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전]사실과 추상을 오가며 삶을 어루만지다

김보현 (97·영어이름 포 킴) 화백이 경남도립미술관에서 8월 21일까지 전시를 연다. 과거 서울과 광주 등지에서 전시회를 연 적은 있지만 고향인 경남에서 전시회를 연 것은 처음. 이번 전시에는 그의 작품 83점과 함께 두 번째 부인인 실비아 올드(Sylvia Wald·1915~2011)의 작품 29점도 함께 공개됐다.

지난 13일 경남도립미술관은 전시와 연계해 다목적홀에서 '김보현의 삶과 예술'이라는 주제로 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는 김승호 동아대학교 교수와 오명란 신세계갤러리 수석 큐레이터의 발표에 이어 황무현 마산대학교 교수와 이영준 김해문화의전당 전시교육팀장의 질의 및 토론으로 진행됐다. 이와 함께 2007년 덕수궁미술관의 기획전시 과정에서 진행된 '작가녹취'를 바탕으로 김보현 화백의 작품 세계를 알아본다.

▲ 김보현 작 '백합'(1955년 작, 조선대 소장)

◇사실에서 추상으로 변하다 = 한국에서 김보현 화백은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다. 1955년 일리노이대학 교환교수로 미국으로 건너가면서 '추상미술'에 눈을 떴다. 김보현 화백의 녹취록에서 그는 "당시 대학원생은 스튜디오를 주었는데, 거기서 볼 수 있던 학생들 작품은 다 추상을 했어요. 일리노이에 있을 때 나의 최후 작품은 구상으로 그렸어요"라고 말했다. 특히 추상표현주의 운동의 중심이었던 뉴욕에서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1904~1997)과 같은 화가에게 영감을 받으면서 그의 작업도 추상적으로 변했다.

김 화백이 1961년에 그린 '무제'를 보면 서예적인 기교와 운율감이 강하다. 또한 1964년 작 '추상 D'와 1965년 작 '무제 8945' 등을 보면 자유롭고 활발한, 새로움을 추구하고자 한 노력이 엿보인다.

'무제'(1961년 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명상을 하듯 정물화를 그리다 = 하지만 1965년 유럽 파리 여행을 갔다 오고 1967년 한국인 부인과 이혼을 하는 등 여러 가지 영향으로 추상미술에 싫증이 나기 시작했다. 녹취록에서 그는 "추상을 그렸잖아요? 그런데 그때 이제 더 하고 싶은 생각이 안 들었어요. (중략) 그래서 학생이 된 기분으로 드로잉을 시작했어요. 사실적으로 학생같이 대상을 관찰하기 시작했죠"라고 밝혔다. 그리고 그는 약 7년 동안 채소, 생선, 과일 등 가깝게 있는 것을 선택해 연필과 색연필 등으로 그렸다. 그의 작업시간은 대단했다. 하루에 보통 10~12시간 동안 이틀에 한 장꼴로 작품을 완성했다.

세미나에서 황무현 교수는 김 화백의 사실적인 드로잉 작품을 언급하면서 "한국에서의 삶이 김보현 본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 같은데 작품에서 이와 관련한 어떠한 흔적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의문을 던지기도 했다.

이에 대해 오명란 큐레이터는 "부인과 이별한 후 한국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졌을 것이다. 그는 참선하듯 사물을 관찰하고 그렸고, 그것을 통해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은 비워져 갔을 것이다"고 답했다.

그때 당시 1970년대 미국에서는 '극사실주의'가 유행이었는데, 그런 영향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다. 예를 들어 서양 정물화와 달리 아무런 배경없이 대상만 최소한으로 그렸다는 점, 한지(韓紙)로 된 책에서 오려낸 종이를 화면에 붙였다는 점 등에서 동양적이다.

'깨어나기 전'(1995년 작)

◇인간과 자연에 빠지다 = 김 화백은 1980년대 이후 인물이나 동물, 화초 등을 대형 캔버스에 그렸다. 그리고 화면구성이 자유롭고 대상을 단순화하면서도 뛰어난 색채감각을 펼쳐보였다. 그런 변화에 대해 김 화백은 "옛날에 나의 인생이 별로 순조롭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그런 고통이라든가 그런 것을 잊어버리고 오히려 환상적인 것을 그리고 싶었어요. 아름답고 고통 없는 것…. 그러니까 그림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는 것과 같은 거죠"라고 설명했다.

1982년 작 '잠 못 드는 밤'과 1994~1995년 작 '날으는 새', 2005년 작 '가족', 2006년 작 '붉은 사자' 등에서도 대형 캔버스에 인간과 동물, 식물 등 모든 생명체가 어우러져 있으며 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화려한 색채가 눈에 띈다. 하지만 평화로우면서도 왠지 모르게 슬퍼 보인다. 이에 대해 김보현 화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근데 아마 그것이 나의 인생인 것 같아요. (중략) 제 인생이 별로 행복하거나 재미있는 인생이 아니었어요. 지금 와서는 비교적 문제없이 사는 것으로 보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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