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박한 풍경에서 찾은 지역 이야기 잃으면서 얻은 것들, 얻으면서 잃은 것들

2012년 6월 1일 함양에서 시작한 '경남의 재발견'을 2013년 3월 29일 창원에서 맺었습니다. 2주에 한 번꼴로 경남지역 18개 시·군을 20회에 걸쳐 소개했습니다. 2012년 5월 11일 자 신문에 '가까워서 몰랐던 우리 지역 이야기가 찾아갑니다'라는 제목으로 쓴 '경남의 재발견' 프롤로그를 통해 몇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정리하면 △지역을 상징하는 것 △지역 생김새 △산업 △풍경·음식 △사람 △역사 등을 담아내겠다고 했습니다. 경남에 대한 '안내'가 아니라 경남에 대한 '이해'를 돕겠다고 했습니다. 10개월 남짓 마음먹고 다가선 경남이 지닌 매력은 늘 기대를 웃돌았습니다. 그 매력을 충분히 전하지 못했다면 이는 취재팀 깜냥 탓입니다.

'경남의 재발견' 에필로그에 어떤 내용을 담을지 고민했습니다. '경남은 이것이다'라고 뽑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어떻게 한눈에 경남이 품은 매력을 정리할 수 있을까. 결국 눈에 들어온 것은 20개 지역 이야기를 시작하는 글머리였습니다. '경남의 재발견'을 정리할 때마다 가장 고민했던 지점, 왜 하필 지역 이야기를 그렇게 시작했는지를 짚으면 경남이 지닌 매력을 몇 가닥으로 엮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이제 풀어놓습니다.

'경남의 재발견' 첫 이야기는 함양군 백전면 오천리 '매치마을'에서 시작합니다. 경상남도 함양군과 전라북도 남원시를 모두 품은 마을입니다.

함양은 경남에서 유난히 영·호남 경계가 옅은 곳입니다. 신라·백제를 고장 이름 앞에 번갈아 붙이던 역사, 지리산·덕유산이 조화롭게 감싸는 땅 생김새, 음식에 밴 손맛이 그렇습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영·호남 말씨가 분명히 갈리되 삶은 경계가 없는 매치마을. 이곳이 함양이 품은 매력을 은유한다고 여겼습니다. 대부분 눈여겨보지 않는 소박한 마을이야말로 함양 이야기를, 경남 이야기를 풀어나가기에 그럴듯한 곳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밀양시 삼랑진읍 '작원관지(鵲院關地)'가 또 그런 곳이었습니다. 한적한 곳에 외롭게 서 있는 옛 관문에서는 경부선·경전선 철길, 낙동강, 대구·부산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였습니다. 예부터 영남지방 동서남북을 잇는 교통요지라는 이곳 사람들 자랑에는 과장이 없습니다. 더불어 임진왜란 때 조선 사람 700명이 왜군 1만 8000여 명에 맞서 버텼다는 역사에서 밀양 사람 기질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작원관지는 교통요지 밀양, '호투쟁(好鬪爭)'이라는 여기 사람 성정을 엮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지리산이 품은 땅 산청을 다녀오고 오랫동안 남은 인상은 산자락 곳곳에 걸친 조각구름이었습니다. 밖에서는 드물지만 이곳에서는 흔한 풍경을 마주친 곳은 금서면에서 삼장면으로 넘어가는 길에 있는 '밤머리재'입니다. 그리고 고개를 넘어 삼장면을 지나 닿은 곳이 시천면입니다. 영남을 대표하는 유학자 남명 조식(1501~1572)이 말년을 보낸 곳입니다. 경남을 대표하는 명산 지리산과 영남 사림을 대표하는 이름 높은 선생을 묶을 수 있던 곳에서 산청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의령은 처음 찾았을 때 그 매력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곳으로 기억합니다. 풍경이나 음식, 옛 흔적 등 그 자산이 없지는 않되 빼어난 무엇인가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매력적인 자산들을 찾기까지 시간이 걸렸던 의령에서 이야기 가닥을 뽑은 곳은 한우산 정상입니다. 의령에서 두 번째로 높은 산에서 보이는 것은 눈 닿는 데까지 이어지고 두루 퍼진 봉우리들이었습니다. 눈에 띄는 마을이나 들판은 함안 것이고 창녕 것이었습니다. 의령 봉우리에서 의령이 보이지 않았던 셈입니다. 마주치고 겪으면서 다가서야 수줍게 매력을 드러내는 의령. 이 땅이 경남 사람과 유난히 닮은 무뚝뚝한 고장이라는 생각을 한 게 그때입니다.

