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할 건 인정하고 시작하자. 기자도 라면을 먹는다. 요리하기 귀찮을 때, 술 먹고 늦은 밤 또는 다음날 '해장용'(사실 가장 먹을 만한 순간이다)으로 종종 찾는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맛있다며 적극 권하거나 좋은 음식이라고 떠들고 다니지는 않는다. 나트륨·화학조미료 덩어리라 몸에 좋을 리도 없지만 맛도 다들 그렇지 않은가? 왠지 당겨 야심차게 끓였으나 '이걸 왜 먹지?' 곧 후회하게 되는 그런 음식.

TV 예능 프로그램들이 최근 경쟁적으로 라면을 띄우고 있다. 짜파구리(MBC 일밤-아빠! 어디가?), 골빔면(KBS2 해피투게더), 짜계밥(KBS2 해피선데이-1박2일) 등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언론들도 진보·보수 가릴 것 없이 이를 확대재생산하면서 인터넷 클릭 수 올리기에 열중한다. 파급력은 예의 엄청나다. 짜파구리(짜파게티+너구리)가 첫 등장한 지난 2~3월 제조사인 농심 측은 월매출 역대 최고치를 달성했다고 밝혔다.

농심의 '짜파구리' 신문 광고. 짜파구리를 띄운 윤후(가운데 큰 사진) 등 MBC <일밤-아빠! 어디가?> 출연자들이 모델로 발탁됐다.

물론 예능에서 라면 먹을 수 있다. 하지만 '무릉도원'이니 '명품요리'니 허황된 자막을 덧붙이거나 출연자들이 "미친 맛" 운운하는 건 아무리 봐도 과하다. 프로그램 특성상 '순수'와 '자연'의 이름으로 포장될 수 있어 더 그렇다. 시민들 건강에 미칠 악영향만 문제가 아니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이른바 '갑질'의 최선봉이자 좋은 먹거리 세상의 주적인 식품 대기업에 부여하는 무한한 면죄부다.

식품 대기업들의 먹거리 생태계 교란은 심각한 수준이다. 소규모 분식점 등 영세 자영업자들은 이제 짜파구리까지 메뉴판에 올려놓고 판다. 무엇이든 잘 팔리면 그만이니 가난한 음식점주에겐 오히려 도움이 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럼 모든 재료를 하나하나 직접 구입해 정직하게 요리하고 장사하는 음식점들은 어찌할 것인가. 또 이들에게 원재료와 양념 등을 팔아 소소하게 먹고 사는 작지만 역시 정직한 식품 제조업자나 시장 상인, 농민 등은 어찌할 것인가. 짜파구리에 '눈물 흘릴' 정직한 짜장면이 얼마나 많을 것이며 골빔면(골뱅이+비빔면)이 '밀어낼' 맛 좋은 비빔국수·냉면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음식점들은 이제 괜히 공과 시간을 들여 장을 보고 요리할 이유가 없다. 대기업 제품을 사다 쉽게 쉽게 장사하면 되는데 생고생을 해서 뭐하나. 라면뿐만이 아니다. 이미 된장·고추장·간장 등 양념류는 대기업 제품을 쓰지 않는 식당이 드물고, '어머니의 손맛'은 공장산 화학조미료가 대체한 지 오래다. 식당은 물론이고 가정의 냉장고는 대기업이 만든 각종 반조리·가공식품이 판을 친다. 그렇게 우리 삶은 재벌의 지배 아래 더더욱 종속되어 간다. 보다 나은 먹거리 세상을 향한 다양한 고민과 시도는 '짜파구리 한방에' 하루아침에 쓸모없는 바보짓이 되고 만다.

'착한 식당' '착한 소비' 같은 말이 유행이다. 기준이 모호하긴 하지만 먹거리에 대한 건강한 관심의 반영이니 나쁘지 않은 현상이다. 문제는 실천이다. 이를테면 라면을 팔아 먹고 사는 영세 분식점은 그럼 '나쁜 식당'으로 낙인찍어야 하는지, 이런 집을 가면 '나쁜 소비'로 비판해야 하는지 고민스러운 지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공공의 전파를 사용하는 거대 방송사들은 다르다. 지켜야 할 최소한의 사회적·윤리적 책임이란 게 있다. 아무리 기업광고로 먹고 산다지만 이렇게까지 발가벗고 대기업 저질 식품을 띄워줘서야 되겠는가. 우리 아이가 허구한 날 짜파구리만 찾는 세상,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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