쏟아지는 찬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송해성 감독의 신작 <고령화가족> 이야기다. 호평의 주요 근거는 '새로운 가족의 상'을 보여주었다는 것. 핏줄이 제각각인 남매와 엄마가 거의 '막장'에 치달을 만큼 티격태격하면서도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결국 하나로 뭉치는 모습에 대한 예찬이다.

영화는 스스로 가족주의에 대한 옹호가 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원작자인 소설가 천명관의 말이 그렇다. "가족주의라는 것이 촌스럽기도 하고 불합리한 점도 많지만 때로는 우리가 이 세계를 살아가고 견디는 데 유용한 방식이구나…."

사실 누가 가족을 구성하는지는 그다지 새롭지도 않고 중요한 것 같지도 않다. 얼굴 한번 본 적 없어도 '국민'이나 '민족'이란 이름으로 한데 묶여 사는 우리들인데. 문제는 천명관 말대로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고 견뎌내느냐일 것이다. 가족의 이름으로 말이다.

<고령화가족>의 한 장면. 엄마(윤여정 분)가 둘째 아들(박해일 분)에게 밥과 고기를 먹이고 있다.

'고령화가족'은 진정 무섭다. 형은 아내와 바람난 남자를 무참히 응징한 동생 대신 감옥에 들어간다. 응징의 강도도 끔찍하고(사과나 반성도 없다) 의리의 수위도 범상치 않다. 여동생과 가족을 모욕한 처남을 벽돌로 내리치거나, 술집에서 다짜고짜 시비를 붙인 사람들과 '가문의 자존심'을 건 패싸움을 벌이기도 한다. 뜨거운 가족애, 단단한 일체감, 그러니까 뭉클한 감동일까? 오히려 남이야 어찌되든 말든 우리만 지키면 된다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섬뜩한 집단주의를 떠올려야 맞지 않을까?

폭력 그 자체가 무섭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백수, 건달, 이혼녀, 사는 모습도 시원찮고 막말에 주먹질이 일상이긴 하지만 사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너무나 착하고 너무나 강하다. 그래서 무섭다. 아들이 깡패 짓을 하든 무위도식을 하든 개의치 않는다. '함께 사는'(!) 조카 팬티를 뒤집어쓰고 자위를 하거나 말거나 엄마는 꼬박꼬박 고기를 사 먹이고 따뜻한 말로 감싸준다. 동생은 위험에 놓인 형 대신 '죽음'을 불사하고 오빠는 여동생 딸을 '목숨'을 걸고 구해오기도 한다. 이게 과연 사실적 가족인지는 둘째 문제다. 영화가 '유용하게' 여기는 가족주의의 힘은 결국 거의 무한대의 헌신과 포용에서 나오고 있다. '새로운 가족의 상'이라고 하지만 견결히 떠받드는 가치와 지향은 정확히 전통적인 가족의 그것 그대로이다.

종종 비교되는 김태용 감독의 <가족의 탄생>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도 그것이다. <가족의 탄생> 역시 '생판 남'을 한 가족으로 묶어내지만 단 한 사람, 끝까지 정신을 못 차리는 형철(엄태웅 분)한테만은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무한 희생이 아닌,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아무런 책임의식도 없는 자에 대한 '솔직한 응대'가 있다. 물론 무분별한 배제는 결단코 위험하다. 언젠가는 다시 가족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면서도 어떤 가능성을 열어두고 우리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결말(가족의 탄생)과 화합과 감동의 예정된 신파 속으로 다짜고짜 우리를 몰아가는 강요되고 닫힌 결말(고령화가족).

감독은 쉽고 편하다. 착한 데다 강인하기까지 한 주인공들을 데리고 못할 게 무엇이랴. 창작의 고통, 순간순간 결단의 괴로움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대신 다 떠안으면 된다. 세상에 둘도 없는 헌신과 희생, 사랑을 펼쳐내야 하니까 말이다. 부디 고령화가족을 만나면 조심 또 조심하시길. 까딱하면 그 사랑이 '벽돌'이 되어 날아올 수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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