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한 의사가 생각하는 삶의 재미란 무엇일까?

2007년 MBC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 <하얀거탑>은 대학병원을 배경으로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한 한 외과의사의 권력의지와 음모, 암투, 로비 등 갈등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의 특성상 어느 정도 과장이 있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병원 내부의 권력투쟁이 과연 그 정도일까 궁금했다.

김계정(1951년생) 박사가 원장으로 있는 삼성창원병원은 대학병원이다. 1981년 마산고려병원으로 개원한 후 1994년 삼성의료원으로 편입되었고, 1997년 성균관의대 교육병원 지정을 거쳐 2010년에는 학교법인 성균관대학교 삼성창원병원으로 재편되면서 정식 대학병원이 된 것. 규모로 봐도 31개 진료과에 720병상, 204명의 의사를 포함해 1300명의 의료인력이 근무하고 있는 경남 중부권 최대 병원이다.

삼성창원병원에도 <하얀거탑>과 같은 그런 권력을 둘러싼 암투가 있을까? 김계정 원장도 그런 치열한 권력투쟁을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것일까?

엘리트 코스만 착실하게 밟아온 의사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살펴 본 그의 프로필은 좀 심심했다. 너무 밋밋해 보일 정도로 착실히 엘리트 코스만 밟아 왔던 것이다. 소위 ‘KS라인’으로 통하는 경기고-서울대를 나왔고, 서울대병원에서 전공의 과정을 거쳐 서울대 의과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강북삼성병원 피부과 과장을 시작으로 기획실장, 진료부원장, 건강의학본부장을 지냈다. 성균관대 의과대학 교수를 겸하면서 2009년 8월 삼성창원병원 원장으로 부임했다.

이런 그의 이력에서 실패나 좌절 같은 인생의 굴곡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가난을 겪어본 사람이 부의 달콤함을 알고, 실패해본 사람이 성공의 기쁨도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게다가 의사라는 직업이 돈은 많이 벌지 몰라도 그다지 재미있거나 행복할 것 같지도 않다. 종합병원 의사들을 보면 아침 일찍 출근해 입원환자 회진-외래 환자 진료-수술-저녁 회진으로 이어지는 빡빡한 일정에다, 퇴근 후에도 응급상황 발생 시 언제든 불려 와야 하는 직업 아니던가?

하긴 그래서 의사들이 병원 내 권력에 더 집착하는 지도 모를 일. 김계정 원장을 삼성창원병원 원장실에서 만났다. 원장실은 본관 건물이 아닌 뒤편 부속건물 2층에 있었다.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김구연 기자

-의사라는 직업이 재미있나요? 저는 재미없을 것 같은데…. 우선 힘들잖아요. 외래 진료하는 것 보면 2~3분에 환자 한 명씩 봐야 하고, 허구한 날 아픈 사람 환부만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 힘들 것 같은데….

“지금 말씀하신 그런 의사들도 있지만, 사실 의사라는 직업세계도 다양합니다. 연배에 따라 다르기도 하고…. 의사 세계 내에서는 좀 성공했다고나 할까요? 그런 분들은 대개 그런 패턴이죠. 의사들이 좀 타이트한 건 사실입니다.”

-성공한 의사들일수록 타이트하다고요?

“네. 예를 한 번 들어봅시다. 성공한 외과의사나 내과의사를 보면 아침에 보통 일찍 오지 않아도 여덟 시까지는 옵니다. 우리 병원 같으면 원장인 저도 여덟 시 전에 오는데요. 저는 평생 집에서 일곱 시 이전에 출발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지방에 오니까 가까운 데다 차가 데려다 주니까 일곱 시 반쯤 나오지만, 서울에 있을 땐 차가 데리러 와도 일곱 시에는 나와야 했죠.”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김구연 기자

-그 시간에 나오면 의사들이 하는 일은?

“출근하면 보통 과(科) 내에서 콘퍼런스라는 걸 합니다. 밑에 있는 레지던트들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도 있지만, 대개 지난 밤 사이 환자들의 상태나 검사한 결과를 디스커션하는 거죠. 그걸 보통 30분에서 한 시간 정도 하게 되죠.”

-그게 끝나면 회진이죠?

“그렇죠. 회진을 돌고, 그 다음에 보통 외래 진료를 하거나 수술을 하거나 그렇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인기 있는 의사들은 이야기하신대로 2~3분에 한 명씩 진료를 해야 하는 그런 패턴도 생길 수 있죠. 오전엔 진료하고, 오후엔 수술 들어가야 하는 그런 임상 선생님들도 많죠. 그렇지만 또 진료과의 성격상 그렇게 많은 환자를 보지 않아도 되는 선생님들도 있죠. 특히 정신과 선생님들은 원래 상담을 많이 하니까 진료를 오래 해야 하죠. 또 지원과들이 있습니다. 영상의학과라든지 검사 파트, 이런 과들은 환자를 직접 보지 않으니까 조금 여유가 있죠. 그리고 환자가 많은 파트라 하더라도 인기가 없거나 상대적으로 젊은 선생님들은 안 그럴 수 있죠.”

