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42) 통영별로 8일차

오늘은 성환을 거쳐 천안으로 향하는 길을 걷습니다. 그 사이의 노정을 여암의 <도로고>에는 성환역-수헐원점-직산-병장생우-비토리-천안으로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여지도서> 직산현 도로에는 성환로(成歡路)라 부르며, '40리인데, 소사(素沙)에서 오는 대로이며 천안으로 가는 대로이다'라 했으니 오늘 우리가 걸을 거리입니다.

◇청일전쟁의 격전지 성환역(成歡驛)

지난 여정을 마감하였던 광연통화원(廣緣通化院)에서 1번 국도를 따라 2km 남짓 걸으면 성환도(成歡道)의 본역이 있던 천안시 성환읍 성환리 갯방죽삼거리에 듭니다. 갯방죽은 이즈음에 있던 한부개제(韓夫介堤)란 못에서 비롯한 이름이며, 역은 못의 바로 위쪽에 있었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성환역은 고을 북쪽 8리에 있다. 찰방(察訪)하는 본도의 속역이 11이다'고 전합니다. 또한 같은 책 누정에는 성환역 서쪽에 역에 딸린 척수루(滌愁樓)가 있다고 했습니다. <여지도서>에는 <승람>과 달리 성환역의 위치를 직산 관아의 서쪽이라 하였으나, 실제로는 직산현의 북서쪽에 있습니다. <해동지도>와 <조선후기지방도>를 살펴도 그렇게 표시하고 있습니다. 성환도의 관할 범위는 성환-천안-공주-여산으로 이어지는 역로와 공주 연기 예산 천안 목천을 잇는데, 우리의 여정은 앞의 길을 따릅니다.

이곳은 성환도의 본역이 자리한 교통의 요충이기도 하지만, 청일전쟁 당시 청군이 일본군에게 크게 패한 곳입니다. 조선의 역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직전인 1894년 6월 25일 밤에 일본군의 야습으로 시작된 전투는 밤을 새워 계속되었는데 이때 청군은 큰 피해를 입고 공주를 거쳐 청주로 퇴각하였습니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당시의 전황을 다음과 같이 전합니다.

"청나라 제독 섭지초(葉志超) 등이 성환역에서 왜군과 싸워 크게 패했다. …… 섭지초는 해군이 이미 침몰했고, 대도의창(大島義昌)의 군대가 이미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25일에 부하 2000여 명과 맹세하고 성환으로 진을 옮겼다. 아산에서 하루 떨어진 거리다. 이미 날이 저물어 솥을 걸고 밥을 짓는데, 습격을 생각하지 못해 척후병을 세우지 않았다. 대도의창은 소사에서부터 재갈을 물리고 솔숲을 지나 성환역 동쪽에 이르렀다. 높은 곳에 올라 줄지어 엎드리고 일제히 포문을 여니, 청나라 군사들은 식사도 다하지 못하고 졸지에 일어나 대항했다. 날이 어두워 서로 분간하지도 못했는데, 오직 시끄러운 폭음 소리와 죽이라는 함성만 들렸다.

날이 밝았을 때 왜군이 죽인 자는 1700여 명이었고, 청나라가 죽이거나 부상을 입힌 자는 300여 명이었다. 섭지초는 중과부적이라 판단하고 남쪽으로 달아났다. 왜군은 수십리를 쫓아가다가 그만두었다. 성환역은 삼남의 큰길에 있는 주막거리로 100여 집이 모두 짓밟혔고, 노약자들이 서로 뒤얽혀 죽었다."

성환에 들다. /최헌섭

◇순대가 유명한 성환

성환역을 지난 길은 중리삼거리에서 서쪽으로 성환읍내로 듭니다. 예전에는 성환 하면 개구리참외(성환 참외)를 떠올렸는데 막상 성환장(1·6일장)에서는 순대가 더 유명합니다. 이런 곳을 그냥 지나칠 리 없습니다. 장터에 들어서니 곳곳에 엄니순대 원조집임을 자처하는 음식점이 여럿 성업 중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가장 북적이는 곳을 찾아 자리를 잡고 순대 한 접시와 막걸리를 시킵니다. 미감이 둔한 저로서는 딱히 뭐가 더 나은지는 잘 모르겠지만, 착한 가격에 걸쭉한 육수는 그야말로 일품입니다.

