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밀양간 국도를 따라 진영읍을 거쳐 낙동강 하류 수산대교를 건너면 밀양시 하남읍이고, 그곳에서 하남평야를 거쳐 밀양쪽으로 4㎞지점에 남전리 효자마을이 있다. 이 마을 한 쪽으로 흐르는 준령을 재령등이라 하고 이 기슭에 효자정려비가 있어 지나는 길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이 비는 고려 공양왕조의 충절신이자, 밀양오현의 수반으로서 충효가 겸전하여, 고장의 백세지사표로 추앙받고 있는, 지평 이신 선생의 효제를 기리기 위해 조선 태종 (1405년)의 명정으로 세운 것이며, 아들 의동을 녹용하고 마을을 효자동으로 명명하여 부르게 한 것이 효자마을의 유래이다.
효자 이신 선생은 천품이 굳세고 정직하며 의리에 밝았으며, 평소에 근신독행하여 집에서는 효도하고 벼슬함에 충성을 다하셨다. 1389년 같은 친명파이던 정몽주 선생과 이성계는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는 버리고 진짜를 세운다)의 논리를 내세워 창리를 신돈의 혈통으로 몰아 축출하고 고려 34대 공양왕을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이성계를 중심으로 하는 역성혁명파에 의해 결국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죽이고는 공양왕을 축출.유배했다. 그리고 정몽주의 문인인 이 선생을 비롯한 56명을 결당 모란죄로 몰아 수감하고 조선을 건국했다. 이태조의 즉위교서에는 정적 56명을 일괄처벌한 조항이 있는데, 그 속에 선생을 비롯하여 최을로.이작 등 26명은 “그 직첩을 회수하고 곤장70대를 집행하여 먼곳으로 귀양보내게 할 것”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이때 선생은 고문의 장독으로 유배도중에 순절하셨다.
그 후 태종은 유교사회가 신하의 충절을 기반으로 유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자기들이 타살한 정적 정포은의 유교적 충절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측근과 이신 선생을 비롯한 고려 충의제현 56명을 일괄사면(1405년)하고 그분들의 충절이 조선왕조의 신하들에게 크게 영향을 미치게 하였다. 이때 이신 선생은 다만 효제만을 가상하여 효자정려를 하였으니 참으로 유감스럽다.
그러나 이 비를 경상남도 당국이 문화재 제281호로 지정하면서, 선생의 ‘신하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야한다’와, ‘효는 백행의 근본이요, 충신은 효자의 가문에서 구해야한다’라는 교훈을 수범하신 그 숭고한 충효정신을 귀감삼아 후세의 충효사상 계승의 교육장으로 활용하겠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미래에 조국의 주인공이 될 자랑스러운 아들딸을 둔 분들이여. 효와 충을 표리일체로 보았으면 한다. 그래서 가정에서 훌륭한 효자는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충신이었음을 효자 이신 선생의 행적에서 배워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도 좋은 교훈으로 알려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들 선현께서는 충.효.열을 숭상하였고 이를 가장 중요한 인간의 덕행으로 삼으며 살아오셨다. 우리 모두는 선조의 충효사상을 오늘에 계승하고 본받아서 조국에 이바지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 되도록 다같이 노력하여 충과 효가 사라져 가는 현실에 귀감이 되었으면 한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