-아, 젊은 의사들은 좀 편하다?

“편하다기 보다는…. 젊은 선생님들은 또 위의 선생님들을 수행해야 하니까. 결국은 의료가 다 팀으로 이뤄져서 하거든요? 위에 시니어, 즉 고참 선생님들이 있고, 그 밑에 한 파트 젊은 선생님들이 있고, 또 그 밑에 젊은 전공의들이 있고 해당 간호사들이 있죠. 그래서 젊은 선생님들은 내 환자는 많지 않아도 그 팀원으로서 일을 해야 하니까 역시 바쁘죠. 특히 수련의, 레지던트들은 선생님 나오기 전에 해결해놔야 하는 일들이 많으니까 더 바쁠 수 있죠. 회진을 돌고 나서 선생님의 지시사항도 다 맞춰놔야 하고….”

-시니어 선생님이라는 게 각 진료과의 과장인가요?

“대개 그렇죠. 과장님들.”

드라마 <하얀거탑>, 한국과 일본의 차이

-드라마 <하얀거탑>을 보니 의사들 사이의 위계질서도 군대 못지않게 엄격하던데, 실제로도 그런가요?

“그렇습니다.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도 하고, 자칫 실수라도 하면 되돌릴 수 없으니까. 또 하나의 이유는 의사라는 직업이 도제교육으로 하나하나 배워야 하거든요. 대학에서 책으로, 글로 배운 것이 실제로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 지는 하나하나 다시 배워야 하죠. 어떤 병에 대해 책에서 배운 것이 현실에선 그대로 나타나지 않거든요. 예를 들어 어떤 병에 대한 증상을 책에서 열 가지를 나열해놨지만, 실제로는 1, 3, 9 세 가지밖에 안 나오는 경우도 많죠.”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김구연 기자

-결국은 책에서 얻은 지식보다는 임상 경험이 중요하다는 거로군요.

“책에서 배운 게 필요 없다는 게 아니라 현실에서 선생님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게 살아있는 지식이 되는 거죠. 그래서 도제교육이 될 수밖에 없고, 그러다보니 위계질서가 엄할 수밖에 없는 거죠. 장인들, 예를 들어 도공의 경우에도 허드렛일부터 시작해서 배우듯이….”

-기자들도 좀 그런 측면이 있죠.

“하하하. 그런 얘기도 많이 들었어요.”

-인명을 다루는 직업이고, 도제교육 시스템이어서 엄격하다는 건 이해가 되지만, 그로 인한 권력관계, 즉 권력을 갖기 위한 암투도 아주 심한 것처럼 드라마에서 다루고 있던데, 그런 것도 사실인가요?

“그 부분은 <하얀거탑>이 상당한 부분을 과장한 거예요. 원래 <하얀거탑>은 일본의 연재소설이 원작이에요. 일본 의사신문에 연재되었고, 그게 우리나라 의사신문에도 오래 전에 연재소설로 나왔던 겁니다. 그랬던 것이 나중에 드라마로 만들어져 인기를 끌었는데, 일본은 우리와 시스템이 좀 달라요. 특히 종합병원의 시스템이 그래요. 그리고 소설에서는 그렇게까지 리얼하지 않았는데, 드라마에서 좀 더 극단적으로 구성했죠. 거기 배경이 대학병원인데, 우리나라는 교수가 있고 부교수가 있고 조교수도 있고 임상교수도 있고, 레지던트가 있고….

그래서 한 과에 교수가 세 분, 부교수가 한 분, 조교수가 두 분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데, 일본은 안 그렇습니다. 일본은 거의 모든 대학이 한 과에 교수는 단 한 명입니다. 부교수라는 직책은 없고, 조교수가 한 명 혹은 두 명, 그 밑에는 모두 조수입니다. (웃으며) 조수라고 그래요. 우리 같으면 전임강사에 해당되는 건데, 그들 중에 단 한 명이 조교수가 되고, 그 조교수가 나중 덩치가 커지면 어딘가에 교수로 가는 거죠. 그러니까 조교수를 엄청나게 길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드라마에도 나오지만 주임교수를 뽑는 경쟁이 치열하죠. 일본에서 주임교수는 곧 교수입니다. 그게 한 명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는 여러 교수 중에 한 분이 주임교수를 하죠. 교수-부교수-조교수는 직급이고, 주임교수라는 건 직책에 해당하는데, 우리나라는 주임교수라는 게 그렇게 파워가 없어요. 실제 우리나라엔 자기보다 선배교수를 모시는 주임교수가 많습니다. 오히려 시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격이죠.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김구연 기자

