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인터뷰] 딸 차혜란이 쓰는 엄마 곽현숙과 이모들 이야기

음력 4월 15일. 외할아버지 기일이다. 20여 년 전 불의의 교통사고로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난 외할아버지를 기억하기 위해 외가가 시끌벅적하다. 외할아버지·외할머니는 내 친정엄마를 맏이로 해서 칠 남매를 두셨다. 그 중 다섯 자매인 중년 이모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딸 차혜란(43)이 엄마 곽현숙(69)과 그 이모들 속마음을 들여다보았다. 인터뷰 내내 혼을 쏙 빼놓은 이모들 수다를 모아 맛나게 버무려 보려 한다.

-오늘이 외할아버지 기일이니까, 먼저 엄마와 이모들이 기억하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어요?

"아버지는 우리가 뭘 하든 칭찬을 먼저 하시는 분이셨지. 하루는 내가 장롱 안에 있던 광목으로 식구들 버선을 지었어. 그러자 엄마는 땅콩 장사하는 데 쓸 천으로 버선 만들었다고 혼을 내는데, 아버지는 옆에서 '어이구! 우리 숙이가 이렇게 컸나? 니가 버선도 다 짓고. 장하다, 우리 딸'이라고 하시던 모습이 생생하다. 항상 칭찬을 참 많이 해 주셨는데…."

"학교 다닐 때 종아리를 맞아 멍든 적이 있었어. 그걸 보고 아버지가 바로 학교로 찾아갔지. 그리고는 '우리 아이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때려서라도 가르치는 것이 맞겠지만, 아무리 그래도 여자아이 종아리를 때려서 되겠느냐. 손바닥 정도 때리고 말았어야지'라고 항의하셨어. 그다음부터 종아리 한 번 안 맞았지. 우리 아버지는 우리한테 생기는 작은 일이라도 소홀히 넘어가는 것이 없었지."

지난 5월 24일 외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 유쾌상쾌한 이모들이 한 자리서 찰칵.

"우리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안경 쓰는 아가씨는 시집갈 때 점수 떨어진다고 모두 안경 쓰는 것을 꺼렸어. 그런데 근시로 고생하는 딸이 안쓰러워 그 비싼 안경을 직접 맞춰서 학교로 갖다 주셨지." (눈시울이 금세 붉어진다. 다섯 자매 모두 제각각 추억에 잠긴다.)

-엄마와 막내 이모가 18살이나 차이 나네요.

"그러니까 우리는 큰언니를 엄마같이 생각하지. 언니 말이라 하면 '네네' 하면서 듣는다." (질문 하나 하면 여기저기서 서로 대답한다고 내 이름을 부른다. 답도 웃음도 끊이질 않는다.)

-그러면 순서대로 대답하는 릴레이 질문을 할게요. 내가 기억하는 내 동생에 관해 얘기해 주세요. 먼저 엄마가 기억하는 내 동생 의숙(첫째 이모)이는?

"어릴 땐 나한테 심통만 부리는 동생이었지. 엄마하고 아버지한테 혼나면 살금살금 뒤에 와서 내 머리를 확 당기고 도망치곤 했지. 아버지한테 예쁨 받는 언니를 시샘한 거지 뭐. 너 기억나나? 맞제?"

-그럼 첫째 이모가 기억하는 내 동생 경숙이(둘째 이모)는?

"기억이 잘 안 난다. 워낙 언니들한테나 동생들한테 잘 맞춰주는 애라서 특별하게 기억나는 게 없네. 남들한테는 강한 사람인데 동생들한테나 언니한테는 다 주는 사람이지."

-둘째 이모가 기억하는 재숙(셋째 이모)이는?

"자기가 생각하기에 합리적이지 않으면 절대 안 움직이는 애지. 옛날에 내가 자취할 때 놀러 가면서 연탄불 좀 봐달라고 했는데 담당이 나라고 안 갈아 놓은 거야. 내가 놀다 와서는 불 피운다고 고생 좀 했지."

-셋째 이모가 기억하는 내 동생 영숙(넷째 이모)이는?

