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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이 만난 사람]강기갑 전 국회의원

가톨릭 수도사가 되려했던 청년, 결혼을 선택한 까닭

김주완 편집국장 wan@idomin.com 입력 : 2013-04-20 09:09:05 토     노출 : 2013-04-20 09:09:00 토

그는 여러 모로 특이한 사람이다. 조선시대 사람처럼 수염을 기른다. 외출할 때는 한복만 입는다. 신발은 고무신이다. 뼈만 앙상한 체구지만, 다부진 인상이다. 갓만 안 썼다 뿐이지 영락없이 꼬장꼬장한 조선시대 선비다. 게다가 걸핏하면 단식을 한다. 양치질도 치약 대신 죽염을 쓴다. 식사 전후 두 시간 동안은 절대 물을 마시지 않는 ‘밥 따로, 물 따로’ 식사법을 철저히 지킨다. 강기갑(1953년 6월 7일생, 실제로는 1951년생) 전 국회의원 이야기다.

그가 살고 있는 경남 사천시 사천읍 장전2리 흙사랑농장은 행정구역만 읍(邑)일뿐 두메산골이나 마찬가지였다. 읍사무소에서 5.6km나 떨어진 시골마을 안에서도 외딴 산 밑에 위치해 있었다.

농장은 꽤 넓었다. 아내와 3남 1녀 가족이 함께 사는 2층 집과 함께 황토방 별채가 있었고, 100여 마리의 소를 키울 수 있는 축사와 농자재 창고, ‘흙사랑 영농조합법인’이라는 간판을 단 농산물 창고도 있었다. 그 뒤로는 3만 평이 넘는 임야와 과수원이 있다.

그는 커다란 함지박 같은 철판을 옆으로 세워두고 용접을 하고 있었다. 그게 뭐냐고 물었더니 “세멘(시멘트) 비비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농장에 공사를 좀 하려는데 레미콘을 부르려니 너무 돈이 많이 들어 직접 비벼서 하겠다는 것이다. 용접을 마친 그는 포크레인을 직접 운전해 농장 한 켠에 있는 자갈을 능숙하게 트랙터에 실었다. 이윽고 일을 마친 그가 다가왔다.

   
  작업 중인 강기갑 전 의원./김구연 기자  

농사꾼으로 되돌아온 정치인

“(집으로 안내하며) 들어가입시더. 집이 좀 누추합니다.”

-축사가 비어있네요? 젖소는 없는 겁니까?

“없습니다. 국회 있는 동안 다 들어 내버리고….”

집 안에는 별로 넓지 않은 거실에 좌식 탁자가 놓여 있고, 혼자 공부를 막 마친 막내아들 금필(초등 4학년)이가 책을 챙겨 일어나는 참이었다. 그가 명함을 내밀었다. 녹색 매실 사진과 함께 ‘생명사랑을 실천하는 흙사랑농장 대표 강기갑’이라 적혀 있었다.

-매실농장인가요?

“주작목이 매실입니다. 여기 뒤로 보이는 산이 다 과수원입니다.”

부인 박영옥(1966년생) 씨가 매실음료 두 잔과 과일을 내왔다. 나와 사진기자의 몫이었다. 강 전 의원 몫은 없냐고 물었더니 “아직 마실 시간이 아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사이 그가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팬택 베가레이서였다. 2012년 초부터 이걸 썼다고 했다.

   
  농장에서 포크레인을 몰고 있는 강기갑 전 의원./김구연 기자  

-요즘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십니까?

“뭐, 일입니다. 그냥.”

-지금은 젖소도 없는데 일이 많나요?

“그러니까 8~9년 동안 농장이 방치상태가 되어 가지고, 겨우 매실과수원 관리만 되고…. 태풍에 산이 무너진 곳도 좀 있고, 여기 임도와 농로가 많은데 거기도 파손이 많이 됐고, 이런 저런 축대도 많이 무너지고…. 그거 복구하고 정비하느라고….”

-매실 말고 벼농사나 다른 농사는 없습니까?

“벼농사를 좀 많이 짓다가 제가 이 농장을 구입하면서 축사 짓고 하는 바람에 논을 팔아버렸습니다. 재정문제 때문에…. 지금은 과수원 하고 임야 좀 하고…. 임야도 다 과수원인데, 감나무는 도저히 뭐 타산이 안 나와서 방치상태고…. 어쨌든 축산과 과수가 제 주작목이었는데, 축산은 내가 국회 가고 나서 도저히 감당이 안 되어서 싹 처분을 했고, 지금은 매실만 하고 있죠. 지금 드시는 게 매실효소입니다.”

-그냥 매실주스가 아니고 효소라는 건 뭡니까?

“설탕과 매실을 재어가지고 1~2년 숙성시킨 뒤 3년이 되면 효소음료로 내는 거죠. 우리 매실 제품이 몇 개 됩니다. 매실 짱아찌, 고추장, 그리고 매실 엑기스라고 완전히 농축을 하여 고약처럼 내는 게 있는데, 이건 식중독이나 간, 배탈, 숙취 해소, 이런데 상당히 효과가 있죠.”

-그런 제품은 어디서 파나요?

“가톨릭농민회,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 그런 데에 주로 나갑니다. 우리가 이걸 한 지 20년이 넘었습니다. 고정 고객들이 좀 있어서 택배로 공급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제가 국회 가고 난 뒤에는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정도죠. 지금 돌아와서는 매실 잼을 하나 개발하여 마지막 판매허가 절차만 남아 있습니다. 매실이 아무래도 강알칼리성 식품이기 때문에 산성 체질을 알칼리성 체질로 전환시키는 데는 최고의 효능이 있거든요. 그런 매실을 이용한 여러 가지 제품을 개발해볼까 합니다.”

   
  강기갑 전 의원과 김주완 편집국장./김구연 기자  

-매실나무가 몇 주나 됩니까?