그러나 일본에선 교수=주임교수니까 권한이 크고, 그래서 그런 난리가 나는 거죠. 일본은 큰 병원에서 한 과의 주임교수를 뽑을 때 전체 교수회의에서 투표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그냥 발령을 내죠. 임기도 있어서 또 다른 사람으로 바뀌기도 하고…. 그런데 일본에선 한 번 주임교수가 되면 거의 종신직으로 가죠. 이게 큰 차이가 나요. 그래서 그만큼 경쟁이 치열한 거고, 그걸 <하얀거탑>에서 그렇게 그린 거죠.”

-그런 차이가 있군요. 그래서 로비도 하고, 상대를 음해하기도 하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임교수가 그렇게 큰 권력을 쥔 자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죠. 그래서 의사 사회에서 주임교수가 되었다고 하면 그냥 ‘축하한다’고는 하지만, ‘우와! 너 드디어 성공했구나’ 이런 정도는 아니에요. 오히려 ‘고생 좀 하겠네’ 하는 정도죠.(크게 웃음)”

-한국사회에서 의사로 성공하려면 로비보다는 결국 실력이 중요한 건가요?

“역시 실력이 중요하죠. 일반적으로 의사라 하면 환자를 진료하는 임상의사인데, 환자가 찾지 않는 의사라면 그건 의사로서 존재 의미가 없지 않습니까? 환자를 잘 보고, 환자들이 나를 선택해야 되는 거지.”

-그렇게 해서 의사로서 실력을 인정받으면 나중에 관리직으로 승진도 할 수 있고 그런 건가요?

“그것과는 다릅니다. 훌륭한 의사가 곧 훌륭한 원장은 아니거든요.”

-그런데 원장님은 피부과 분야의 권위 있는 의사이자, 관리직으로서 원장까지 하고 있잖습니까.

“글쎄요. 우리나라에서 병원이라는 게 이렇게 커진 게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거든요. 외국도 사실은 마찬가지죠. 우리나라 병원이 이렇게 확 커진 것은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된 이후에 의료시장이 왕창 커져버렸습니다. 그 이전에는 보험도 없고 하니까 병원 관리나 행정이라는 데 대해서도 별로 신경 쓰지 않았죠. 그러나 전 국민 의료보험 시행 이후엔 대충대충 해도 되는 상황이 아니라 아주 타이트하게 관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온 거죠. 지금 의료보험 수가가 원가의 약 85%정도밖에 보장이 안 되는데, 언뜻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지 않아요? 원가의 100%를 보장해줘야 하는 게 상식에 맞잖아요. 그만큼 의료 관리가 어려워졌고, 그것을 잘 하는 사람을 뽑아야 하는데, 과거 의료를 아주 깊숙이 이해하지 못하는 행정직이 이걸 다 할 순 없었죠. 그래서 70년대쯤부터 병원 관리를 의사에게 시켜야겠다는 움직임이 일어났던 겁니다. 그래서 관리를 잘할 만한 의사를 뽑아서 훈련을 시키고 관리하도록 했죠. 물론 그 전에도 의사가 원장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그 땐 상대적으로 쉬웠죠. 그런데 병원 규모가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의료도 알아야 하고, 회계나 인사 관리도 알아야 하는…, 그만큼 타이트하고 어려워졌죠.”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김구연 기자

-과거엔 원장을 맡은 의사들이 상징적인 역할이었다면, 지금은 모든 분야를 장악해야 하는 걸로 역할이 커졌다는 거네요?

“그렇죠. 과거에는 덕망 있는 훌륭한 임상 의사를 원장으로 모셔서 원장을 맡아도 임상 진료를 계속하는 시스템이었다면, 지금은 관리직을 맡으면 임상에서는 거의 손을 떼고 경영관리에 전념해야 하는 시스템으로 바뀐 거죠.”

의사라는 직업은 과연 행복할까

-그런데 원장님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은 진료를 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허허. 저도 원장 임기 마치면 의사해야지 뭐. 나 같은 피부과 의사는 그나마 좀 나은데, 외과 의사의 경우 원장을 맡아 진료를 중단하면 수술에서 멀어지고, 그러면 임기 마친 후 참 곤란해지죠.”

-원장까지 하신 분이 임기 마치고 다시 평의사로 돌아가는 경우가 있습니까?