순대는 <규합총서>(1809년) <시의전서>(19세기 말엽) 등의 요리책에도 실린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이래로 즐겨 먹던 음식입니다만, 이곳에서 순댓국을 끓여대기 시작한 때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찾은 집은 3대가 함께 이 일을 가업으로 삼고 있고, 다른 집들도 그 이상의 이력을 제시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리 오래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성환 장터에서 순대와 막걸리로 엔진 출력을 끌어올린 나그네들은 수헐원(愁歇院)을 향해 길을 서둡니다.

◇수헐원

성환읍에서 수헐리 시름새에 있던 수헐원까지는 그리 먼 길이 아닙니다. 이곳이 교통의 요충임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린 고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 책 산천 성거산(聖居山)(579m)에는 '고려 태조가 일찍이 고을 서쪽 수헐원에 거둥했다가 동쪽을 바라보니, 산 위에 오색 구름이 있는지라, 이는 신(神)이 있는 것이라 하여 제사지내고, 성거산이라 일컬었다. 우리 태조와 세종이 온천에 갈 적에 역시 여기에 제사지냈다'고 했습니다. 세종이 이곳 수헐원에 든 때는 재위 23년이던 1441년 3월 19일의 일인데, 인마가 주리고 고단한 것을 염려하여 이곳에 유숙하면서 진무(鎭撫) 2인에게 술과 밥을 싣고 연도로 가서 구제하게 했다는 기록이 <세종실록>에 전합니다.

수헐원을 달리 실음소(悉音所)라고도 하는데 시름새에 대한 음차표기로 보입니다. 원집의 이름인 수헐(愁歇)은 앞서 지나온 성환역의 누정 이름 척수(滌愁)와 뜻이 닿아 있습니다. 앞의 것은 근심을 벗는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근심을 씻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름에 담긴 뜻처럼 적어도 길을 걷는 동안만이라도 세속의 시름을 떨칠 수 있으니 이리 헤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나누며 더디게 수헐원 옛터를 지납니다.

이곳에 원집을 둔 것은 남쪽으로 이르는 통영별로와 동쪽의 직산현이 갈리는 삼거리이기 때문이라 여겨집니다. 그래서 <도로고>와 <대동지지>에는 이곳에서 행인은 모두 남쪽의 병장승우로 이르는데 오직 사행(使行)만 직산을 거쳐 간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이곳에서만큼은 서두르고 싶지 않아서 큰길에서 벗어나 있는 직산 고을의 관아와 향교를 둘러보기 위해 시름새 삼거리에서 동쪽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마침 그날 동행한 길벗이 고건축을 연구하는 이여서 겸사한 것이지요. 직산향교의 건축물은 평면 구성 등이 변형되었고, 대성전의 주춧돌은 가까운 사찰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시대 숭유억불의 한 단면이 드러나 있는 셈입니다.

   

◇쌍 장승이 있던 모퉁이길, 병장승우(幷長承隅)

직산 고을을 들러보고 10리를 에돌아나와 다시 통영별로에 서니 지금의 삼은리 삼거리마을에 듭니다. 바로 장승이 나란히 있던 병장승우인데, 남북으로 열린 통영별로가 직산현 가는 길과 갈라지기 때문에 이곳에 장승을 세워 이정을 밝힌 것이라 여겨집니다. 대부분의 지지에는 장승이 나란히 있는 모퉁이길이라 병장승우라 했지만, <여지도서>에 실린 천안 지도에는 북동쪽 직산과의 경계에 있는 길가에 쌍장생(雙長 )이라 적고 그 길을 대로라 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서도 옛길의 자취는 찾을 수 없고, 새로운 길의 경관을 만들어가는 패션아웃렛이 성업 중입니다.

◇비토리(飛兎里)

삼거리마을에서 비토리로 향하는 옛길은 1번 국도의 서쪽으로 열려 있었지만 지금은 경작지와 사유지가 차지하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찻길을 따라 걷습니다. 이 길을 따라 공주대학교 천안공과대학 동쪽으로 열린 낮은 고개를 넘으면 비토리(지금 부대동)에 듭니다. 옛 이름은 성황당고개인데, 예서부터가 옛 천안현(天安縣)입니다. 1940년대만 하더라도 커다란 정자나무와 서낭당이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지금은 자취조차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 고개에서 동쪽으로 바라다보이는 작은 산을 달고산 또는 달북재라 부르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왕자산 자락에 있다고 한 고정(鼓庭)에서 비롯하였습니다. 후삼국 통일전쟁 당시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과 양검을 치기 위해 이곳에 북을 달아 놓고 군사를 조련했다고 하여 달북재라 하며, 달리 달고봉(達鼓峰) 현고산(懸鼓山)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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