“1000여 주 남짓 심었는데, 지금 아마 8·900주 정도 되지 싶습니다. 산은 넓은데 아직 다 개간을 못하고 있죠.”

-평수로 치면 얼마나?

“한 3만 평이 조금 넘는데, 문제는 축사를 저렇게 대대적으로 만들어놨는데, 다시 소를 입식하려고 하니 엄두가 안 납니다. 사료 값이 너무 비싸고…. 소를 넣으려 해도 돈이 상당히 많이 들어가야 하는데, 재정상황이 그렇게 안 되어 가지고…. 하긴 축대 쌓고 길 손 보고 하는 이것도 거의 힘듭니다. 그래서 진흥자금을 좀 신청해놨는데, 그게 반영이 되면 모를까.”

-포크레인과 트랙터도 있던데?

“포크레인은 아는 사람에게 중고로 샀습니다. 트랙터는 빌려온 겁니다. 논농사를 많이 짓는 농민인데, 봄 농사철까지 쓰라고 해서 수송 수단으로 쓰고 있죠. 저것도 새로 사려면 3000만~4000만 원, 중고로 사도 1000만~1500만 원은 줘야 하니까. 참, 농기계 값도 많이 올랐어요.”

-(왼 손에 붕대를 감고 있는 것을 보고) 손은 다치신 겁니까?

“작업 중에 사다리에서 떨어져 가지고, 왼쪽 팔목을 짚었는데, 퉁퉁 붓기에 진주 한일병원까지 가서 검사해보니 골절은 아니더라고. 한 보름 됐는데, 침과 뜸으로 다스리고 있습니다. 많이 좋아진 겁니다.”

-지난해 총선 때도 돈을 제법 썼을 것 아닙니까?

“그나마 작년 선거 땐 펀드라는 게 있어서 18대 때보다는 훨씬 수월했죠. 나중에 선거비용 보전 받아서 다 돌려드렸죠.”

국회의원 중 가장 단식을 많이 한 까닭

-어쩔 겁니까? 다음 선거 때는?

“어허허허! 저는 뭐 국회에서 제가 할 일은 다 했다고 봅니다.”

-정치는 이제 접었다는 말씀인가요?

“그렇죠. 뭐. 원래 내가 계획적으로 나갔던 것도 아니고, 농사꾼이 농사짓다가 농민운동 차원에서 8년 동안 (국회에) 파견 나가 있다가 이제 뭐 유권자 선택에 의해서 파견이 끝나고 원대복귀한 거죠. 다시 농사꾼으로서 농사에 전념하고 있는 겁니다.”

   
  강기갑 전 의원./김구연 기자  

-앞으로 정치는 안 할 거란 말씀입니까?

“지금 이렇게 편하고 좋은데 뭐. 농사라는 게 그렇습니다. 마약 하는 사람들이 그런가 모르겠는데, 농사, 노동이라는 게 하다 보면 그런 맛이 있거든요. 지금 심정으로는 다시 그 시절도 갖다 놔도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정치하는 게 그렇게 힘들었나요?

“저는 제가 하는 일을 힘들다, 어렵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언제든 주어지는 그 일과 그 순간에 모든 것을 꼬라박아라 하는 게 제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기 때문에 힘이 안 들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또다시 온 몸을 던져서 그렇게 할 수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죠. 제가 17대 때 여러 차례 합쳐서 86일을 단식했으니까…. 지금 또 그런 상황이 오면 그럴 수 있을까 싶습니다.”

-국회의원 중에 단식을 가장 많이 하셨죠?

“그렇죠. 저만큼 단식한 사람은 아마 세계적으로도 없을 겁니다.”

-왜 그렇게 단식을 많이 하셨습니까?

“허~ 허허. 우리가 힘이 있으면 단식을 안 하고도 관철시킬 방법이 있었겠지만, 진보정당이 숫자도 적고 약하잖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노동자 농민, 서민들의 절규는 큰데, 다수당이 힘으로 밀어붙이니까, 그 다수결에 순응하거나 아니면 싸워야 하는데, 싸움을 해도 힘이 약하니까 단식이라는 수단으로 국민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죠. 그렇게 해서 국민의 여론이나 민심을 받아서 다수당이 그렇게 밀어붙이지 못하도록 하려면 그 수밖에 없었죠. 또 통과시켜선 안 될 일을 (다수당이) 해버렸을 때도 단식을 안 하고는 견딜 수가 없었어요. 노동자 농민을 대변하라고 우리가 국회에 왔는데, 그걸 저지시키지 못했으니까 그 부당성을 국민들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도 (단식)할 수밖에 없었죠.”

-단식을 대체 몇 번이나 한 거죠?

“17대 때만 너댓 번 했을 겁니다. 제일 길게 한 게 31일간 했고요. 쌀 협상 관련해가지고…. 그 외엔 일주일 한 것도 있고 보름 한 것도 있고….”

-그렇게 단식을 자주 하면 건강에 무리가 오거나 하진 않습니까?

“단식 자체는 건강에 오히려 좋을 수도 있고, 병도 낫게 할 수 있다는데, 정치적 단식은 건강단식과 좀 달라가지고…. 사실 단식보다는 회복식을 잘해야 하거든요. 그런데 회복식을 잘 할 수가 없죠. 단식 끝나면 바로 정치 일정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제가 건강을 좀 많이 해쳤죠. 제가 원래 많이 나가는 체중이 아닌데도 지금도 4kg 정도가 회복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영원히 안 된답니다.”

   
  강기갑 전 의원./김구연 기자  

-지금 몇 kg인데요?

“이번에 또 당 문제로 소금도 안 먹고 무리하게 단식을 해가지고 그 때 몸이 좀 많이 망가졌어요. 53kg까지 회복이 되었었는데, 이번 단식 때문에 지금 51~52kg밖에 안 나갑니다.”

