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지사람도 장학회 하는데 경남사람은 동참 안해"

이재욱(72)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이 지난 2004년 1월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지 10년째가 됐다. 그는 당시 은퇴 축하연 자리에서 "경영 일선에서는 물러나지만 그동안 꾸준히 해왔던 사회사업들을 본격적으로 해나가겠다"고 말한 바 있다.

당시 약속대로 그는 지난 10년 간 '재단법인 봉림'과 '사단법인 경남동그라미회' '대한검도회' '사단법인 한국지속농업' 등을 통해 다양한 사회사업들을 해왔다.

그는 함경남도 북청군 출신으로 서울 휘문중·고등학교와 서울대 전자공학과를 나왔다. 경남 출신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경남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86년 핀란드 최대의 다국적 기업 노키아의 한국 법인인 (주)노키아티엠씨(NOKIA tmc) 대표이사를 맡으면서부터였다. 그가 재임했던 18년 간 노키아티엠씨는 100배 성장을 이뤘고, 연간 3조 7000억 원이라는 매출과 종업원 1인당 매출 42억 원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다.

이재욱 노키아티엠씨 명예회장. /박일호 기자

이재욱 회장을 최근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북면 영학리 학동마을 자택에서 만났다.

"제가 경남 사람은 아니지만, 마산에 와서 성공했잖아요. 돈도 명예도 모든 걸 여기서 얻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서 열심히 장학재단을 만들고 지원을 하는 거죠."

그가 장학사업에 특히 애정을 쏟는 것은 고향인 북청군과도 관련이 깊다. '북청 물장수'로 유명한 북청군은 예부터 향학열이 높고 출향인들을 중심으로 장학회가 아주 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인구는 많고 땅은 좁아서 농사만 해갖고는 살 수 없으니까, 젊은 사람들은 대개 서울로 왔어요. 그래서 물장수도 하고…. 그래서인지 북청은 우리나라에서 향학열은 넘버 원이에요."

북청 사람들의 향학열이 유난히 높은 배경은 뭘까?

"옛날부터 그랬어요. 공부를 안 하면 살 방법이 없었어요. 함경남도 장학회가 있는데, 군 단위, 면 단위 장학회까지 있어요. 저도 대학 다닐 때 2학년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함경남도 장학회에서 장학금을 받았죠. "

◇10년 간 지원금액 20억 원 육박 = 그의 장학사업은 2003년 창립한 봉림재단을 통해 주로 이뤄진다. 하지만 봉림재단의 사회사업은 일반 학교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단체나 시설을 통해 집행되고 있다.

"한 군데에 줘서 운영하게 하는 건 효율적이지 않다고 봐요. 필요한 곳에 필요한 장학금이 지원되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그런 단체를 통하고 있죠."

그 대상에는 가정폭력 피해여성들이나 위기청소년들도 포함돼 있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한 피난처가 있는데, 나라에서 도와주는 것은 6개월뿐이에요. 여섯 달 후에는 그 여성이 어딜 갈까요? 그래서 6개월 동안 독립하지 못한 여성을 더 머물 수 있게 해주고, 기술을 배울 수 있도록 교육도 시켜주고 그런 지원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와서 도와주고 있어요. 그리고 몸 파는 10대 여성들, 나라에서 붙잡아 오는데, 그 아이들을 소년원에 보내면 더 악화되겠죠? 그래서 그 아이들을 돌봐주는 단체가 있어요. 거기 있는 아이들 중·고등학교, 전문학교, 대학교에 진학할 경우 교육비도 지원하고 있죠. 인원 제한 없이 누구든지 학교 진학하면 도와주고 있어요. 그 애들이 부모도 못 믿고 사회도 못 믿고, 우리 봉림재단만이라도 믿을 수 있게끔 하는 거죠."

고아원도 봉림재단의 지원 대상 중 하나다.

"고아원에 있는 아이들도 고등학교 졸업하면 떠나야 해요. 그러면 그 애들이 어딜 가요? 어디 가서 먹고 살아요? 그런 아이들 중 대학 진학하는 아이들에게도 장학금을 지원하죠. 그렇게 지원받은 아이들 중 둘에 하나는 성공을 해요."

◇"외지 사람도 하는데 이 지역 사람들은 왜?" = 그가 준 명함에는 '치릴로장학회'와 '사단법인 날개' 이사장이라는 직함도 있었다.

"치릴로라는 신부가 있는데, 신부가 돈을 만들 줄을 모르니까. 몇 년간 짚세기로 뭔가를 만들어 팔아도 보고 했는데, 여성의 집 아이들 가르치려고 신부님이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안 되니까 나에게 좀 도와달라고 했어요. 당신 이름으로 하든 뭐로 하든…. 그래서 치릴로 장학회가 되었죠."

사단법인 날개는 일종의 위기청소년 쉼터와 같은 곳이다.