통영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이야기는 '통제영'입니다. '통영(統營)' 이름부터 이곳에 남아 있는 유·무형 자산 대부분이 400여 년 전 들어선 '삼도수군통제영(三道水軍統制營)'에서 비롯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통제영만으로 늘 여유롭고 발랄한 통영 유전자를 설명하기에는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찾아낸 곳이 '욕지도(欲知島)'에 있는 패총, 즉 조개무지 흔적입니다. 선사시대부터 현재까지, 뭍에서부터 멀리 섬까지 통영은 풍요로운 자연이 늘 넉넉한 삶을 거들었던 곳입니다.

   

사천 이야기를 서포면 비토섬에서 시작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입니다. 삼천포항 활기와 항공산업 거점이 된 사천 동부지역에 대한 자랑은 흔히 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듭 생각해도 사천이 품은 매력은 서쪽 섬과 갯벌이었습니다. 사천이 경남에서 가장 넓은 갯벌을 품은 땅이라는 점, 그리고 그 갯벌을 여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게 오래되지 않았다는 점도 사천 서부지역이 품은 매력을 기어이 앞세우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창녕 이야기는 옥천리 관룡사 뒤에 있는 봉우리인 '용선대'에서 시작합니다. 관룡산과 영취산, 쌍교산이 감싼 옥천리 마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자리입니다. 눈을 돌리면 서북쪽으로 멀리 화왕산 자락까지 펼쳐집니다. 하지만 창녕 이야기를 의젓한 산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더 큰 자산인 물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였습니다. 창녕 서·남쪽을 감싸며 흐르는 낙동강, 유명한 부곡온천, 나라 안에서 최고라는 내륙습지 우포늪까지 보듬은 창녕이 내세울 자산은 산줄기보다 물줄기라고 여겼습니다.

   

'4대 강 사업' 공사 현장을 가장 처음 마주친 곳이 양산입니다. 양산 원동면·물금읍·동면을 지나는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자전거 도로는 주변 풍경과 더불어 그럴듯했습니다. 하지만 낙동강 사업은 원동 딸기·수박·매실 이름을 잊게 했습니다. 양산은 이른 개발로 부유한 도시가 됐지만 동시에 빼어난 자연을 잃어 고민하던 지역이기도 했습니다. 공단이 들어서면서 시커멓게 변한 양산천이 도심 휴식처로 되살아난 지는 얼마 되지 않습니다. 자연과 사람, 개발과 보존을 조화롭게 이루는 것은 오늘날 양산시가 풀어야 할 큰 과제입니다. 그 지점에서 과거와 오늘, 미래를 엿보고자 했습니다.

고성은 경남에서 가장 깨끗한 바다를 길게 낀 곳으로 기억합니다. 고성 해안선에는 당연히 있음 직한 어촌이 매우 드물었습니다. 수심이 얕아 큰 어장을 이루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다고 어설픈 위락시설이 들어서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지형과 근해 양식업 탓에 그럴듯한 해수욕장도 조성된 곳이 없습니다. 그다지 쓰임새가 없었던 바다는 덕분에 손때조차 타지 않은 바다가 됐습니다. 그리고 그 깨끗한 바다가 오늘날 고성이 내세우는 자랑거리입니다.

   

마산은 바다를 내주고 메운 땅 위에서 덩치와 살림, 자존심을 키운 도시로 읽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마산지역 도시계획 상당 부분 역시 바다를 메우는 작업에서 시작합니다. 이 때문에 바다와 가까운 도시 마산에서 실제로 바다는 가깝지 않습니다. 게다가 물밑이 훤히 보일 정도로 맑은 바다를 볼 수 있는 곳은 훨씬 귀합니다. 차고 넘치는 마산 자랑 속에서 바다만 쏙 빠지는 이유입니다. 이에 대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는 귀산동 '마창대교' 아래서 마산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