-키가 몇인데요?

“167cm.”

-그렇다면 정말 체중이 적게 나가는군요. 그 정도면 보통 60kg은 되는데….

“그렇죠.”

-단식이나 공중부양 뿐 아니라, ‘곤충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는 등 농업·농민 문제와 관련해 국회에서 많은 일들을 하셨는데,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보좌관들에게 아주 빡세게 일을 시켰다더군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거의 ‘일 중독자’라는 말도 있던데, 그런 성격은 어떻게 형성된 걸까요?

“허허. 민주노동당은 국회의원 세비도 모두 당에 납부하고, 180만 원만 받다가 나중엔 230만 원으로 올랐지만, 퇴직금도 없고 그것밖에 못 받아 가는데 사명감으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죠. 다른 당은 의원들이 많기 때문에 이것저것 역할 분담도 할 수 있지만, 저 같은 경우는 사면초가가 아니라 팔면초가였어요. 그런 상황에서 ‘농민들의 현장 목소리들을 내가 놓치면 다 놓치는 거다’라고 우리 보좌관들에게 이야기했죠. 실제 보좌관을 채용할 때 언약을 다 받았어요. 독립투사들이 운동했던 각오로 일할 수 있겠느냐, 그게 안 되면 아예 같이 하지 말자. 나 역시도 그런 각오로 하고 있다.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 이렇게 약속을 받고 채용했어요. 그래서인지 국회에서 ‘강기갑 의원실 보좌관들 본 좀 받아라’는 이야기들이 많아 다른 의원실 보좌관들이 많이 피곤했다 하데요.”

자연스레 농민의 길을 선택하다

-(벽에 걸려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이 분이 아버지신가요?

“네. 그렇습니다.”

-언제 돌아가셨습니까?

“2006년도에 돌아가셨네요.”

-아버지도 원래 농민이셨습니까?

“네. 제가 아버지의 영향을 엄청 많이 받았는데, 아홉 살 때부터 남의 집 머슴살이를 가셨고, 92세에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실 때까지 꿈속에서 농사를 지으시다 돌아가셨으니까….”

-아주 성실한 분이셨군요.

“아홉 살 때부터 한 20년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셨죠. 이후 구루마를 사서 끌다가, 가마니 틀 이런 걸로….”

-아버지 고향도 원래 사천인가요?

“예. 아버지도 이 마을에서 태어나셨죠. 할아버지도 여기서 나셔셔 여기서 돌아가셨고….”

-어머니는요?

“어머니는 진양군(현 진주시) 금곡면 출신인데, 제가 1971년 고등학교 졸업하고 농사 막 지을 때, 1978년도에 돌아가셨죠.”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가지 않고 농사를 짓겠다고 하신 건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나요?

“그렇죠. 우리 형제가 4남 4녀, 팔남매인데, 제가 그 중에서 일곱째입니다. 제 큰 형님은 저에게 농대를 가라고 권유했는데, 제가 해군사관학교를 응시해 떨어졌어요. 그 후 집에서는 공무원이나 상업 쪽으로 나가보라 했지만, 제가 농사를 짓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결심하면서 산을 하나 구입을 했죠.”

-그 때 무슨 돈으로요?

“그 때는 우리가 논도 있었고, 정미소를 하고 있었죠. 아버지가 그 땐 자수성가를 하셨을 때죠. 아버지는 결혼 후에도 계속 머슴살이를 하셨는데, 어머니가 누님들 낳으시고 혼자서 애들 키우고 사시다가 도저히 안 되어서 (머슴살이를) 그만 두시고 가마니 틀을 사서 죽자 사자 일을 하셨죠. 그걸로 어느 정도 성공하시고 구루마를 사셨어요. 옛날에는 구루마에 소 한 마리 있으면 그게 아주 큰 경제수단이었죠. 새벽 세 시에 일어나 아침 먹고 구루마에 나무 싣고 쌀 싣고 고성 통영 진주 하동까지 다니셨어요. 소는 싸움소와 부랑한 소만 사셔서…. 그런 소가 힘이 좋거든요. 새벽에 나가서 밤 열한 시, 열두 시에 집에 돌아오실 정도로 정말 성실하게 일을 하셨죠. 그렇게 돈을 벌어가지고, 보리타작할 때 쓰는 발동기를 샀어요. 당시까지만 해도 도리깨로 보리타작을 할 땐데, 그런 기계로 하니까 엄청나게 인기가 좋았어요.”

-그걸로 또 돈을 버셨군요.

“그렇게 돈을 벌어 정미소를 이 마을에다 차렸어요. 정미소로 또 돈을 벌어 논을 열 마지기인가 샀어요. 그리고 그 전에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정리할 때 700평 쯤 되는 산을 세경으로 받아온 게 있었죠. 그걸 아버지랑 형님이랑 온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논으로 개간을 했는데, 그것까지 다 팔아서 새로운 논을 샀고, 내가 농사를 짓겠다 했을 때 다시 산을 하나 사서 내가 개간에 나선 거죠.”

-고등학교 졸업할 나이 때면 대개 좀 폼나는 일을 하고 싶어 했을 텐데, 왜 농사를 짓겠다고 했나요?

“아버지 영향이죠. 농업이라는 게 냄새 배이듯이 저한테 배였던 것 같아요.”

-혹시 공부를 못해서 그랬던 건 아닙니까?

“해군사관학교 시험 쳐서 떨어졌으니까 공부를 잘하진 못했겠죠.”

-초등학교, 중학교는 어디 나오셨습니까?

“사동초등학교라고 바로 두량리 쪽에 있었는데, 여기서 2km 정도 됩니다. 지금은 폐교됐습니다. 중학교는 사천중학교 나왔죠.”

-학창 시절은 어땠나요? 공부가 재미있었나요?

