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공무원]황선 하동군 사회복지사

50대 아주머니는 평생 집을 떠난 본 적이 없다. 안면 기형으로 일반인보다 3배나 큰 머리는 마음에 깊은 생채기를 남겼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차가운 시선이 두려워 자물쇠로 마음의 문을 꽉 닫아 버렸다. 50여 년을 세상과 단절하며 살았던 그가 갑자기 용기를 내 바깥세상에 첫 발을 디뎠다.

첫 세상 나들이에 가슴이 벅차올라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장애인으로서 혜택도 받게 됐다.

홀로 사는 노인은 화재로 한순간에 모든 걸 잃었다. 보잘것없는 살림에 가진 것이라고는 허름하고 낡은 집 한 채뿐이었는데, 이것마저 화마가 앗아갔다.

황선 하동군 사회복지사.

돌봐줄 사람도 없어 살길이 막막했다. 어느 날 '사랑의 주택'이라는 이름으로 새 보금자리가 생겼다. 노인은 뛸 듯이 기뻤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사회복지사의 배려와 도움 덕분이었다.

안면 기형으로 마음속 깊은 상처를 가진 그를 세상 밖으로 이끌고 독거노인에게 새 보금자리가 생기게끔 해 준 이는 하동군 주민복지실에 근무하는 사회복지사 황선(42) 씨다.

"그런 공무원 없어요. 다른 사회복지사 분들도 열심히 하지만, 자기 일처럼 현장에서 솔선수범하는 공무원은 드물어요. 천사입니다. 천사!"

황선 씨는 군청 직원과 소외계층 사이에서 일명 '날개 없는 천사'로 불렸다.

참한 맏며느리감 같은 인상에 선한 얼굴, 겉모습만 보더라도 천사의 기운(?)이 느껴졌다.

대학 졸업 후 사회복지사로 근무한 지 벌써 20년, 그는 대부분 공무원 생활을 읍면지역에서 하면서 현장 중심의 발로 뛰는 복지 행정을 펼쳤다.

그가 몸과 시간을 아끼지 않으며 해왔던 많은 일 중에 1998년 4월 20일 장애인의 날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가슴 뭉클한 추억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그때만 하더라도 장애는 부끄러움의 대상이었죠. 장애인으로 인정받는 걸 꺼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장애를 가진 주민들을 직접 만나 장애인으로 등록하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설득하며 이끌었다.

장애진단서에 필요한 사진을 직접 촬영해 해당 서류를 일일이 작성했다. 경상대학교 병원 등 장애 진단병원에 협조 공문을 보내고 사전예약도 했다.

장애 진단에 필요한 모든 절차와 서류를 자신이 직접 챙겼다. 그리고 지역 자원봉사자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병원으로 인도했다.

그 덕분에 장애를 가진 20명의 주민이 장애인으로서 혜택을 받게 됐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가사 도우미로부터 지적장애 엄마를 성추행하는 지적장애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된다.

손 놓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그 엄마를 직접 만나보니 전문적인 상담이 필요하다고 느껴 성폭력상담소로 데리고 갔다. 엄마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지적장애 아들과 떨어져 시설에서 생활하는 게 최선이라고 판단했지만 장애인으로 등록되지 않아서 그조차 어려웠다.

그는 장애인으로 등록하려고 지적장애 엄마의 손을 잡고 경상대병원을 세 번이나 찾았다. 장애 진단비 25만 원은 사비를 들여 해결했다.

그 엄마는 지적장애 1급 판정을 받고 시설에 들어가게 됐다. 그는 새로운 삶을 그 엄마 품에 안겼다.

1999년 12월 말 옥종면에 근무할 때 그는 공직 생활에서 가장 뜻 깊은 상을 받게 된다.

1호로 '군민이 뽑은 모범공무원'에 뽑힌 것이다. 그가 수없이 받았던 보건복지부장관상이나 경남도지사상보다도 더 값진 상이었다.

그동안 그를 묵묵히 지켜봤던, 도와줬던 주민과 장애인, 이장, 봉사회, 사회단체의 추천으로 이 상을 받게 되어서다.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하는 복지 사각지대가 많아서 안타깝다"는 그는 지역 주민과 더불어 펼쳐가는 복지를 하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나중에 퇴직하면 사회복지시설에서 못다 한 사랑의 손길을 베풀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간직하고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