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신체검사를 받았다. 아직도 어린아이 같은데 어느새 자라서 대한민국의 건장한 청년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그 통과의례를 치렀다. 1등급 현역입영 대상 판정을 받고 돌아온 아들이 대견하고 의젓해 보인다. 2년간 군대 생활을 생각하면 망설임이 있을 법도 한데 아무 갈등 없이 내년에는 군대에 가겠노라 한다.

결혼 초 나는 과로로 심하게 아팠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을 만큼 무력감에 시달리며 투병 기간을 거쳤다. 자연히 임신이 늦어질 수밖에 없었다. 건강을 회복한 뒤 아이를 갖고 싶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남들이 다 갖는 아이를 나 혼자 못 갖는 것 같은 열등감에 길 가다가 배부른 임신부들만 보아도 소리 죽여 울곤 했다. 그런 시간에도 나를 버티게 한 것은 언젠가 아이의 자람을 보며 기뻐하고 울기도 할 부모의 이름을 가질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이었다.

난임으로 고통 받던 그때, 우리 집 부엌에서 보면 아파트 놀이터가 바로 지척이었다. 동네 꼬마들이 뒤섞여서 떠드는 소리가 마치 굶주린 사람의 코끝으로 밀려드는 밥 냄새처럼 곤혹스러웠다. 그럴 때면 늘 함께 늦도록 놀고 있는 내 아이를 부르는 모습을 상상하며 머지않아 그 날이 오리라고 생각하곤 했다.

결혼 4년 만에 백일 새벽기도 끝에 임신 진단을 받은 날, 도저히 믿기지 않아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기쁨은 지금도 여전한 설렘으로 마음에 있다. 태반의 위치가 좋지 않아서 어쩔 수 없이 제왕절개를 해야 했는데 마취가 채 깨지도 않은 몽롱한 정신으로 아이의 첫 울음을 듣던 순간엔 감격으로 내가 더 크게 울었다. 내 삶에서 가장 기뻤던 날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그 날을 꼽고 싶다.

처음으로 교회에 가던 날, 첫 이가 돋아나던 날의 경이로움, 엄마라고 처음 불러준 날의 환희, 모든 것이 삶의 갈피에 추억과 기쁨으로 남아 있다. 유난히 유순하고 수줍음이 많던 아들의 어린 시절엔 학교 생활을 잘 해낼지 걱정도 했지만 아이는 공연한 걱정이라듯 제 몫을 잘 해냈다.

아들은 5년 전부터는 가족들과 떨어져서 먼 외국에서 혼자 공부하고 있다. 1년에 한 번 여름방학에만 집에 와서 지내는 아들은 집으로 올 때마다 봄날의 물오른 나무처럼 자라 있다. 세상을 향해 자신의 가지를 쑥쑥 뻗고 있는 아들은 이제 아빠만큼 키가 자랐고 혼자서 넉넉히 세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마음도 자랐다. 어느새 스무 살이 되어서 국가와 민족을 위해 국방의 의무를 감당하는 자리만큼 자란 모습을 보며 나는 대견하고 고맙다.

   

이제 내년이면 아들은 머리를 짧게 자르고 푸른 군복을 입은 채 잔뜩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어색한 거수경례를 하는 이등병이 될 것이다. 그동안 마치 전설처럼 들어왔던 군 생활의 무용담을 이제 내 아들도 똑같이 되풀이할지 자못 기대가 된다. 아이를 갖고 싶어 기도할 때는 그저 태어나 주기만 해도 감사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점점 자라면서 처음의 감사와 감격을 잊은 채 더 많은 것, 더 큰 성취를 욕심낼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어떤 성취도 아이의 탄생과 존재 자체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었다. 부모가 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이 마음을 알게 되었으니 부모가 된 일은 참 잘한 일이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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