“중학교 땐 그냥 평균 정도였는데요. 사실 공부보다는 좀 난하게 학교를 다닌 편이었죠.”

-난하다는 뜻은? 불량학생이었다는 겁니까?

“음. 친구들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고 신해원이라고 고아원 아이들과도 자주 어울리고…. 읍에 좀 껄렁한 애들이 있었지만 그 애들과 뭉쳐 다니진 않았어요.”

-인터넷 검색하다 보니 중학교 친구라는 분이 강 의원님에 대해 올려놓은 글이 있더군요. 싸움을 잘 하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깡다구가 있었다고 써놨더군요.

“(웃음) 그 친구가 보건복지부 기획실장까지 했던 친굽니다. 중학교 동기죠. 촌에서 농사짓고 컸으니까 깡다구는 다들 있죠.”

-8남매 형제들은 지금 다들 뭐하고 계십니까?

“큰 형님은 돌아가셨고, 큰 누님도 돌아가셨고, 둘째 셋째 넷째 누님은 살아계셔요. 둘째 누님은 사남면에서 농사짓고 계시고, 셋째 누님은 제갑생 전 사천시의원의 아내로 계시고, 막내 누님은 수녀로 계시죠. 제 위의 형님 한 분은 대구에서 주물공장을 착실하게 하고 계십니다. 동생은 바로 내 농장 옆에서 사슴 사육과 감나무 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를 존경하신다던데, 성실함 말고 또 어떤 면을 존경하시나요?

“아버지는 아홉 살 때부터 머슴살이를 하셨으니 초등학교도 못 가셨죠. 다들 법 없이도 살 분이라고 했습니다. 술 한 방울도 못 마셨고, 콜라 한 잔 마시면 업혀서 오실 정도였으니까.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나쁜 말을 절대 안 하시는 분이었죠. 그러나 한 번 어떤 목표를 세우면 어떤 일이 있어도 관철시키는 분이셨어요. 당시만 해도 곡괭이와 삽으로 논을 개간할 때인데, 그런 논을 엄청나게 개간했으니까요. 제가 가르멜수도원이라고 거기서 수도생활을 7년 몇 개월 했는데, 봉쇄수도원처럼 엄격했어요. 영하 9도 이하로 내려가지 않으면 보일러를 때지 않는 곳이었으니까. 그 때 조금 마음이 나태해지더라도 우리 아버지 생각하면 벌떡 일어나 마음을 다잡을 정도였으니까. 아직까지 우리 아버지만큼 존경하고 본받아야 겠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어요.”

-강 의원님도 술은 잘 못하시죠?

“한두 잔이죠. 요즘은 많이 늘었다는 게 두세 잔.”

-가톨릭은 바로 위 누나 영향으로?

“네 그렇습니다. 경상대학교 김수업 교수님이 제 이종형님인데, 누님이 그 교수님 영향을 받아서 가톨릭을 알게 되고 영세를 받고 수녀원에 가시게 됐죠.”

-누나가 수녀원 가실 때 아버지는 반대 안했습니까?

“반대 많이 하셨죠. 난리가 났었습니다. 좋은 혼처도 많이 들어왔는데 다 뿌리치고 가셨죠. 그런데 그 후 아버지도 영세를 받으셨죠.”

-강 의원님은 1973년에 세례를 받으셨죠?

“저보다도 더 잘 알고 계시네요. 나는 연도까진 잘 기억 못하는데….(웃음)”

한국의 진보, 비판할 자격 잃었다

-그러고 나서 76년부터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셨는데.

“그렇습니다. 그 당시 임상엽 신부님이라고 그 신부님이 사천본당에 와 계시면서 마산교구 경남지도신부를 하셨어요. 그 신부님에게 교육을 받고….”

-저는 의원님이 농민운동 하실 때 연단에서 연설하는 걸 보고 알게 됐는데, 상당이 어렵고 복잡하고 관념적일 수도 있는 이야기를 굉장히 쉽고 단순하게 풀어서 하신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그렇게 어려운 걸 쉽게 풀어 이야기하려면 공부를 굉장히 많이 하셔야 하지 않나요?

“학문을 하시는 분들은 이론을 통해서 현실을 보게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론보다는 실제 현실을 통해서 먼저 알고 있잖아요. 특히 농업 농민의 현실은 그렇죠. 그래서 그렇겠죠.”

   

-농사짓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의원님처럼 그렇게 조리 있게 이야기하진 못하잖아요.

“허허허. 모르겠어요. 학교 다닐 때 소설이나 만화를 많이 봤는데, 그런 영향인가?”

-가톨릭농민회 활동하면서 거기서 체계적인 공부가 있었나요?

“가농에서도 공부 많이 하죠. 유인물도 써야 하고, 그 때 신문에 칼럼도 썼는데….”

-우리 경남도민일보에 칼럼 쓰셨잖아요.

“아. 그랬었죠.”

-지금도 농민운동과는 계속 관계를 하고 있나요?

“네. 제가 경남도연맹 의장을 했으니까 며칠 전에도 지도위원들과 집행부 간에 간담회가 있었는데, 거기도 가고, 한 달에 한 번 정도씩은 그런 모임들을 하고 있습니다.”

-권영길 전 의원은 ‘평등 평화 통일 운동’을 다시 하겠다면서 새로운 단체를 만들고 계시던데, 의원님도 다시 본격적인 운동을 해보실 생각은 없습니까?

“국회의원도 사실은 농민운동의 연장에서 한 것이고, 이제 다시 농촌으로 왔으니까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뭐든지 해야겠죠.”

-국회의원을 두 번 하셨는데, 한국 국회의 문제가 뭐든가요?

