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40 통영별로 6일차 조선 교통 요지 진위, 세원 부족해 역 유치 물거품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던 삼월 삼짇날이 지난 지도 벌써 이레가 되었건만, 도무지 절기를 헤아리기 쉽지 않은 나날입니다. 변덕스런 날씨만큼이나 우리를 둘러싼 정세도 경색되어 요즘은 그야말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말을 자주 되뇌게 됩니다. 그래도 봄은 봄인지라 오늘 여정의 출발점인 이곳 오산 충혼탑 일원에도 어김없이 제 철을 알리는 봄꽃이 만발했습니다.

◇어비천(魚肥川)을 건너다

오늘은 지난 여정에 이어 오산 수청동(水淸洞) 현충탑에서 길을 잡아 잰 걸음으로 남쪽을 향합니다. 현충탑 서쪽 기슭에는 인공폭포가 만들어져 있고 그 위로 수청정이란 이름을 단 제법 큰 정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수청동은 늘 맑은 샘물이 솟아 수청말이라 했는데, 지금은 옛 모습을 살피기 어려울 만치 새로운 도시로 거듭났습니다. 이런 모습은 비록 이곳 수청만 그런 게 아니라 소위 수도권이라 불리는 서울 근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진풍경입니다. 이 때문에 지도에 나와 있는 길이 신도시 건설로 사라져버려 옛길을 찾아 걷는 우리도 내비게이션을 가지고서도 헤매기 일쑵니다.

충혼탑에서 길을 잡아 나서니 옛 이름이 토현천(兎峴川)인 오산천을 건너 오산 중심지로 듭니다. <대동여지도> 14-4에는 토현천으로 적었는데, 그 자매서 격인 <대동지지>에는 어비천(魚肥川)이라 했습니다. 어비천은 용인 처인성 동쪽의 물넘이고개(수유현:水踰峴)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지금의 진위천에 합류되는 내이니 오산천의 옛 이름은 토현천이 맞습니다.

경기도 진위로 들어서는 고개(왼쪽).

◇오산원(烏山院) 오산점(烏山店) 오산장

다리를 건넌 즈음의 둔치는 오산장이 있던 곳이며, <대동지지>에는 오산점(烏山店)이 있다고 나옵니다. 바로 이곳 오산은 조선시대 전기에는 원(院)이 있던 곳입니다. <세종실록>에는 세종 임금 15년 4월 22일 기사에 온양(溫陽) 행궁에서 온천욕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갈 때 오산원(烏山院)에 들렀던 기록이 나옵니다. 그 경로는 내려가는 길에 만나게 될 진위의 장호원(長好院)-직산의 홍경원(弘慶院)으로 이어지는 길입니다. 그러나 이 원집들은 일찍이 쓰임이 다하였는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세종 임금 때 이후로는 이름을 남기지 못합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역원에는 장호원-백현원(白峴院)-갈원(葛院)이 실려 있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그 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이곳에 새로 점(店)이 들어서게 되는데, 그것이 신경준의 <도로고>에 실린 오산신점(烏山新店)입니다. 지금이야 옛 원집이 있던 곳을 헤아릴 길이 없어졌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 기능은 오산점이 대신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갈곶(葛串)을 넘다

옛길은 오산역과 오산시외주차장 동쪽에서 시내를 비스듬히 가로질러 난 밀머리길을 거쳐 원동 고현동을 지나 갈곶으로 향합니다. 고현동을 지나 갈곶 사이의 청호리 청호마을이 옛 청호역(菁好驛)이 있던 곳으로 여겨집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살피면 청호역은 조선 전기에 여러 차례 진위에 두려는 논의가 있었으나, 결국에는 진위로 배속되지 못하고 원래대로 수원부에 속했습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진위가 가진 교통의 요지로서의 지리적 위치에도 그것을 지탱할 만한 세원이 부족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진위가 가진 이러한 교통 요충지로서의 특징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형승에 소개된 하륜의 기문에 '길이 남과 북으로 통한다'고 했고, 서거정의 기문에는 '3도 요충이 되는 곳에 위치했다'고 실렸습니다. 또한 하륜이 지은 객관 중수기에도 '진위는 한길 옆이어서 노력과 비용이 딴 고을보다 갑절이나 된다. 원이 된 자가 진실로 마음을 지극히 쓰지 아니하면, 민생을 편하게 하여 공적을 이룰 수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던 동막고개(소백치)를 넘고 있는 모습.

