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푸라기라도 잡듯 대기업 편의점 열었지만, 오히려 스스로 목 조르는 결과

1992년 여름이었다. <질투>라는 드라마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우리나라 최초 '트렌디 드라마'였다. 젊은 세대가 입고, 먹고, 노는 생활방식을 세련되게 포장했다. 그 도구로 사용한 것 가운데 하나가 편의점이었다. 주인공들은 끼니 때울 때 굳이 식당을 찾지 않았다. 편의점이면 충분했다. 선 채로 컵라면과 김밥을 먹고, 후식으로 커피·음료수까지 해결했다.

TV 속 모습이 일상화되기까지는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1993년부터 경남지역에도 편의점이 여기저기 들어섰다. 그리고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 편의점은 골목·학교까지 들어와 있다. 동네슈퍼가 사라진 자리는 24시간 불 밝히는 편의점이 대신한다. 새벽에 담배 떨어져도 걱정할 필요 없다. 이용자 처지에서는 아주 고마운 일이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다. 편의점을 직접 운영하는 가맹점주들이 스스로 목숨 끊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올해 들어서만 세 명이다. 이를 통해 본사-가맹점주 간 불공정 계약 내용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뿐만 아니라 지역 돈이 서울 본사로 흡수되는 구조 등 그동안 간과된 것들도 함께 들춰지고 있다. 편의점이라는 존재 자체를 더는 편하게 바라볼 수 없는 지금이다. 

새벽 두 시. 김현우(가명·57·창원시) 씨는 오늘도 편의점을 지키고 있다. 30분 전 손님 한 명이 다녀갔을 뿐 편의점은 적막 그 자체다.

프랜차이즈 편의점 가맹점주 김 씨가 새벽에 들어온 물건을 진열하고 있다. /남석형 기자

그때 가게 문이 열렸다. 우유·햄버거를 배달하는 본사 물류기사다.

"물건 왔는데 진열 안 합니까?"

"손님도 없는데, 진열은 무슨…."

물류기사는 별다른 대꾸 없이 그냥 나간다. 늘 듣는 이야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김 씨는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다. 말은 그렇게 했어도 들어온 물건은 챙겨야 한다. 물론 성의는 없다. 1년 2개월 전에는 그렇지 않았지만 말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온 김 씨는 지난 시간을 떠올렸다. 누가 등 떠민 것은 아니었다. 스스로 한 선택이었다. 그때는 최선이라 생각했다.

김 씨는 대학에서 사진을 전공했다. 졸업 후 결혼업체에 취직해 사진촬영 일을 했다. 20년 가까이 성실히 일하며 창원에 330㎡(100평)짜리 단독주택도 마련했다.

40대 중반이라는 나이가 그런 걸까? 눈이 자꾸 다른 것으로 향했다. 김 씨의 시선이 한 곳에 꽂혔다. 한창 들어서던 PC방이었다. 김 씨는 창업 준비에 들어갔다. 장소는 대학가로 정했다.

집을 팔고 전셋집으로 옮겼다. 수중에 5억 원이 들어왔다. 그 돈으로 가게 전세금·인테리어·기기 구매를 해결했다. PC는 150대가량 됐다. 여느 PC방 못지않다는 생각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김 씨는 컴퓨터 관련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믿을만한 초등학교 후배를 불렀다. 지배인 직함을 달아 주었다. 여기서부터 어긋난 삶이 시작됐다는 건 훗날 알게 됐다.

김 씨는 PC방을 전적으로 후배에게 맡겼다. 개인 볼일을 보며 하루 한번 금액만 확인했다. 기대보다 손님이 많지 않았다. 이미 PC방이 들어설 만큼 들어섰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그래도 폐업을 고민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렇게 가게 문을 연 지 1년 조금 넘은 어느 날이었다. 사람을 너무 믿은 탓이었다. 후배가 전세금을 빼 종적을 감췄다. 매출금도 매일매일 뒤로 빼돌린 것은 물론이었다. PC방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다. 1년 반 만에 손에 남은 것은 1000만 원이 채 안 됐다.

그래도 김 씨는 보통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다. 지나간 것은 잘 털고 일어나는 편이다.

'두 번 실수하지는 않아야지.'

하지만 그때의 다짐이 지금 생각하면 공허하게 느껴진다.

전셋집을 월세로 옮겼다. 그 전세금으로 곰장어 전문식당을 열었다. 꽤 쏠쏠함을 느낄 때 즈음, 예기치 않은 사고가 닥쳤다. 2층에서 떨어지는 사고로 등뼈가 부서졌다.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베트남인 아내도 김 씨 간병으로 식당에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도 식당을 주방장에게 맡긴 게 화근이었다. 2개월만에 퇴원해 식당으로 돌아오니 주방장은 월세로 내야할 돈과 수입금을 들고 사라진 뒤였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전세금이라도 남아있으니 희망은 있는 셈이었다. 다시 도전한 것이 돈가스집이었다. 그나마 이때가 봄날이었다. 2년 동안 6000만 원가량 벌 수 있었다. 등뼈를 다친 후유증 때문에 더 하지 못한 아쉬움이 두고두고 크다.

6개월간 몸을 추슬러 다시 통닭집을 열었다. 여기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있었다. 배달비 아끼려고 직접 오토바이를 몬 것이 화근이었다. 교통사고를 당해 발목뼈가 으스러졌다.

2011년 가을. 다시 병원에 누워 있는 김 씨 나이는 벌써 50대 중반이었다. 돌고 돌아 남은 돈은 3000만 원이었다. 베트남인 아내가 공장 일로 버는 100만 원으로 한 달을 버티고 있었다. 아이는 벌써 5살이었다. 교육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씨는 마지막 끈을 생각했다. 닭집을 하기 전 알아봤던 ㄱ 프랜차이즈 편의점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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