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스포츠에서 미디어는 또 한명의 주연배우다. 선수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일그러진 표정, 관중들의 환호와 탄식, 쉼 없이 등장하는 리플레이와 슬로 모션, 그리고 각종 경기 정보들… 만일 방송 중계라는 게 없었다면 우리는 매우 건조하고 심심한, 심지어 어떻게 진행되는지조차 잘 알 수 없는 운동 경기를 보고 있어야 할지 모른다.

다만 피해갈 수 없는 질문 한 가지. 우리는 과연 '진실'을 보고 있는 것일까? 상상력의 산물인 영화를 보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뚱맞은 소리냐 되물을지 모르겠다. 생각해보자. 경기장 안에는 수많은 상황이 펼쳐지지만 결국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극히 일부 몇 장면뿐이다. 그 선택은 물론, 해당 방송사나 현장 중계진이 수시로 '결정'한다. 카메라의 시선에 '관점'이 없다고 생각하는 건 그야말로 바보 같은 관점이다. 유럽 축구 중계의 테크니컬 디렉터인 장 클로드 주오드는 "모든 중계는 주관적이다. 경기의 해설자, 심판, 그리고 결과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을 뿐이다"라는 말을 남긴 바 있다.

얼마 전 프로야구 한화의 김응용 감독이 재밌는 말을 했다. 우리에게 익숙한 과거 카리스마 넘치는 '포커페이스'는 온데간데없이 최근 긴장한 모습이 자주 카메라에 잡히자 "예전에는 웃고 떠들거나 하품을 하다가도 카메라가 오면 표정을 바로 바꿀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어디서 찍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다"고 토로한 것이다.

지난 8일 한화와 경기에서 9회초 역전을 허용한 직후 상기된 표정을 짓고 있는 NC 투수 노성호.

카메라를 '의식'하고 있다는 것. 알게 모르게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또는 카메라와 배우들(?)의 협업. 우리는 중계진이, 미디어가 캐릭터화한 김 감독의 특정 이미지만을 지난 수십 년 동안 보고 믿어온 셈이다. 다시 질문. 우리는 과연 진실을 보고 있는 것일까?

보다 심각한 사태는 중계 그 자체가 경기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일 것이다. 감독의 표정은 별 변수가 아닐 수 있지만 선수, 그것도 순간순간 심리 상태가 경기력을 크게 좌우하는 투수라면 어떨까. 지난 8일 한화와 경기에서 9회초 마운드에 오른 NC 노성호의 표정은 매우 상기돼 보였고 예의 그 모든 것은 방송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전파됐다. 결과는 연속 볼넷과 안타에 이은 NC의 역전패.

올해 1군 무대에 갓 데뷔한 새내기 투수 노성호에게 사방에 포진된 카메라는 엄청난 부담 요소였을 것이다. 투수의 표정은 그 자체로 경기력에 대한 신뢰로 이어진다. 불안함과 초조함을 드러내도 문제겠지만, 흔들려도 흔들리지 않는 척하거나 뭔가 화를 내고 풀어야 하는데도 억지로 감정을 누르는 것 역시 정상적인 투구에 방해가 될 수밖에 없다. 미 프로야구 역사상 최고의 투수로 평가받는 그렉 매덕스는 '카메라가 보거나 말거나' 오히려 경기 중 욕설과 분노를 거침없이 쏟아내며 안 좋은 순간을 빨리 잊고, 자신을 다잡으면서 더 좋은 투구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한다.

물론 시청률과 상업 광고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자본에 종속된 스포츠 중계에 엄격한 시선의 윤리를 요구하는 건 무망한 일이다. 하지만 미디어가 만들어낸 각종 '이미지'가 혹 특정 시각을 강요하지는 않는지, 공명정대해야 할 승부를 왜곡할 위험은 없는지 유심히 살펴볼 필요는 있지 않을까. 당연히 캐스터와 해설자의 중계 내용도 포함해서. 끝으로 이 글은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지난 2006년 <씨네21>에 쓴 '월드컵 미장센-스펙터클, 중계의 시네마'를 적극 참고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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