같은 거 하면서 놀았지. 그 때는 따로 장난감이 없었어. 또 요즘에는 멀리 소풍을 가지만 그 때 엄마가 제일 먼 곳으로 간 곳이 경주 석굴암이었을 거야. 그 외 대부분은 근처 산으로 가고는 했지. 산에서 찔레 꺾어 먹고, 산딸기·참꽃(진달래)·솔방울 따고 놀았지. 산에서 딴 솔방울을 학교로 가져가서 난로에 넣어 불을 때기도 했어."

-지금은 엄마가 태어나고 자란 동네에 어린 애들이 없잖아. 그때는 또래 친구들이 많았어?

"내 또래는 10명 정도 있었어. 엄마는 밑에 동생들 돌보느라고 또래 친구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갔지. 그래서 동네 또래 친구들과 연락이 지속되지 않았어. 지금 뭐하나 모르겠네. 궁금해도 어쩔 수 없지 뭐. 연락할 방법이 없으니 말이야."

-커서 부산으로 간 이유는 뭐야?

"일하기 위해 갔지. 부산에서 일하면서 외삼촌과 이모를 데리고 살았어. 그때부터 엄마는 가장이었지. 그때 나처럼 돈 벌기 위해 객지에서 일하러 온 친구들이 많았어."

-그때 제일 기억에 남는 친구가 있어?

"이순남이라는 친구가 제일 기억에 남아. 강원도에서 일하러 온 친구였어. 마음이 가장 맞았지. 얘기도 많이 하고…. 지금은 연락이 안 돼. 포항으로 이사 갔다는 얘기를 듣기는 했는데…."

-그 친구와 어떻게 헤어졌어?

"언제 헤어졌는지도 이제는 기억이 흐리네. 그 친구가 중간에 다른 곳으로 갔어. 그러고 난 뒤 조금 있다가 그 친구 결혼사진을 받았어. 그 사진도 아는 사람을 통해 받았는지, 우편으로 받았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그 뒤로 연락이 끊겼지. 사진을 통해 포항으로 갔다는 것을 알았지."

젊은 시절 엄마의 멋진 모습.

-그 친구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어?

"항상 그런 마음이 있었는데 못 찾았지. 이름만 알고 있으니 찾을 방도가 딱히 없더라고. 한때 미니홈피인가, 그게 유행할 때 너한테 부탁했던 거 기억하지? 이름으로는 찾을 수 없다고 해서 포기했지. 다른 친구들도 연락이 되지 않아서 알 길이 없었지."

-엄마, 나 낳을 때 힘들었다고 했는데 왜 그런 거야?

"양수가 터졌는데도 네가 안 나오는 거야. 사흘 동안 안 나와서 수술하러 부산에 있는 큰 병원으로 옮겼어. 그런데 그 병원에서 수술하려고 준비하는 중에 나왔지. 너 놓고 난 뒤에는 내가 얼마나 하혈을 했는지…. 정말 죽을 고비를 넘긴 거나 다름없었지. 그래도 네가 정상 체중으로 몸 건강히 태어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몰라."

-날 키우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이 있어?

"수없이 많지. 그중에서 몇 가지 있는데, 너 낳고 나서 엄마는 잘 먹지를 못했어. 그래서 너 몸무게도 늘기는커녕 오히려 줄었지. 그래서 예방접종하러 갔는데 체중 미달로 주사도 맞지 못하고 집으로 다시 돌아와야 했어. 그리고 또 기억나는 게 있는데…. 네 돌사진 찍어주러 사진관을 갔었지. 그때 사진 보면 알겠지만 네가 남자 옷을 입고 있잖아. 사진사가 남자인 줄 알고 남자 옷을 준거야. 그때는 사진사가 주길래, 그냥 그런 줄 알고 입혔지."

친구들과 함께 찍은 사진. 앞 줄 맨 오른쪽이 엄마.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 바라기였다고 하던데 맞아?

"그래. 넌 항상 엄마 곁을 떠날 줄 몰랐어. 내가 화장실 갈 때도 데리고 다녔으면 말 다한 거지. 엄마가 곁에 잠시라도 없으면 울고 했으니깐. 또 그때는 낯을 너무 많이 가려서 다른 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오지도 못했고, 밖으로 놀러 가지도 못했어. 그런데 지금은 이렇게 낯가리지 않고 사람들과 잘 사귀고 얘기하는 거 보면 신기하지."

-엄마는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해?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해서 좋은 가정을 꾸렸으면 해. 그리고 항상 건강하게 살았으면 해."

-마지막으로 엄마 꿈은 뭐야?

"역시 건강하게 잘 사는 거지. 그냥 아프지 않고 즐겁고 행복하게 사는 게 꿈이야."

결혼하기 전에는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동생들을 키우고, 결혼하고 나서는 엄마라는 이름으로 자녀를 키우시느라 많이 힘드셨을 엄마. 그냥 엄마라는 이유로 그 책임을 다하라고 강요를 한 것은 아닌지 반성이 됩니다. 항상 엄마가 해주는 것에 익숙해져 감사함을 몰랐던 나. 내가 지금까지 큰 어려움 없이 살아온 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 모든 것이 엄마가 열심히 산 흔적과 같다고 생각하니 마음 한쪽이 저립니다.

항상 남들보다 작음에 미안해하고, 또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는 엄마. 하지만 '엄마 덕분에 이렇게 건강하게 자랐고, 또 이런 내가 정말 행복하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박영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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