"너무 순박한 애다. 순해서 내가 앞길을 풀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고등학교도 정해주고 했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기억하는 언니에 관해 얘기해 주세요. 넷째 이모가 기억하는 셋째 이모는?

"성격이 너무 대쪽같이 곧아서 때로는 서운하기도 해 '진짜 내 언니 맞나'라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 그만큼 무슨 일이든 확실하고 분명한 사람이지."

-셋째 이모가 기억하는 둘째 이모는?

"친구 같은 언니기도 하지만 항상 마음 쓰이고 안쓰럽고 예쁜 언니지." (둘째 이모는 몇 년 전 항암치료를 받다 지금은 잘 이겨내고 계신다.)

-둘째 이모가 기억하는 첫째 이모는?

"나는 또 나대로 둘째 언니가 왠지 물가에 내놓은 것처럼 염려스럽더라. 이유는 몰라. 그냥 걱정스럽데." (또 '하하' '호호' 서로 쳐다보고 웃기 바쁘다.)

-그럼 첫째 이모가 기억하는 언니는?

"나를 미워했던 것 같다. 결혼하기 전에 부산에서 같이 직업전문학교 다닐 때 주말만 되면 언니가 나만 빼놓고 어딜 가고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까 친구들하고 총각들 만나 태종대 놀러 가면서 나를 따돌리고 갔더라. 그런 거 보면 나를 미워한 거 맞제? 아이고~ 우리 형부! 이거 다 옛날 얘긴 거 알지예. 오늘 온갖 얘기 다 해본다. 하하하!"

-자매가 많다는 것이 좋을 때는 언제죠?

"큰일 있을 때 자매가 많다는 것이 큰 힘이 되지. 어려움을 나눌 수 있고, 힘든 일 있으면 서로 도와주려고 애쓰고 하니까. 나이 들수록 내 형제자매만 한 것이 없더라." (자매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한 달에 한 번씩 놀러 갈 때 막내인 나한테 몸만 오라고 할 때가 제일 좋지. 언니들이 예뻐해 주니까 더 좋고."

"큰언니는 우리한테는 엄마 같은 존재지. 지금 엄마가 살아 계시긴 하지만 원래 형제 많은 집 맏이는 부모 같다. 큰언니 시집갈 때 선 보러 온 총각을 봉창 밖에서 보여주는데 코도 삐뚤어져 보이고 눈도 짝짝이로 보여서 언니더러 시집가지 말라고 했지. 그런데 그 사람이 혜란이 너희 아버지다. 그때는 형부가 생긴다는 생각보다는 우리 언니가 없어진다는 생각이 더 컸지."

-한 달에 한 번씩 놀러 간다는 건 무슨 얘긴가요?

"벌써 2년 정도 됐지. 이제 이모들도 모두 자식들 다 대학 가 시간이 자유로워. 그래서 외숙모까지 끼워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여기저기 좋은데 놀러다니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내 형제·자매들끼리 가는 것이라 서로 마음 닿는 대로 챙겨가면서 재미나게 살지.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다는 게 우리한테는 큰 기쁨이지."

-그럼 앞으로 이모들이 바라는 점은요?

"우리 자매들은 이렇게 서로 정을 나누면서 즐겁게 지내는데, 너희 이종사촌들끼리도 정을 나누며 살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고 가는 것이 우리 몫이라고 얘기들 하지. 너희 세대는 형제가 많지 않으니 서로 의지도 되고 좋을 것 같아서 그렇지."

살아오면서 서운했던 일조차 웃으며 나눌 수 있는 이모들의 멋진 수다에 함께 할 수 있어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엄마와 이모들의 이 화목함이 있어 나도 언니와 서로 그리움 나누며 사는 사이가 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음복(제사를 지내고 난 뒤 나누어 먹는 음식)이 맛있으면 '고인 혼령이 차려진 제삿밥을 맛나게 드시고 가신 표시'라고 이모들이 말한다. 이날 제사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흔히들 말하는 꿀맛에 비할 수가 없었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외손녀가 밉지 않으셨던가 보다. 외할아버지 자전거 뒤에 앉아 느끼던 바람과 아궁이에서 구워주시던 마늘과 은행 맛이 오늘 너무 그리워진다.

/차혜란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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