“대한민국 국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물이 아래로 흐르듯이 밑바닥의 절박한 사람들을 위하고 양극화를 해소하는 게 국회의 역할인데, 이 양반들은 당선만 되고 나면 재벌들, 부자들 옆에 붙어서 양극화를 오히려 심화 확대시키는데 앞장서 왔지 않습니까. 이게 국회의 문제거든요. 선거 때는 다들 서민들을 위해 일하겠다고 하지만, 막상 국회에 들어 가보면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그게 국회의원의 몹쓸 병이라고 하죠. 사실 국회의원이 되면 장·차관들도 모두 머리 조아리고 모두들 떠받들기 때문에 거기에 도취되면 자기 주장이 다 옳고 자기 말이 최고인 것처럼 착각하게 되죠. 자기 모순이나 잘못을 누가 지적해주는 사람도 없죠. 우리야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지만, 국회의원들이 대부분 풍족한 사람들이잖아요. 심지어 우리처럼 운동하던 사람도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벽이 딱 생겨버려요. 그게 문제죠.”

-저희 신문에 칼럼도 다시 좀 쓰시죠.

“허허허. 할 말은 많지만, 자칫하면 그게 주제 넘는 주장이 될 수 있고…. 그리고 이번에 당 사태를 겪으면서 참 부끄럽더라고요. 진보라는 사람들이 정작 자기 문제에 있어서는 내편이냐 아니냐에 따라서 적을 만들고, 이게 과연 진보냐 이런 반성을 참 많이 했어요. 정파적 패권주의가 문제죠. 정파라는 게 진보일수록 좀 강할 수는 있는데, 그게 상식과 인격을 벗어나면 독이 되는 거거든요. 그런 모습을 국민에게 너무나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 아닙니까? 그래서 이젠 바깥을 향해서 이게 옳다 그르다 하는 이야기 자체를 부끄러워서 할 수도 없어요. 그런 자격을 잃어버렸죠. 제가 좀 그런 심정입니다. 그 이전엔 제가 누구보다 이명박 비판을 많이 했는데, 우리 당 사태 나고 난 뒤에는 그런 문건이 올라오면 다 내가 잘라버렸어요.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그럴만한 자격이나 명분이 있느냐. 지금은 근신하고 자기쇄신 쪽으로 집중해야 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합니다.”

노총각, 14살 연하와 사랑에 빠지다

-88년인가? 농촌총각 결혼대책위원회(결대위)는 왜 만들었던 겁니까?

“오늘 인터뷰가 찐하네.(웃음) 당시 제가 가톨릭농민회 경남연합회장을 맡고 있을 때였는데, 군사독재 시절이었어요. 당시 미국 기초농산물 수입 선포를 했어요. 그래서 각 도연합회에서 몇 사람씩 차출해서 몇 년씩 감옥 갈 각오를 하고 미 대사관 앞에 가서 쌀 조 고추 등 농산물을 갖고 가서 뿌리고 시위를 했어요. 군사정권 시절이었으니까 15분 만에 다 경찰에 잡혀갔어요. 유치장에 들어가서 보니까 잡혀온 사람들이 대부분 결혼을 안 한 사람들이었죠. 정광훈 의장만 제외하고 다 총각이었죠. 당시 장가 못간 농촌 총각들이 자살도 많이 했는데, 그 문제를 유치장에서 논의했어요. 이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농업 농촌 농민문제이고 사회적 문제다. 조직화를 하자. 감옥 살고 나가면 사회적 문제를 이슈화해서 풀어보자. 그렇게 언약을 한 거죠. 그런데 당시 야당 의원들이 나서서 우리가 훈방이 되었어요. 나오자마자 대전 가톨릭회관에 모여서 바로 대책위를 만들자 했어요. 그래서 결대위를 만들면서 ‘결혼하기 전에는 머리와 수염을 깎지 않는다’고 결의하여 그 때부터 수염을 기르게 됐죠.”

   
  '결대위' 시절 사진.  

-그 때가 30대 후반이었죠. 38세쯤 되었겠네요.

“그럴 겁니다.”

-결대위 사무실은 어디에 두었나요?

“당시 이부영 씨 등이 주도하던 전민련 광화문 사무실 지하에 전농련이라고 전국농민운동연합 사무실이 있었어요. 처음엔 거기에 방 하나를 빌려가지고…. 거기 있다가 결대위가 커지니까 대치동 쪽으로 갔다가 나중엔 신림동 쪽으로 이사를 했죠. 순식간에 총각 회원들이 500명이 모였으니까.”

-그러면 당시 결대위원장으로서 거의 서울에 상주했겠네요.

“그랬죠. 거의 서울에서 상근을 했죠.”

-운동을 전업으로 했다는 얘긴데, 뭘로 먹고 살았습니까?

“회원들이 회비를 냈고, 거기서 상근하면서 밥을 해먹었죠. 밥을 다 해먹을 수 있는 사무실 구조였어요.”

-총각 회원들이 회비를?

“후원회원도 모집했죠. 당시 정치인들도 후원회원으로 많이 가입했는데, 노무현 대통령도 거기서 만났죠. 후원회원으로서 결대위를 방문했었죠.”

   
  '결대위' 시절 사진.  

-부인도 거기서 만난 거죠.

“당시 총각들이 전화를 받으니까 아가씨들이 부끄러워서 끊어버리더라고. 그래서 여자 간사를 구해야겠다 싶었죠. 그러나 구할 수가 없었죠. 그러던 중 지금의 아내가 선배언니를 통해 우연히 전농련 사무실에 왔다가 우리 결대위에 합류하게 됐죠.”

-그 때 부인이 몇 살이었죠?

“20대 땐데, 나와 나이 차이가 많이 납니다.”

-몇 년생인데요?

“내가 53년생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론 51년생이니까 나와 열네 살 차이인가?”

   
  '결대위' 시절 사진.  

결국 부인 박영옥 씨를 불렀다. 결대위에 합류하게 된 계기와 둘이 결혼하게 된 과정을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혹시 처음 결대위에 합류할 때 강 의원님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아닙니까?