옛길은 원동주공아파트 서남쪽 모퉁이에서 1번 국도를 남동쪽으로 비스듬히 가로질러 갈곶에 이릅니다. 이곳은 얕은 구릉 사이로 열린 고갯길인데 그 높이가 낮아 재를 넘는다는 느낌조차 없습니다. <여지도서>에 실린 진위현 지도를 보면 이즈음에 연봉치(延峰峙)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갈곶은 남쪽을 이르는 우리말 갈과 고개의 줄임말 곶이 합쳐진 말이니 오산의 남쪽 고개라 그리 불린 것으로 보입니다. 같은 고개를 달리 불렀던 연봉치는 고개 서쪽의 연봉(延峰)에서 비롯한 이름입니다. 얕은 구릉 사이로 열린 고갯길 양쪽에는 농장과 공장이 섞여 어수선한 모습이고, 고개를 내려서면 동부대로를 만납니다.

◇차령(車嶺)

동부대로와 만난 사거리에서 그 서남쪽에 조성 중인 진위일반산업단지 옆길을 지나 가곡리에서 얕은 재를 넘어 진위로 듭니다. 지금은 이름조차 잊혔지만 <여지도서> 진위현 지도에 차령(車嶺)이란 이름으로 실려 있습니다. 차령은 모처의 동쪽 고개를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데, 동녘을 이르는 살·사라를 적기 위해 수레 차와 고개 령의 뜻을 빌려 적은 것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예로부터 교통의 요충지여서 고갯길 주변에 방어시설이 여럿 두어졌는데, 읍치의 동쪽 부산(釜山)에는 오래된 산성이 있고, 연봉(延峰)의 서쪽에도 두 곳에 고루(古壘)를 두었을 정돕니다.

고개를 내려 야쿠르트 공장을 끼고 돌면 진위현 들머리에 있는 견산리 산직(山直)에 듭니다. 마을 이름이 산직인 것은 산지기가 살던 곳에서 비롯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구한말한반도지형도>에는 진위현 바깥에 둔 술막인 외주막(外酒幕)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오산점에서 내리 10리를 걸었으니 컬컬한 막걸리 한 잔이 그리울 즈음이 된 게지요.

◇진위(振威)

예전 같았으면, 술막에서 목을 축이고 다리품을 쉬었다가 다시 신들메를 조여 매고 길을 잡았을 터입니다. 옛 진위현의 중심지는 아직도 고즈넉한 전원의 풍경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옛 고을은 동쪽의 부산을 진산으로 삼아 지금의 진위초등학교 자리에 동헌을 두고, 그 남쪽에 부산정과 객관을 두었습니다만 따로 성을 쌓지는 않았습니다. 옛 자취라고는 향교밖에 남은 게 없어 찬찬히 둘러보고 내를 건넙니다.

지금은 진위천이라 부르지만, 옛 이름은 장호천(長好川)이고 그 상류는 용인 물넘이고개에서 내려오는 어비천입니다. 장호천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진위현 산천에 '현 남쪽 1리 지점에 있다. 물 근원이 둘인데, 하나는 용인 속현으로 되어 있는 처인(處仁) 동쪽에서 나오고, 하나는 옛 양지현 서편에서 나와서 합류한다. 객관 남쪽을 지나 다시 서쪽으로 흘러 수원부 다라고비진(多羅高飛津)으로 들어간다'고 나옵니다.

내를 건너니 이곳이 호랑나빗과에 속하는 꼬리명주나비 서식지임을 알리는 간판이 우리를 맞습니다. 바로 이즈음에도 장이 섰는지 <구한말지형도>에 장터거리(장가: 場街)라 적었습니다. 아마도 이곳 둔치에 둔 장은 앞서 본 오산장이 오산원을 계승한 오산점에서 비롯한 것처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현의 남쪽 2리에 있었다고 한 장호원(長好院)에서 비롯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소백치 대백치를 넘어 갈원(葛院)으로

진위천을 건너니 길 이름이 '삼남길'이라 적혀 있습니다. 장터가 있던 자리를 지나 삼남길을 따라 남쪽으로 두 개의 고개를 넘어 갈원에 이르게 됩니다. 이 두 고개는 옛 이름이 백현(白峴)이었는데, 뒤에 고개를 이르는 현이 치로 바뀌면서 그 높이에 따라 소백치 대백치로 나누어 불렀던 것으로 보입니다.

마산리 안골마을에서 317번 도로(삼남길)를 따라 넘는 고개가 동막고개로 불리는 소백치(小白峙)입니다. 먼저 이 길을 걸은 이들이 남긴 자료에는 얼마 전까지도 동막고개는 원래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삼남길이 개설되면서 옛 삼남대로(통영별로)를 깎아내고 말았습니다. 사정은 대백치도 마찬가지인데, 길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미처 뒤따르지 못하다 보니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곳곳에서 빚어지고 있습니다. 옛길을 지우고 새로 길을 내어 무슨 길 무슨 길이라 하면서 시민들을 위한답시고 지자체마다 법석을 떨고 있으니 이런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니 옛길을 되살릴 생각은 접어 둔 채, 새로 '신 삼남길'을 열어 걷기 열풍에 부응하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겠지요.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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