“많이 하시죠.”

-자신이 원장으로 재직하던 병원에서 다시 의사로 돌아가는 경우도?

“거의 대부분 그렇죠. 대학에서 학장 하시던 분이 임기 마치고 교수하는 경우나 마찬가지요.”

-그렇군요. 저도 사실 편집국장 임기 마치고 평기자로 돌아가 열심히 취재활동하고 싶은데….(웃음)

“데스크 이런 거 맡지 않고 나이 들어서도 활동하는 유명한 기자들도 있잖아요?”

-외국에는 그런 기자들이 많죠.

“그렇게 보면 의사 사회가 낫네요. 다행하게도 선배 의사들이 다들 직책 마치고 의사로 돌아가는 전통이 있어서.”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삼성병원 제공

-그러면 원장님도 다시 의사로 돌아가실 계획인가요?

“저는 원장 임기(2015년 7월) 마치면 거의 정년이 다 됩니다.”

-정년이?

“65세입니다. 대학병원이니까 교수 정년과 같죠. 개인병원이야 정년이 없지만, 봉직 의사들의 경우 대부분의 병원이 65세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개 자기가 있던 병원에서 정년을 마치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죠.”

-원장님은 알레르기 피부과의 권위자로 알려져 있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인가요?

“일단 의사가 되면 해당 과의 전문의가 되어야 하고, 큰 규모의 병원에서는 다시 세부 전공이라는 걸 하게 됩니다. 굳이 안 해도 되지만, 교수가 되려면 해당 분야의 업적이 있어야 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알레르기 분야를 하게 됐죠. 접촉 피부염과 아토피가 거기에 해당하죠.”

-좀 실례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세간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의사라는 직업은 부인만 행복한 직업이다.’ 즉, 돈을 많이 벌어다주니 부인은 행복하지만, 정작 의사 본인은 힘들고 스트레스도 많은 직업이라는 말이죠. 이런 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허허. 그 비슷한 말도 많아요. 우리나라뿐 아닙니다. 외국에도 이런 말이 많아요. 그런데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은 봉직 의사에겐 해당하지 않아요. 물론 다른 직장인에 비해선 좀 많을 수 있겠지만 일반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많진 않습니다. 개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번 의사들도 있겠지만, 개업했다고 해서 다 성공한 것도 아니고….”

-원장님도 서울대 의대에 계셨지만, 의사들 월급이 서울대 의대보다 오히려 중소규모 시골로 갈수록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네. 시장원리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골에서 큰 병원을 만들어놓고 의사들을 못 모셔 오니까 월급 많이 줄게 와라 하는 거죠. 그래서 그렇습니다.”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삼성병원 제공

-어떤 직업이든지 자신이 하는 일이 재미있고 즐거워야 하고, 그래야 그 일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볼 때는 의사라는 직업이 아픈 사람의 환부를 치료해야 하는 일인데, 그렇게 재미있거나 즐거운 일은 아니지 않나요?

“저는 도공이 도자기를 빚는 일이 하나도 재미없을 것 같거든요? 맨 날 똑같은 일만 하는 것 같고, 가마에 불 때놓고 잠도 안자고 하는데, 저는 그렇게 못할 것 같거든요? 그런 거죠 뭐. 물론 의사라는 직업에 재미를 못 느끼는 사람들도 있어요. 직업을 잘못 선택한 거죠.”

-그렇게 해서 의사를 중도에 그만두는 사람도 있습니까?

“네. 있어요. 의과대학에서도 매년 한두 명은 탈락합니다. 또 의사가 되어서도 의사를 안 하는 사람도 있죠. 의사를 하더라도 임상 의사를 안 하시는 분도 있고, 좀 하다가 스트레스를 느껴 못 견디는 분도 있어요. 그래서 다른 진로를 택하시는 분도 있어요.”

-그러면 의사로서 보람이나 기쁨은 뭔가요?

“환자 보는 거죠. 물론 환자를 치료해서 나았다는 보람도 있지만, 결국은 내가 환자들을 잘 볼 수 있다는 것, 내가 돌봐줘야 하는 환자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이죠. 그게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죠. 사람은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잖아요.”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그렇죠. 그게 보람인거죠.”

-특별히 원장님이 피부과 전공을 택한 까닭은 뭔가요?

“허허. 요즘은 피부과 수요가 많잖아요? 그런데 옛날엔 피부과가 그다지 안 좋았어요. 내가 1977년에 의과대학을 졸업했는데, 아마도 그 때 굉장히 공부 잘하는 몇몇이 함께 피부과를 갔어요. 그게 시초였어요. 그걸 택한 것은 당시 은사님이 끌어주신 덕이죠. 저희 집안과도 가까운 분이었고, 제가 잘 따르기도 했던 분이었는데, 그 분이 피부과 교수님이셨거든요.”