“(웃으며) 아니요.”(박영옥)

“그 때 나를 아버지처럼 대했는데 뭐. 지금보다 수염도 훨씬 길었고….”(강기갑)

-어떻게 해서 결대위에 합류하게 되었나요?

“당시 저는 컴퓨터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제 선배언니의 신랑될 분과 아는 분이 전민련에 있었고, 컴퓨터가 고장 났다고 해서 고쳐주러 갔다가 그런 곳(결대위)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고, 농촌 총각들이 너무 불쌍해보여서….(웃음) 그래서 후원회원으로 가입했죠.”

   
  박영옥 씨./김구연 기자  

-그랬다가 간사로 들어가게 된 계기는?

“농번기가 되니까 다들 농촌 총각들이 농사지으러 가야하고, 그래서 사람 구한다고 해서…. 흐흐흐흐.”

-그래서 잘 나가던 컴퓨터 회사도 그만두고?

“(웃음) 집에선 쫓겨날 뻔 했죠.”

-원래 고향도 서울인가요?

“네.”

-그러다가 강 의원과 눈이 맞으신 건?

“활동을 하다가 2년쯤 되었을 거예요. 여성이 호감을 가질만한 인상이 아니었거든요. 머리도 길고 수염도 그렇고, 청학동에서나 볼만한 사람을 여자들이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그런데 같이 생활하다 보니 배울 점도 많고,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 싶더라고요. 저도 그 때 가톨릭이었거든요. 꼭 예수님 보는 그런 느낌이었어요. 그래서 관심이 갔고, 또 푸근하고 자상하고…. 지금은 안 그런데….(웃음)”

-누가 먼저 접근한 겁니까?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지만 말은 우리 아저씨가 먼저 꺼냈죠. 그런데 이 분은 로마로 들어갈 분이었거든요. 그 때 2월에 수사로 들어가야 하는데, 본인은 고민이 많았겠죠. 저는 간사니까 아침에 성경공부도 같이 하고 미사도 함께 다니고 하면서 그게 사랑인지 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이상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아요.”

-그 감정을 확인한 계기는?

“책상을 정리하던 중 무슨 노트에 글을 써놓은 걸 봤는데, 어떤 여자 분을 사모한다는 내용이 있었어요. 주님! 제 길을 어쩌고 저쩌고 그런 게 적혀 있었는데, 그게 저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그런데 비오는 어느 날 서울대 근처 우리 집까지 데려다 준다고 하면서 따라왔어요. 그날도 라디오방송 인터뷰가 잡혀 있었는데 시간이 좀 남는다고 차를 마시자고 하데요. 그런데 나이 많은 사람하고 뭐 할 얘기가 있나요? 그 때 뭔 이상한 말씀들을 하시더라고요. 그 후 제가 의논할 일이 있어 전화를 하여 서울대 캠퍼스 벤치에 앉았는데, ‘박 간사. 내가 니를 사랑하는 줄 몰랐더나’ 하더라고요. 그 때가 처음 고백이었죠.(웃음)”

-그래서 자연스레 연애를?

“일반적인 연애 그런 건 못했고…. 이 사람도 수사로 로마에 가기로 되어 있고, 우리 집에서도 거의 도둑놈 취급을 하면서 반대했고 참 힘든 일이 많았죠.”

-지금은 그 때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이, 그럼요.”

-몇 년도에 결혼하신 거죠?

“91년 5월.”

   
  결혼 사진.  

-그 때문에 ‘강기갑이가 결혼대책위 만들어서 자기만 결혼해버렸다’는 말도 나왔잖아요. 그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이야기했죠?

“그건 그 분이 모르시고 이야기한 거죠. 저희가 서른두 번째 쌍이었어요. 우리 결혼하고 나서 우리 집에도 오셨는데.”

다시 강기갑 전 의원이 끼어들었다.

“대통령 되고 난 뒤 경남에 간담회 하러 오셔서 농담으로 한 말을 사람들이 진짜처럼 받아들여서…. 원래 결혼을 하면 위원장직을 그만두도록 되어 있었어요. 회칙에 결혼한 사람은 바로 현장으로 가서 농사를 짓도록 되어 있었으니까 갈 수밖에 없었죠.”

-그랬군요. 결대위가 몇 년 동안이나 존속했나요?

“그 뒤에도 계속했죠. 제가 준비위원장과 초대위원장을 맡아 했고, 제가 결혼한 후에도 계속 활동을 해서 121쌍인가 결혼을 성사시켰어요. 나중엔 사단법인으로 등록도 했죠. 그런데 총각은 500명 넘게 회원이 있는데, 갈수록 아가씨 회원이 줄어드는 거예요. 만남 행사를 하면 총각은 40~50명이 오고 아가씨는 10명 남짓…. 그것도 갈수록 줄어들어 결국 자동 해산이 되어버렸죠.”

   
  강기갑 전 의원과 부인 박영옥 씨.  

특별한 ‘밥 따로 국 따로 음양식사법’

-(다시 부인에게) 친정은 어떤 집안이었나요?

“저는 아버지가 사업하시고 어머니는 살림하시고….”

-비교적 유복한 집안이었네요? 친정의 반대를 어떻게 극복하셨습니까?

“집을 나왔지예.(크게 웃음) 그렇게 안 하면 도저히 답이 없었으니까.”

-(다시 강 전 의원에게) 81년에 가르멜 수도원에 들어가셨잖아요? 약 7년 동안 수도원에 계셨는데, 그 때도 종신서원인가 그걸 하시려고 했다면서요?

“종신서원을 조금 앞두고 나왔죠.”

-거기선 왜 나오신 거죠?

“나가라 해서 나온 거지 뭐. 무조건 순명을 해야 하는데, 아닌 건 아니다 하는 고집이 있어서….”