"집창촌에는 안 들어갔지만, 부모는 싫고, 길거리에 나와서 돌아다니는 여자애들이 꽤 있어요. 나라에서 그 아이들을 잡아서 부모에게 보내면, 또 뛰쳐나오고…. 들어가면 두들겨 맞으니까. 이런 아이들을 보호해줄 곳이 필요하다고 하여 경남도에서 어느 단체에 요청을 했어요. 그 단체에서 저에게 다시 도움을 요청했죠. 여성의 집과 비슷한데, 타락하기 직전의 아이들이죠. 도에서 인건비는 나오고, 진해에다가 집을 얻어서 직원 채용해서 운영하고 있죠. 대학도 갈 수 있고, 필요하면 유학도 갈 수 있고, 지금 5명 있는 걸로 아는데, 아마 더 늘어날 거예요. (흐뭇한 표정으로 웃으며) 한 아이는 무조건 공부만 해요. 얼마 전 고입 검정고시 거쳤고, 금년 안에 대입 검정고시도 칠 거예요. 나라에서 하긴 어렵고, 이 지역에선 해줄 사람이 없고…."

이 대목에서 그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지역사회에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이었다.

"제가 10년 동안 장학회를 운영해왔는데, 나는 경남 사람 아니거든요? 여기서 학교도 안 나왔어요. 이렇게 객지 사람이 이 지역에서 장학회를 하고 있는데, 이 지역 사람들이라면 10분의 1이라도 따라와야 하는 게 당연하지 않나요? 그러지 않아서 불만이에요. 안 따라오는 이유 중에 돈이 없다고도 하지만, 난 그건 아니라고 봐요. 함경도 북청 사람들은 어딜 가든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장학회부터 만들어요. 북청군 출신이 피란 와서 만든 장학회만 스무 개가 넘어요. 그런데 이 지역은 어떻게 된 게 객지 사람이 와서 이렇게 판을 치는데, 왜 이 지역 사람들이 자기 지역을 위한 행위를 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객지 사람들이 이러면 여기 사람들은 향토애 때문에라도 마을마다, 면 단위마다 장학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러지 않죠. 난 그걸 이상하다고 봐요."

단단히 작심하고 하는 이야기 같았다. 봉림재단 사무국을 통해 지난 10년간 지원 금액을 알아봤다. 18억 3500만 원이었다. 하반기에 지원될 금액까지 합치면 20억 원에 가까운 돈이다.

◇노키아, 다시 완만하게 올라갈 것 = 그는 2000년 후두암 수술을 받았다. 이젠 완치 판정을 받았지만, 그 때 수술로 인해 발음이 잘 되지 않는데다 오랜 시간 말을 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의 열정은 현직에 있을 때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1941년생이니까 올해 일흔둘이시죠? 여전히 아주 열정적으로 사시는 것 같네요.

"재작년부터 내가 말한 것에 대해 책임 안 져요.(웃음) 약속을 해놓고 저녁에 돌아오면 후회해요. 힘도 없으면서, 내일 아침에 죽어 있을지도 모르는데. 제가 뭘 할 때 온몸을 다 바쳐서 하거든요. 그렇게 하다간 지금은 죽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어요. 제 책 제목도 〈노키아와 영혼을 바꾸다〉이잖아요. 온 육체와 두뇌를 다 동원해서 일으킨 회사거든요. 8시간 근무가 아니에요. 18년 동안 풀타임이었어요. 그러니까 회사가 되지."

하지만 그가 영혼을 바쳐 일으킨 기업 노키아는 최근 몇 년 사이 대량 감원을 단행하는 등 크게 위축된 상태다.

-그렇게 키워온 회사인데, 가슴 아프시겠지만, 공교롭게도 회장님 퇴임 후에 노키아가 쇠락하고 있잖아요.

"사람에게도 유아기, 장년기, 노년기가 있죠. 나라도 초기, 중기, 말기가 있고, 민족도 흥망성쇠가 있잖아요. 기업도 마찬가지예요. 물론 예외도 있긴 있어요. 노키아로 따지면 역사가 약 150년 내지 200년 돼요. 그동안 굴곡이 있었어요. 2차 세계대전 때도 그랬고, 그리고 제가 들어올 때가 노키아로선 가장 나쁠 때였어요. 경영 결과가 나빠서 회장이 연초에 자살을 했어요. 출근해서…. 도저히 안 되니까?"

-대표이사로 취임하던 1986년 당시가 그랬다는 건가요?

"제가 와서 4~5년 뒤였으니, 아마 1990년 전후였죠. 당시 노키아의 주종은 전화기가 아니었고, 전선(와이어)과 텔레비전 모니터 이런 거였는데, 경영이 나빠져서 90년이 되었을 때 자살했고…. 제가 사장으로 있던 마산만 괜찮았어요. 세계 시장에서 전화기가 1%도 안 될 때 제가 왔거든요. 노키아가 다른 건 다 안 됐는데 마산에서 이것만 잘 되니까 다시 올라간 거예요. 그러니까 전화기가 노키아를 살린 충신이죠. 그 중심에 한국의 노키아가 있었던 거죠. 그렇게 하여 20년 동안 잘 했거든요. 이제 한 번 내려와야죠. 지금 내려가는 중이에요. 너무 급히 올라갔기 때문에 내려올 때도 급히 내려오게 되는 거죠. 그런데, 제 육감으로 봐서는 아마 문은 안 닫을 거예요. 다시 올라갈 거예요. 그러나 예전에 제가 있을 때처럼 그렇게 급히 올라가진 않아요. 이제는 완만하게…."

※이재욱 명예회장 인터뷰 전문(200자 90매)은 월간 〈피플파워〉 7월호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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