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정치인 헤르만 셰어는 <정치인을 위한 변명>에서 "민주주의는 선택의 연속이요, 선택은 구분을 전제로 한다"고 했다. 그 놈이 그 놈이란 생각으론 도저히 민주주의 발전을 기대할 수 없으니 조금 아쉬워도 적극적으로 솎아내야 한다는 거다. 꽤 일리 있는 얘기지만 정치인의 입장, 특히 여당이나 언제든 집권할 가능성이 있는 주요 정당엔 달갑지 않은 소리다. 유권자들의 꼼꼼한 선택은 변화와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는 곧 기득권 박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어디 정치뿐이랴. 상품을 구입할 때도 마찬가지다. 늘 사던 것 또는 남들이 많이 사는 것 위주로 관성에 의존해 구매하는 풍조가 만연할 때 애써 좋은 물건 만들려는 기업이 나타날 확률은 거의 없다. 그런 이유로 이 땅에 넘치고 넘치는 독점과 과점은 대부분 자본의 힘에 기인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소비자들의 무관심과 관행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다양한 선택 앞에 부지런하지 않은 걸까? 더구나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는 말을 뭔가 대단히 긍정적인 변화의 의미로 해석하는 세상에서.

128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7번방의 선물> 출연배우들의 기념 촬영.

'선택의 역설'이란 말이 있다. 현대인 대부분이 선택의 자유를 누리며 무수히 많은 선택의 여지 속에 살고 있어 축복을 받은 것 같지만 오히려 행복하지 않다는 이론이다. 주창자인 배리 슈워츠는 청바지를 예로 든다. 선택의 폭이 적을 땐 시간도 노력도 많이 필요 없었고, 선택 후 맘에 들지 않았을 때 '남 탓'도 가능했다. 그러나 경우의 수가 많아지니 선택 과정 자체가 힘들고 괴롭다. 그렇다고 모두 챙겨보지 않을 수도 없다. 불안하니까. 고심 끝에 최종 선택을 했지만 딱히 맘에 들지 않는 게 문제다. '남 탓'도 힘들다. 그 많은 기회 속에서 행한 선택인데 누굴 탓한단 말인가.

우리 사회 특유의 쏠림 현상도 한 몫을 한다. 대한민국은 초강력 1극 체제다. 수도권 집중과 소수 재벌의 경제적 독점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그 기저엔 강한 것, 큰 것이 아름답다는 논리, 이긴 것이 곧 강한 것이란 논리가 있다. 그러다 보니 선택에 주체성이 없어졌다. 그저 남들이 많이 선택한 길에 들어서면 무조건 심리적으로 안심하는 경향, 그리고 그 길에 동참하지 않은 이들을 무시하거나 박해하려는 경향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년에 10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가 몇 편이나 나오는 건 분명 경이로운 일이다. 하지만 그 놀라움은 한국 영화의 저력이 아니라 선택의 쏠림 현상으로 향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그건 찬란함이 아니라 공포로 이해돼야 마땅하다. 대박 영화 만들려고 거의 모든 상영관을 한 편의 영화로 도배한 풍경에 질리지 않았다면 이미 선택의 기회를 박탈당한 것에 무감한, 게으른 소비자 대열에 들어선 걸로 봐야 하는 것이다.

최근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한 출판사들의 사재기가 들통 났다. 동네 서점 다 죽고 남은 초대형 서점, 그 많은 서가에 꽂힌 책을 일일이 살펴보기란 매우 피곤한 일이다. 그러니 남들이 많이 구입한 책에 먼저 손을 대는 거고, 결국 그 같은 선택의 포기가 조작에 의한 베스트셀러 만들기에 조력자가 된 셈이다.

철학자 강유원은 말한다. "한 사회의 준거틀로 작용하는 텍스트가 무엇이냐에 따라 그 사회가 지금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알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란 책이 자그마치 130만 부 팔린 나라다. 그래서 과연 우린 정의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가? 그럴 가능성은 있는 건가? 답은 하나다. 귀찮아도 꼼꼼한 우리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김갑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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