-그런데 결혼할 무렵에 다시 로마로 가는 걸 고민하셨다고요?

“같은 가르멜인데 신부님이 다시 길을 열어준다고 하셔서 가기로 되어 있었는데, 이 사람과 그렇게 되면서 결혼성소를 택하게 된 거죠.”

-어쨌든 91년 결혼과 수도의 길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하신 거네요?

“그랬죠. 그 때도 한 보름 단식을 하면서 수도성소냐 결혼성소냐를 놓고 어떤 게 더 위타적 삶이냐를 고민했죠. 보름을 굶고 고민을 해도 쉽게 판단이 안 서더라고요.”

-이타성이 아니고 위타성?

“다른 사람을 위하는 삶을 말하죠. 위타성이란 사랑인데,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지역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고, 그걸 넘어서면 우주 만물을 사랑하고, 그게 상생이죠. 상생이란 인간만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전 생명체를 사랑하는 것이죠. 거기에 얼마나 자기 삶을 헌신적으로 하느냐가 중요하죠.”

   

-정치도 그걸 바탕에 두고 해야 한다?

“그렇죠. 부모가 자식들 중에 잘 살고 똑똑한 자식 보다는 못 살고 약한 자식에게 더 사랑을 주는 것처럼 정치도 그래야 하는 거죠. 우리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못 살고 어려운 사람을 챙기는 게 정치여야 하거든요. 부자들, 재벌들만 챙기는 정치는 배신정치죠. 총부리를 거꾸로 들이대는 거죠.”

-지금 자녀가 3남 1녀죠? 큰 아들 주원이는 군대 갔나요?

“지금 여기서 상근 현역으로 근무하고 있어요. 축동면 예비군 중대에서 행정병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간디학교 졸업했죠?

“네. 졸업하고 임동창 국악피아니스트 선생님 밑에서 문하생으로 있다가 군에 입대했죠.”

   
  강기갑 전 의원과 부인 박영옥 씨.  

-둘째 주호는요?

“간디학교 2학년 마치고 나와서 역시 임동창 선생님 밑에 있어요.”

-셋째 소화는요?

“사천여중 2학년 다니다가 학교를 관두고 싶다고 해서 검정고시를 마쳤어요.”

-막내 금필이는 몇 학년인가요?

“지금 초등학교 4학년.”

-자녀교육에 대한 특별한 철학이 있나요?

“그냥 자기들 인생이 행복한 게 중요하죠. 간디학교 보낸 것도 제도권 학교에서 그냥 끌려가기 보다는 자기들 자율성을 더 키워주고 싶어서….”

-한복을 원래부터 좋아하십니까?

“양복이 없습니다. 결혼할 때 해준 양복이 딱 한 벌 있는데 몇 번 입어보지도 못했어요. 결혼도 한복 입고 했죠.”

-한복은 몇 벌이나 있나요?

“계절별로 두세 벌은 있습니다.”

-한복이 불편하진 않나요? 화장실에서 볼 일 볼 때도 그렇고.

“조금 그런 면은 있지만 한복이 정말 편합니다. 용변 볼 때도 입다 보면 요령이 늘게 돼 있습니다. 이렇게 탁 해가지고 요렇게 탁 하면….(웃음)”

-양치질도 죽염으로 하신다고?

“치약에 계면활성제가 들어 있습니다. 그게 굉장히 안 좋아요. 죽염으로 양치질을 하면 잇몸병이 있는 것도 치료가 됩니다. 나는 잇몸병 전혀 없습니다. 김 국장도 해보세요. 죽염으로 하고 나서 물로 헹구지 말고, 그 자체로 치료가 되니까.”(그가 입을 벌려 치아를 보여줬다. 과연 상태가 아주 좋았다.)

-물 따로 밥 따로 식사법을 고수하신다고?

“사실 위액이 음식물을 소화시켜야 하는데, 물과 음식물을 함께 먹으면 그게 잘 안되죠. 음양식사법을 창시한 이상문 선생에게 배운 건데, 그렇게 하면 몸이 정말 달라집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와 이상문 씨가 쓴 <밥 따로 물 따로 음양식사법>(정신세계사)이라는 책을 찾아봤다. 거기에는 ‘식사를 된음식으로만 했을 때 얻는 효과’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다.

·강한 침샘의 작용으로 소화력이 향상된다.

·위액의 분비가 촉진돼 섭취한 음식의 영양분이 완전 흡수, 소화된다.

·저절로 과식하는 일이 없어진다. 설령 과식을 한다 해도 위액이 강하게 작용하므로 소화불량이나 체증으로 고생하지 않게 된다. 음양식사법을 하면 호흡이 자연적으로 깊어져 단전호흡을 하지 않아도 그 이상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다소 변질된 음식을 먹더라도 입 안에서 분비된 침의 살균력과 위에서 분비된 강한 위액의 멸균력이 이를 간단하게 처리한다.

즉 음식을 먹을 때 국이나 찌개, 물 등을 같이 먹게 되면 우선은 배가 부르고 좋은 것 같으나 상체는 호흡이 잘 되는 반면 배꼽 밑 하체는 반대로 호흡조절이 잘 되지 않으며, 이에 따라 심장박동이 잠시도 쉴 수 없어 결국 기혈순환 부족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남은 꿈 “4억 빚 갚는 게 급선무”

-의원 님은 술도 못하고 담배도 안 피우고, 일하는 게 재밌다고는 하지만 제가 볼 땐 무슨 재미로 살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부인 박영옥 씨가 말을 받았다.)

