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인터뷰] 딸 박은숙이 쓰는 부모님 박희천·조명순 이야기

요즘 아버지가 자주 아프시다. 지병인 당뇨병이 오래되다 보니 갖가지 합병증을 유발하고 급기야는 신장 투석까지 받고 계신다. 부러질지언정 휘지 않는 강인한 성격인 아버지가 연로해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다.

아버지 박희천(75) 씨 병 뒷바라지는 어머니 조명순(72) 씨 몫이다. 힘들어하시는 어머니 모습에 죄송스러운 마음 이를 데가 없다. 언제나 굳센 바위같이 자식들 옆에서 지켜주실 것만 같았는데 내 나이 듦만 알았지, 부모님 연로해지심은 느끼지 못한, 아니 인정하기 싫은 자식의 얄팍한 이기심이리란 생각이 든다.

얼마 전 다시 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일주일 만에 퇴원하신 아버지를 뵈러 친정에 갔다. 텔레비전에서 커다란 소가 무거운 짐을 지고 가는 모습이 나오자 아버지는 "저 소를 보니까 옛날 한국전쟁 때 피란 갔던 생각이 나네"라고 말씀하신다.

-어디로 피란 가셨는데 소를 데리고 가셨어요?

"그때는 집에 차가 있는 것도 아니라서 다들 소·지게 이런데다가 피란 보따리를 지고 갔었지. 다 걸어서 갔는 거라. 할머니·어머니·아버지·형님·동생들 다 걸어서 피란을 갔다. 너희 막냇삼촌은 피란 갔다 와서 낳았는데, 요새는 피란 이야기도 실감 나게 잘하는 거라. 그때 어머니 뱃속에 있었는데, 마치 피란 갔다온 것처럼, 아니 피란 갔다온 사람보다 더 생생하게 잘하더라고, 어찌 그리 잘 아는지 물어보니까 '피란 이야기를 자꾸 들으니 마치 내가 갔다 온 것 같이 느껴지더라'라고 하더라."

-피란처에 얼마나 있었는데요?

"7월에 할아버지 생신 밥 해먹고 피란 갔다가, 추석 지나고 왔어. 움막 같은데 살았는데, 짚을 엮어서 얼기설기 지은 곳에 여러 사람이 뒤엉켜 지냈지. 아이고 정말…. 아버지는 그런 세대를 겪어놓으니 전쟁하면 겁이 나고 무섭지."

-혹시 동네에서 총싸움 같은 건 없었나요?

"왜 없었겠어, 그땐 전부 흰옷을 입었는데 전쟁이 나니 무서워서 군인들이 오면 다들 막 숨어 있었어. 그러다가 미국 군인들한테 걸렸는데 나오라고 해서 나오는데 꾸물거리고 늦게 나오는 사람들이 있으니 성질이 급했는지 벽을 향해 총을 쏘았는데, 유탄이 되어서 다른 사람 다리에 맞았지. 우린 너무너무 무서웠어."

-전쟁터로 보내진 가족들은 없었나요?

"그때 우리 아버지가 40살밖에 안돼서 보급대로 뽑아 가려고 했었지. 그때 우리 아버지가 '나이 많은 노인네를 두고 어데로 가겠냐'고 사정사정하니 봐준 것 같아. 그래서 기차를 타고 김해 한림정으로 갔어. 피란처로 만든 초등학교에서 생활했지. 추석을 거기서 지냈어. 근데 그때 너희 엄마도 김해 있었다고 하더라고. 그러니까 몰라서 그랬지, 같은 피란처에 같이 있었는데 몰랐던 거지."

-혹시 가족 중에 전쟁 때 돌아가신 분은 없으셨나요?

"그때 함안 군북에 살던 막내 고모가 우리 집으로 왔어. 피란을 같이 갔으면 되는데 다른 데로 가서 고모·고모부, 그리고 그 딸까지 모두 폭격에 맞아 돌아가셨어. 같이 행동했으면 되는데…"

-만약 전쟁이 일어나고 가족이 생이별하게 된다는 건 생각만으로도 무섭네요. 그런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전쟁 났을 당시에는 잘 몰랐던 거였네요?

"전쟁 당시만 해도 우리는 열 몇 살 좀 넘었던 때라서 서로 몰랐지. 근데 너희 엄마도 함안이고, 나도 함안 사람이라서 어쩌다가 같이 피란을 갔던 거 같아, 나중에 결혼해서 살다가 전쟁 이야기하면서 같이 피란처에 있었던 걸 알았어."

