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2년이 지났나 싶다. 집 주인이 전세를 월세로 받고 싶다며 계약을 연장할 것인지 묻는 전화에 잠시 망설이다 다른 집을 구해 보겠노라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곳 저곳 부동산에 전화를 하고 너무도 익숙하게 '벼룩신문'의 부동산 정보란을 뒤적이고 있노라니 어린 시절 이사 풍경이 떠올랐다.

이사를 참 많이도 다녔다. 유년 시절 기억만 해도 족히 대여섯 번은 되는 것 같으니 말이다. 이삿짐을 실은 트럭이 골목 입구에 짐을 내려 놓으면, 부피가 크고 무거운 짐을 손수레에 싣고 부모님이 앞장을 서면, 나머지 자질구레한 살림살이는 네 자매가 직접 들고서 꼬불꼬불한 골목을 졸졸 따라가며 나르기를 몇 번씩 반복해야 했다.

자주 이사를 했음에도 크게 환경이 달라졌다고 느낀 적이 없는 걸 보면, 옮겨간 집이 대부분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비슷한 모양이어서인지도 모르겠다. 힘들게 이고 지고 나르던 이사가 끝나면 어머니는 며칠씩 꼭 앓아 눕곤 했는데, 가난한 집의 이사는 그만큼 몹시도 고되었다.

결혼한 뒤에도 난 몇 번의 이사를 했다. 지난날에 비하면 지금의 이사는 일도 아니다. 이사전문업체에 전화만 하면 반나절 만에 예전에 살았던 모양 그대로 짐을 옮겨다 주고 심지어 청소까지 다 해주니 말이다.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는 어머니는 딸들이 이사를 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세상 참 편하다, 좋아졌다'는 감탄을 하신다. 지긋지긋하게 짐을 옮겨대야 했던 젊은 시절의 고단함이 떠오르는 모양이다. 확실히 육체적 고단함은 그 시절에 비할 바가 못 된다. 하지만 마음은 훨씬 더 고달프기만 하다. 어머니가 그렇게 부러워하며 바라보던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공무원이 된 나는 어머니 말에 의하면 '먹고 사는 것 걱정이야 없겠다'지만, 그야말로 딱 먹고 살기만 할 뿐이다. 집 주인이 전세금이라도 올려 달라고 하면 그야말로 난감해진다.

요즘은 반전세, 월세가 유행이라도 되는 양 하나같이 월세를 달라고 하니 조건에 맞지 않으면 이사를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 주변의 한 선생님은 홧김에 집을 사 버렸단다. 전세금이나 집값이나 거기서 거기더라며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나니 이사 안 다녀도 되어서 후련하단다. 그런데 그 집을 다시 팔 때까지는 집이 아니라 빚더미 위에 산다고 허허거렸다.

그나마 공무원들은 대출이라도 수월하게 받으니 빚더미 위에서라도 살 수 있지만, 대다수 서민은 천정부지로 치솟는 전세금 때문에 삶이 고단하기만 하다.

뭐 그리 대궐 같은 집을 꿈꾸는 것도 아닌데, 최소한의 보금자리를 찾는 그들에게 현실은 참 잔인한 것만 같다.

   

손수레를 끌고 밀며 서로 수고했다며 담배 한 대 태우시던 아버지 곁에서 부채질을 해 주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른다. 다 같이 못 살던 시절, 그래도 내 유년 시절의 이사 풍경은 지금처럼 을씨년스럽지는 않았다.

/이정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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