“제가 이 사람 일과를 이야기해드려야겠네요. 요즘은 아이들과 함께 놀아준다고 좀 늦게 주무시지만, 그 전에는 저녁 아홉시 반에 주무시면 새벽 세시 반에 일어나셔서 풍욕이라고 있어요. 30분 동안 옷을 벗고 피부호흡을 시키는 거죠. 그 다음에 기도를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정도 합니다. 그러면 여섯 시 정도 되는데, 그 때부터 트위터나 책 보고, 그리고 아침 드시고, 밥 먹자마자 일을 하죠. 나쁘게 말하면 일중독이죠. 좋게 말하면 굉장히 성실한 거고 한 시를 가만히 있지 못해요. 어릴 때부터 아버님, 어머님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것 같아요. 저는 서울에서 그런 환경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처음엔 불만이 많았죠. 하루 종일 같이 이야기할 시간이 없으니.”

-이런 일과가 결혼할 당시부터 그랬단 말입니까?

“계속 그랬죠. 국회의원 할 때도 집에 오면 일이 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던 사람이니까.”

-텔레비전이나 영화도 안 봅니까?

“영화는 좋아합니다. 그것도 일을 다 해놓고 보죠. 비가 오거나 해서 일을 할 수 없으면 누워서 영화도 봅니다.”

-극장에 찾아가서 보진 않고?

“결혼하고 극장에 간 게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니까. 영화 보러 가고 싶어도 갈 틈이 없지.(웃음)”

-집에선 어떤 영화를 골라보십니까?

“요즘은 텔레비전 영화채널에서 보죠. 어제 저녁엔 인도영화 ‘세 얼간이’를 봤는데 너무 재미있어요. 그거 한 번 보세요. 참 좋습디다.”

-취미는 없나요?

“등산도 좋아하고 여행도 좋아합니다. 그런데 그럴 시간이 없죠. 지금은 농장이 8~9년 동안 관리가 안 되어 가지고 수습하고 정리한다고 여유가 없어요.”

-정치는 그만 한다고 했지만, 진보정의당 행사에는 가끔 가신다면서요?

“그렇죠. 정치 일선에서 총대를 메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진보는 필요하잖아요. 애정은 가지고 있죠.”

-앞으로 남은 인생에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뭐 특별한 게 있습니까? 나는 그냥 농사꾼이니까 농사짓고, 농업 농촌 농민의 소중함, 의미, 가치, 자연 속에서 상생을 가르치는 그런 데서 내가 뭘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그런 거죠. 그리고 제가 정치생활을 하면서 깡패 국회의원, 싸움꾼, 공중부양, 호통 강기갑, 뭐 그렇게 국민들에게 알려져 있는데, 물론 강달프라는 좋은 별명도 있지만, 그건 재야 쪽에서 그렇게 봐주는 거고 일반 국민들에게는 굉장히 부랑한 정치인으로 알려져 있지 않습니까? 제가 국회에서 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고, 국회가 실제 해야 할 역할과 기능이 어떤 것인데 지금까지 어떻게 해왔는지, 앞으로 국회가 어떻게 가야 하는지 그런 내용을 자서전 형태로 내고 싶은 욕심이랄까 그런 생각도 갖고 있죠. 그런데 당장 빚이 너무 많아서 이 빚 다 갚고 나면 죽을 때가 될 것 같아요. 허허허.”

   
  강기갑 전 의원 가족사진.  

-빚이 얼마나 되는데요?

“4억 정도 됩니다.”

-영농 부채입니까?

“영농 부채는 얼마 안 되죠. 이 산을 빚을 내서 샀거든요. 그 때만 해도 이자가 11%가 넘었는데, 당시만 해도 감 가격이 좋았거든요. 그런데 우리가 이 산을 사자마자 감 가격이 떨어졌어요. 그 때 7억 원 넘는 빚으로 시작했죠.”

-2004년 처음 국회 들어가실 때 젖소가 100마리 정도 되었다면서요?

“120두 정도였죠. 그 때 정말 좋을 때였어요. 한 2년만 더 고생하면 빚도 다 갚을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국회에 가는 바람에….”

-오히려 국회로 가는 바람에 경제적으로는 더 어렵게 됐군요.

“그렇게 된 셈이죠.”

-혹시 옛날 젊을 때 사진 좀 볼 수 있나요?

그가 2층으로 올라가더니 낡은 앨범을 몇 권 갖고 왔다. 이 때부터 사진 찾기 작업이 시작됐다. 부부도 그동안 꺼내 볼 기회가 없었던지 사진을 한 장 한 장 보며 신기해했다.

“결대위 때 사진이 더러 있네?”

“이건 그 때 머리 기르고 수염 길렀을 때지. 완전 예수 모습이야. 하하.”

“이건 결혼사진이네. 사진 정리를 좀 해야 하는데, 오늘에야 꺼내보게 되네.”

“참. 새롭네. 여보! 이게 우리 처음 만날 때 광화문에서 그 사진이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마침 상근 현역으로 근무 중인 맏아들 주원이가 퇴근해왔다. 소화만 빠진 가족사진을 찍었다. 행복해보였다. 그러고 보니 인터뷰 내내 그는 행복한 표정이었다. 다만 이 말을 할 때 그의 표정이 가장 어둡고 슬퍼보였다.

“진보진영이 국민들에게 보여준 그런 여러 가지 실망스런 모습들 속에서, 이제는 진보로서 호통 치고 바른 소리하고 그런 자격을 상실했다고 봐야죠. 지금은 자중하고 스스로 성찰하고 반성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헤어지면서 그는 서해성 작가가 기획하고 강기갑·공선옥의 대담을 기록한 <강씨공씨네 꿈>(돌아온 산)이라는 책과 흙사랑농장에서 만든 매실 잼 한 병을 선물로 줬다. 책은 돌아오자마자 다 읽었지만, 매실 잼은 아직 맛보지 못했다. 앞으론 나도 죽염으로 양치질을 해볼까 생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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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 김주완 기자
  •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간 <피플파워> 간행과 각종 출판사업,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 업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