두 딸을 의사로 키운 까닭

-고향이 청주로 되어 있던데.

“저는 피난둥이라 태어나긴 대구에서 났지만, 전쟁 통에 강보에 싼 채로 청주로 돌아와 중학교 때까지 거기서 다녔죠.”

-하긴 1951년생이시니 그 때 전쟁 중이었네요. 아버지는 어떤 분이셨나요?

“평안도 출신으로 변호사를 하셨는데, 해방 때부터 내려와 청주에 정착하셨죠. 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는데, 남긴 땅을 가지고 할머니가 자식들 공부를 많이 시켜서….”

-아버지가 변호사는 언제부터?

“해방 때부터 죽 하시다가 제가 대학 4학년 때 돌아가셨어요. 일찍 돌아가신 거죠.”

-초·중학교는 어디 나오셨나요? 그리고 고등학교는 서울로 가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수재라는 말을 많이 들었나 봐요?

“석교국민학교와 청주중학교. 청주에도 청주고등학교가 있었는데, 그 학교도 당시 서울대에 많이 갔거든요? 거기도 좋은 학교였죠. 그런데 그 때도 바람 같은 게 불어가지고…. 요즘 같으면 대치동 학원가에 전세 얻어서 가는 것처럼, 그 때도 유행처럼 서울로 보냈죠.”

-원장님 경력을 보면 경기고-서울대 의대-서울대 의과대학원-서울대병원 전공의 과정 등 한국 의학계에서는 엘리트 코스만 쭉 밟아오셨는데, 그런 모범적인 코스를 거쳐 오는 게 좀 따분하진 않았나요? 인생의 굴곡이 너무 없는 것 같아서요.

“그렇다고 해서 굴곡이 없는 게 아니라 여러 번 있었죠. 대학도 떨어져 보고, 대학 다니다가 쉬기도 하고….”(웃음)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삼성병원 제공

-아, 대학 들어갈 때 재수를 하셨군요.

“그랬죠. 그리고 대학 졸업하면 인턴, 레지던트 코스를 밟아야 하는데, 거기서도 조금 밀려서 군대 먼저 갔다 오고…. 다 굴곡이 있죠. 굴곡 없는 인생이 어디 있겠어요?”(웃음)

-그래도 그 정도 굴곡이야 굴곡이랄 것까지도 아닌 것 같은데. 그 외에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을 때는 언제였나요?

“인생에서 힘든 거요? 뭐, 매일 힘들죠. 허허. 군대생활이 좀 힘들었죠. 전문의로 가면 조금 덜 힘들었을 텐데, 저는 의과대학 졸업하자마자 군대 갔으니까. 군의관으로 갔는데, 그 때가 남북 간 긴장이 최고조일 때였어요.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게 1979년이었고, 판문점 도끼 사건이 76년이었거든요. 그 때 군의관으로서는 드물게 전방 철책에까지 갔어요. 고생 좀 했죠.”

-아버지께서 청주에서 변호사 생활을 오래 하셨다면 웬만한 사람들은 이름만 대면 아실만한 분이겠네요. 성함이?

“김종호.”

-본이 혹 김해신가요?

“전주입니다.”

-원장님 부인(신현숙·1954년생)은 어떻게 만나셨나요?

“연애해서 만났죠.”

-어떻게?

“학교 다닐 때 소개로 만났죠.”

-뭐하시던 분이었는데요?

“영문과 나와서 은행 좀 다니다가…. 우리 시절만 해도 (여자가) 직장을 오래 다닐 수 없었죠.”

-결혼하고 그만 두신 건가요?

“결혼하고, 애도 낳고 하다가 안 되겠다 싶어 그만뒀어요.”

-병원장 사택이 마산만아이파크 아파트죠? 거기 전망이 좋을 텐데.

“아, 좋죠. 그래서 집사람에게 그럽니다. 남들은 돈 벌어서 별장도 사고 하지만, 우리는 이걸 별장으로 생각하자고…. 허허허. 그래서 좀 자주 내려오라고.”(웃음)

-부인이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시나요?

“더 자주 옵니다. 반 이상은 여기 와서 삽니다.”

-자녀분은 어떻게 되나요?

“딸 둘인데, 둘 다 의사 시켰어요. 출가도 다 했고.”

-혹시 사위도 의사인가요?

“사위도 의사죠.”

-원장님 아래로는 모두 의사 집안이 되었군요. 원장님이 따님들에게 의사라는 직업을 권했던 건가요?