-두 분은 어떻게 결혼하게 되셨어요?

"너희 엄마는 칠 남매 중 큰딸이고, 오빠가 나랑 한동갑이었어. 맏딸이라서 동생들 챙기고 부모님 농사 돕느라 결혼이 늦어졌어. 어찌 인연이 되었는지 중매가 들어왔는데 너희 엄마였어." (옆에 계시던 어머니도 한 말씀 거드시며 본격적으로 대화에 동참하신다.)

-아버지 젊었을 때 완전 미남이시던데요?

"그렇제. 너희 아버지 젊었을 때 정말 잘 생기셨고, 엄청 가정적이었지. 고집이 좀 세서 그렇지, 하하하. 결혼식 할 때 저고리 두루마기도 다 내가 직접 만들었어. 그땐 다 자기 손으로 만들어서 시집갔어."

어릴 적 우리 삼남매와 부모님.

-아버지가 어떻게 가정적이셨어요?

"함안농협에서 근무하다가 진해 군무원으로 오면서 진해에 정착해서 살았어. 너희 아버지가 부대에서 퇴근하면 자전거에 너, 그리고 네 남동생을 태우고 동네 한 바퀴를 도셨지. 네 오빠도 같이 걷게 하다가 태우다가 하면서 말이야. 그걸 하루도 빠짐없이 하셨어. 내가 저녁 준비하는 데 힘들까 봐 그랬던 거지. 그리고 식사 때도 하나씩 무릎에 앉혀서 다 떠먹였어. 너는 어릴 때 머리가 길었는데 항상 아버지가 머리를 땋아 주고 했어."

-어릴 때 나는 어땠어요?

"집 옆에 개울이 있었어. 서너 살 때부터 눈만 뜨면 조그만 대야에 수건 하나 넣어서 개울가로 내려가서 온종일 빨래하다가 오는 거야. 더 웃긴 건 절대 집에 있던 비누는 안 가져가. 수건만 들고 가서 빨래하러 온 아줌마들한테 빌리고, 빨랫방망이도 빌려서 하고 오는 거야. 어찌나 그 모습이 웃기던지. 아줌마들도 조그만 딸내미가 와서 빨래하고 어른들 이야기에 맞장구치는 너를 많이 귀여워 했던 거 같아. 어쨌든 너는 엄마 손 하나 안 가도 될 만큼 야무졌어."

-어려운 살림에도 삼남매 키우느라 많이 힘드셨고, 이젠 아버지 아프셔서 엄마가 더 힘드시죠?

"그러게 말이야. 이제 나이도 들고, 너희 아버지도 성격이 좀 무던해지고, 너희도 다 키워 편할 날만 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몸이 쇠약해지고, 몸이 아프니 짜증도 내시고 반찬 투정도 하시고…. 다시 시집살이하는 거 같다. 힘들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사실 힘이 많이 드네."

-작년에 엄마도 갑상선암 수술하시고 몸이 약해지셨는데 아버지 돌보느라 제대로 쉬시지도 못하고…. 옆에서 많이 못 도와줘서 죄송해요.

"어쩔 수 없지. 그래도 너희가 가까이 있으면서 자주 집에 오고 챙겨주니 고맙지."

-마지막으로 우리 가족들에게 앞으로 바람이 있다면 한 말씀 해주세요.

"뭐가 더 특별한 게 있겠노. 가정 이뤄 사는 삼남매 평안하게 잘 살고, 손주들 건강하고, 너희 아버지도 지금 정도 건강이라도 유지하는 거지. 그리고 가끔 가족들이 모여서 밥 한 끼라도 먹으면서 얼굴 보며 사는 거지 뭐."

내리사랑이라 했던가! 당연히 자식 하는 일에도 고마워하시는 부모님을 보니 가족이 옆에서 힘이 되는 것만으로도 부모님에게는 큰 위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족인터뷰를 계기로 부모님께서 살아오신 날들을 단편이나마 들으며 두 분 삶 속에서 우리 가족의 과거·현재와 미래를 그려볼 수 있었다.

모든 자식 바람이겠지만 부모님께서 언제나 우리 옆에서 건강하게 계셔주시길 바라본다.

/박은숙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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