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밭 주인이 1데나리우스를 주기로 하고 이른 아침부터 일꾼을 불러 일을 시켰다. 그런데 그 주인은 아침부터 오후 내내 일자리가 없어 빈둥거리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데려와 일을 줬다. 그러다 마칠 시간이 됐고 주인은 맨 나중에 온 사람부터 품삯을 줬다. 가장 늦게 오후 다섯 시에 온 일꾼이 1데나리우스를 받았다. 당연히 아침 일찍 온 사람은 내심 더 받을 것을 기대했다. 하지만 그에게도 똑같은 돈이 주어졌다. 투덜대는 그에게 주인은 "나는 너를 부당하게 대한 것이 아니라 합의대로 한 것이다.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너에게 준 것과 똑같이 주는 게 내 뜻"이라고 말했다. 마태복음 20장에 나오는 얘기다.
이 대목에 등장하는 '나중에 온 이 사람'(Unto this last)이 바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에 대한 애정과 생명이 가장 중요하다고 역설했던 '이상한 경제학자', 존 러스킨의 유명한 책 제목이 됐다.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6년 먼저 세상에 나온 이 책 속의 '나중에 온 이 사람'은 그때나 지금이나 각종 차별 속에 신음하는 사회경제적 약자의 또 다른 이름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새벽별 보고 집을 나와 해질녘까지 인력시장을 떠도는 날품팔이 노동자와 똑같은 일을 해도 월급의 절반밖에 받지 못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바로 그들이다.
미국 작가 랄프 엘리슨이 1952년에 발표한 문제작 <투명인간>의 주인공 역시 '나중에 온 사람'이다. 그는 분명 존재한다. 뼈도 있고 살도 있고 정신도 있다. 하지만 그는 보이지 않는다. 흑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백인전용 좌석에 앉아 양보를 거부했던 로자 파크스 이전의 흑인이다. 그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를 보지 않으려 했던 거다. 이 '나중에 온 투명인간' 역시 이 땅에 넘쳐난다. 자기 몸의 몇 배나 되는 폐지들을 끙끙대며 끌고 가는 할머니, 냄새난다며 갖은 모욕 당하고 매를 맞아도 묵묵히 참을 수밖에 없는 외국인 노동자가 바로 그들이다.
조르조 아감벤의 '호모 사케르'는 동명의 책이 1995년에 출간됐으니 시기적으론 제일 '나중에 온 사람'이다. 하지만 가장 심하게 차별받는 사람이다. 그는 아예 세상에서 추방된 존재다. 그리고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시민의 권리를 공개적으로 박탈당한 자다. 더 서글픈 건 그가 죽든 말든 세상은 꿈쩍도 안 한다는 사실이다. 죽어서도 차별당하는 이들, 예를 들면 현대차에서 계약 만료로 일을 그만두고 목을 맨 촉탁직 노동자와 제 몸에 기름 붓고 불을 붙여버린 기아차 비정규직 노동자, 그리고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며 철탑에서 200일 가까이 고공농성을 벌이고 있는 그들이 바로 '나중에 온 투명인간, 호모 사케르'에 다름 아니다.
이런 와중에 차별금지법 개정안 발의가 철회됐다. 피부색과 장애 같은 신체적 조건은 물론, 정치적 성향이나 성적 취향, 학력과 고용 형태를 두고 행해지는 그 어떤 차별도 금지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법 제정이 무산된 것이다. 다시 말해 '먼저 온 사람'과 '나중에 온 사람'의 구별을 두지 말자는 법이 물 건너간 거다.
이럴 때일수록 연대만이 살 길이다. 노조 조직률 10%에 비정규직 절반의 시대, 조금 먼저 왔다고 나중에 온 사람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수수방관하다간 우리 모두 가장 비참한 존재, 즉 '나중에 온 투명인간, 호모 사케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김갑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