“음, 강요는 안했는데, 저는 아이들 키우면서 독립성을 중시했어요. 가능하면 학교를 선택하더라도 본인이 하도록 했죠. 의사라는 직업이 우리 때까지는 100명 중 여자가 열 명이 안 넘었어요. 내가 졸업할 땐 100명도 넘는 인원 중 여자는 네 명밖에 안됐어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거의 절반이 여자인 대학도 생겼더라고요. 그래서 딸아이들에게 그랬죠. 우리 사회에서 여자가 독립적으로 직장생활을 하든 뭐든 비교적 남녀 차별을 받지 않고 할 수 있는 직업이 의사라고 얘기했죠.”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삼성병원 제공

-의사 사회에는 남녀 차별이 전혀 없나요?

“물론 지금도 의사를 뽑을 때 남자 뽑을래? 여자 뽑을래? 물으면 남자 뽑으려는 경우가 많겠죠. 왜냐면 애기를 낳아야 하니까. 물론 애기를 낳아야 국가와 사회가 유지되는 거죠. 그래서 나도 지금 원장인데 어떡하겠어요? 우리 간호사들이 다 여자인데…. 옛날에는 임신하면 임신 안한 척 하고 다녔어요. 그래서 지금도 그럴까봐 우리 직원이 임신하면 당장 꽃다발 주면서 공개적으로 임신축하를 해줘요.”

-어쨌든 그렇게 말하면서 따님들에게 의사를 권했군요.

“(웃음) 은근히 그렇게 말하면서 의사가 되기를 바랐는데, 다행히 아이들이 그렇게 해줘서 고맙지.”

-아버지는 아이들이 독립적으로 결정하게 했지만, 혹시 사모님이 공부를 심하게 시킨 건 아닐까요?

“그런 건 아니고 함께 했죠. 아이들에게 공을 많이 들였어요. 요즘 같은 개념이 아니라 아이들 어릴 때 진짜 많이 데리고 다녔죠. 그 땐 콘도라는 게 유행할 때였는데, 포니 원이라는 중고차 하나 사가지고 여행을 많이 다녔어요. 가다가 경치 좋으면 세워놓고 개울에서 놀게 하고….”

-아이들과 함께 보내는 시간을 많이 했군요. 그게 어떤 효과가 있던가요?

“리더십이 생기는 거죠. 아이들이 대학갈 때 펜션이 유행했는데, 친구들과 갈 때 우리 아이가 모든 기획을 하고 역할을 나눠주는 리더가 되더라고요.”

-따님들은 무슨 과를 전공했나요?

“하나는 피부과고, 하나는 성형외과.”

-부인이 절반은 여기 와 계신다고 하셨는데, 함께 즐기는 취미생활이 있나요?

“주로 많이 돌아다닙니다. 아내도 충청도 사람인데, 경치 좋은 곳도 다니고, 오일장도 함께 다녀요. 창녕시장은 아직 살아있더구먼. 거기 가서 수구레국밥 먹고 왔죠.”

-등산은 잘 안가시나요?

“산에 올라가는 건 별로….”(웃음)

-통영 미륵산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는데.

“아, 거긴 몇 번이나 다녀왔어요.”

-마산 통술집도 좀 가봤나요?

“여러 번 갔죠. 여기 와서 생선이나 해산물을 많이 먹게 됐죠.”

-와인도 즐기신다고 들었는데.

“그건 그냥 와인 바람이 불 때 부화뇌동하여…. 하하. 그런데 봉직 의사가 좋은 점 중의 하나가 외국에 나갈 기회가 자주 생긴다는 건데, 거기 가서 발표도 하고 친구도 사귀게 되는데, 외국에선 와인을 마실 일이 많더라고. 아주 조금 아는 정도죠.”

잘 나가는 의사도 싫증날 때가 있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봤지만, 정말 순탄한 삶을 살아오신 것 같아요. 아까 대학 재수한 것 하고, 인턴 레지던트 경쟁에 밀려 군대 먼저 다녀온 게 인생의 굴곡이라 하셨는데, 일반인들이 보면 그 정도는 굴곡도 아니잖아요.

“아유, 그럼요. 제 인생 전체를 보면 크게 복 받은 사람이죠. 우선 시골에서 태어났지만 아버지가 변호사여서 힘든 줄은 모르고 자랐죠. 그 때 보릿고개가 아주 심할 때였거든요? 주변에 굶는 건 자주 봤지만 나는 한 번도 안 굶었지. 서울에 가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적 뒷받침도 있었지. 내가 뭐 학비를 벌어오기를 했나, 장학금을 받아왔나. 아무 어려움 없이 학교를 다녔죠. 또 어떻게 운이 좋았는지 다 좋은 학교를 다녔고…. 그래서 인생 전체로 보면 아주 크게 어려웠다거나 그런 일이 없었죠. 피부과를 선택한 것도 처음엔 그렇게 인기 있는 과가 아니었지만, 이후엔 최고 인기과가 되었고…. 뭐 저로서야 인생 전체가 굴곡 없이 행운이 이어졌다고 봐야죠.”

