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판 한 귀퉁이에 ‘D-day 0’라는 글자가 눈에 띈다. 교실 뒤 게시판은 온통 입학사정관 준비, 대입 정보, 자기소개서 쓰는 요령, 전년도 입시분석표 등으로 넘쳐난다.

창가엔 칫솔들이 나란히 줄을 서 있고, 사물함 위의 물병, 모포들이며 비누와 로션까지 무질서하게 널브러져 있는 걸 보면 흡사 이재민 수용소 같은 느낌마저 감돈다. 그러고 보니 이 아이들은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보다 ‘집에 다녀오겠습니다’라는 인사가 더 어울리는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오늘로 나흘째, 중간고사 마지막 날. 마지막 교시의 시험을 치르는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시험지를 받기도 전에 답안지에 체크를 하고 엎드리는 녀석들도, 종료령이 울리기 직전까지도 펜을 바쁘게 놀리는 녀석들도 모두가 시험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없이 초라해지는 모습이다.

열심히 하든 그렇지 않든 내신이라는 단어는 고등학교 생활의 가이드라인이 되고, 목적이 되고, 목표가 되고, 족쇄가 되고 있다. D-day가 다가온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들에게는 심리적 부담일 것이다. 학교 시험을 치를 때마다 내신이라는 이름의 입시를 치르는 셈이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서술형 평가의 비중이 커진 까닭에 여기저기서 새어 나오는 안타까운 한숨 소리가 교실의 공기를 더욱 무겁게 가라앉히고 있다.

시험 감독을 하고 있노라면 수업할 때 미처 보지 못했던 아이들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학급 단위가 아니라 한 명 한 명을 하나 하나의 세계로 인식하게 된다. 골똘하게 수학문제 풀기에 여념이 없는 아이들의 찡그린 얼굴에서 그 녀석이 자라온 과정들을 상상하게 되고, 앞으로 사회에 나가 어떻게 성장할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마치 이번 시험만 잘 치르고 나면 이 모든 부담으로부터 해방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편치 않다. 우리나라에서 대학생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기 위해 치러야 할 막대한 비용과, 대학 진학을 위해 희생하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더욱 많아진 그들의 학창 시절을 생각하니 변덕스러운 4월의 날씨만큼이나 나의 기분도 심란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료령이 울리자마자 ‘시험끝~’이라는 환호성을 터뜨리며 금세 유쾌해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어쩌면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학창 시절을 즐겁고 유쾌하게 지내는지도 모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기도 한다.

불안한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보다는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아이들에게 진심으로 힘찬 박수를 보내고 싶다.

/이정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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