-그런 인생이 좀 따분하진 않았나요? 일탈이라든지 그런 걸 꿈꾼 적은 없나요?

“음. 그렇지는 않고요. 그냥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면서 거기서 행복을 찾는 거죠. 일탈이라는 게 어디까지가 일탈인지 모르겠는데, 갑자기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가는 게 일탈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건 있더라고요. 제가 1995년인가? 아마 40대 중반 쯤 됐나 싶은데, 뭔가 심심해지더라고. 그때 친하게 지내던 서울대학교 선배가 있어요. 그 분을 불러서 투덜투덜했더니 이 양반이 한다는 얘기가 ‘야! 너 갱년기야 인마!’ 하더라고.(웃음) 그게 아마 이런 거죠. 봉직 의사로서 한참 열심히 살아와서 뭔가 해놓고 나면 갑자기 시들해진다는 거야. 그 양반 하는 말이, 좋은 대학 나왔지, 박사도 받았지, 해외연수도 다녀왔지, 그러면서 외국 사람들도 좀 사귀었지, 텔레비전도 많이 나갔지. 의사로서 해볼 짓은 다해봤다는 거죠. 그러니까 시들해진 거라는 진단을 내리고 국면 전환을 권했어요.”

-어떤 국면 전환을?

“임상 의사들이 베이식 사이언스(기초과학)라는 걸 합니다. 셀 컬쳐(cell culture·세포배양)도 하고…. 그게 그 때 막 시작될 때였거든요. 그 선배는 그쪽으로 넘어가면서 갱년기를 극복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원장님도 그걸 했나요?

“그 때 마침 고려병원이 강북삼성병원으로 바뀔 때였어요. 저에게 병원 관리 일을 해보겠느냐는 제의가 있었고, 1998년부터 기획실장을 하면서 상당부분 병원 일을 하게 된 거죠. 그 전까지는 병원 경영이나 이런 쪽엔 별 관심이 없었어요.”

-그게 국면 전환이 된 거군요. 그래서 나중에 진료부원장도 하시고….

“그랬죠. 그 때까지만 해도 병원 기획실장을 대부분 행정직이 했는데, 의사가 기획실장을 하는 것은 좀 드문 시절이었죠.”

-그 때 국면 전환이 계기가 되어 삼성창원병원장으로도 오게 되셨는데, <삼성창원병원 30년사>를 보니, 2009년에 처음 원장으로 오셨을 때 ‘뭔가 경직된 걸 느꼈다. 그래서 소통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하셨더라고요. 병원에서 소통이란 뭘 말하는 건가요?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기업 중에서 제일 경영하기 힘든 게 호텔이랍니다. 그런데 우리는 호텔보다 더 어려운 게 병원이라고 합니다. 말도 비슷하잖아요. 호스피틀(hospital)이 호텔(hotel)에서 나왔잖아요. 호텔을 경영하려면 방을 팔기만 하면 되는 것 같지만, 수많은 직종이 필요하죠. 영업만 필요한 게 아니라 서비스하는 사람, 밥하는 사람, 청소하는 사람, 세탁하는 사람 등이 필요하죠. 그보다 더 많은 직종이 필요한 게 병원이거든요. 병원도 호텔처럼 재워주지만 치료도 해야 하거든요. 더 결정적인 것은 호텔은 대부분 일하러오거나 놀러오거나 하는 고객이지만, 우리는 99.9%가 아프고 짜증나고 성질나서 오는 사람들이에요. 딱 안 그런 사람이 있긴 있어요. 아들이나 딸 낳은 사람. 하하하.”

김계정 삼성창원병원 원장./삼성병원 제공

의사도, 병원도 ‘존재의 이유’가 필요하다

-그렇군요. 어쨌든 대부분 예민하고 날카로운 사람들을 상대해야 하네요.

“네. 대상이 그렇다는 얘기고요. 소통 때문에 이 얘기가 나왔는데, 직종이 호텔보다 많은 데가 병원이죠. 심지어 한 명이나 두 명만 있는 직종도 있어요. 이 직종 간에 소통이 안 되면 안 돌아가는 겁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소통이라면 상하 간의 소통만 생각하죠. 그러나 우리 같은 병원에서는 직종 간의 수평 소통이 더 중요하다는 거죠. 병원에서 원료는 사람이고, 사람 간 소통이 잘 되면 그만큼 원가 절감과 생산성이 높아진다는 겁니다.”

-그런 소통을 잘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별 방법이 없어요. 다만 사람들이 마음을 열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계기를 만들어주는 거죠. 제일 간단한 게 동호회를 활성화해서 직종 간에 자주 만나도록 하고, 여러 가지 이벤트를 만들기도 하고….”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 때 원장님이 직접 초콜릿이나 사탕을 나눠주기도 한다면서요?

“그런 걸 많이 했어요. 부활절 달걀 이벤트도 하고, 크리스마스 때는 피자를 돌리기도 하죠. 아무래도 병원은 365일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곳이니까.”

-이번에 방사선종양학과를 신설하고 100억 원을 들여 장비도 도입했다던데, 그만한 투자를 할 만큼 중요한 건가요?

“전문의를 포함한 물리학자와 의료기사 등 총 9명의 인건비를 제외하고도 시설과 장비도입에만 100억의 비용이 들었죠. 창원지역의 암 환자 중 약 60%가 타 지역으로 원정 진료를 떠난다고 합니다. 지역주민들이 연고도 없는 타 지역에서 치료를 받아야 하는 현실을 지역의 대학병원으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죠. 삼성창원병원은 삼성서울병원과 협력네트워크가 있고, 이 강점을 적극 활용한 거죠.”

-의사로서도 성공하셨고, 원장도 두 번 연임을 하시게 됐고, 임기를 잘 마치고 정년퇴직하시게 된다면 남은 인생의 꿈이나 목표가 따로 있나요?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이 계속 왔다 갔다 합니다.(웃음) 예를 들면, 일단 일 안하고 논다는 생각도 해봐요. 그동안 제 인생에서 일 안하고 쉬어본 일이 거의 없거든요. 사실은 휴가도 잘 안 갑니다. 1년에 14일 이상 휴가를 쓸 수 있지만, 일주일 휴가도 써본 적이 없어요. 와이프 불만 중의 하나죠. 학회에서 해외 출장을 가면 그걸 그냥 휴가라 생각합니다. 정 아쉬우면 하루나 이틀이나 주말에 잠깐 쉬는 정도지.”

-그 정도면 워크홀릭(workaholic) 아닌가요?

“그렇지도 않아요. 저희들이 볼 때 워크홀릭이라면 아침 일곱 시에 나와서 퇴근 시간 후에도 밤 열 시까지 집에도 안가고 연구하고 논문 써서 세계 유명 잡지에 게재하고 그런 정도가 되어야 워크홀릭이라고 하죠.”(웃음)

-그렇게 일하다 정년 후에 놀기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요.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니까 자동차로 전국일주나 해볼까 하는 생각도 하고…. 어떤 블로그에 보니 50일 넘게 전국 해안도로를 자동차로 돌았더라고요. 해외여행도 생각해보고…. 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요즘 같은 100세 시대에 80살까지 생생하게 산다면 15년 동안 그렇게 놀 수만은 없을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내가 아는 선배 중 한국 최고의 의사가 계셨는데, 정년퇴직 후 강원도의 한 공공의료원에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가 진료를 해주고 있거든요. 그래서 저도 피부과 의사에게 월급 주긴 싫지만, 일주일에 한두 번 내가 필요한 곳에 가서 봉사 겸 진료도 하고 뭐 그런 방법도 있을 것이고, 여러 상상을 많이 합니다. 그런 걸 상상하는 것도 즐거운 일이죠.”

-지난 2010년 연말 저희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의 전문가 100명을 상대로 조사를 했는데요. 중병에 걸렸을 때 어느 병원에 가겠느냐고 물었더니 삼성창원병원이 1등으로 나왔습니다. 창원에서 가장 큰 병원이자 대학병원으로서 지역주민께 당부하고픈 말씀 한 마디 하신다면.

“조사결과가 그렇게 나왔다니 고마운 일입니다. 당부라기보다는 결국은 우리 병원이 지역에 필요한 병원이 되어야죠. 그게 존재의 이유죠. 또 우리 지역 주민들도 우리 병원에 필요한 것들을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거기에 맞춰 존재의 이유를 잘 세우고, 지역민들이 우리를 믿고 찾아오실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두 시간 동안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인터뷰 도입부에 가졌던 의사라는 직업에 대한 의구심은 상당 부분 내 편견이었음이 밝혀졌다. “내가 환자들을 잘 볼 수 있다는 것, 내가 돌봐줘야 하는 환자들이 이렇게 많이 있다는 것”이 곧 기쁨이요 보람이라는 그의 대답에 물어본 내가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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