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주관적 판단을 '이렇다 저렇다'는 식으로 단정 지은 걸 가리켜 '단언명제'라고 한다. 예를 들어 "<경남도민일보>는 좌파 언론이다" 같은 경우가 그에 해당된다.

누군가와 얘기할 때 상대가 그런 표현을 남발할 경우 마땅히 '근거는?'이란 의문을 던지게 된다. 선뜻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다행히 그가 그럴듯한 근거를 제시하며 설명할 때 비로소 본격적인 토론, 즉 '설득을 위한 논쟁'이 시작된다. 그렇지 않을 땐 어김없이 '언쟁'으로 이어진다. 토론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우리네 서글픈 자화상이라고나 할까.

글을 쓸 때도 마찬가지다. 학생들이 쓰는 논문을 예로 들자. 그런 글들은 특정 주제와 관련된 '자기주장'을 가설로 설정해 그 주장이 참이라는 걸 증명하는 게 목적이다. 당연히 설득력이 생명이다. 그럼에도 피드백을 할 때 가장 많이 쓰게 되는 말이 바로 '근거는?'이다. 이론적 근거와 적절한 사례 제시 없이 단언명제로 일관하는 글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고민과 성찰 없이 암기만 강요해 온 우리네 교육의 어두운 단면이랄까.

바야흐로 SNS시대, 우린 수많은 토론 속에 살고 있다. 말로 하든 글로 하든 세상의 모든 토론은 의견의 교환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견은 판단의 결과물이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판단보다 반응이 훨씬 우선인 게 현실이다. '빠름, 빠름'을 노래하는 광고에서 보듯 속도가 가장 큰 미덕인 시대이기 때문이다.

영화 <다우트>의 한 장면. 칼로 찢은 베개 속 깃털이 흩날리고 있다.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건 속도다. 거기다 굳이 몰라도 될 일들마저 알아야 한다. 어쩌다 인터넷에서 화제가 된 사건을 놓쳤을 때 '아직 그것도 몰라?'란 말을 듣기 일쑤 아닌가. 모르는 것도 죄악이지만 '아직' 모르는 게 더 큰 수치인양 추궁 받는다. 그러니 일단 반응부터 하고 보는 거다. 더 심각한 건 그 반응 대부분이 지나친 자기 확신, 즉 단언명제란 점이다. 진짜냐고 물어보면 '지금 인터넷이 난리'라는 공허한 얘기만 듣게 될 뿐이다.

가장 쉽게 맹목에 빠질 수 있는 종교에서마저 가장 훌륭한 믿음의 태도는 의심이라 했다. 영화 <다우트>(Doubt)를 예로 들자. 어느 날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을 험담한 여인이 고해성사를 하러 왔고 신부는 그녀에게 옥상에 올라가 칼로 베개를 찢게 했다. 어떻게 됐느냐는 신부의 물음에 그녀는 온 사방으로 깃털이 날렸노라 답했고 신부는 다시 그 깃털을 모두 담아오라 했다. 여인이 바람에 날려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고 얘기하자 신부는 남에 대한 험담이 그렇다고 말한다. 판단하지 않고 반응만 하며 모든 것을 너무 쉽게 확신해버리는 우리네 인터넷 문화에 갖다 대면 너무 과한 걸까.

만우절 새벽 페이스북에 현 정부의 창조경제 성공에 앞장서고자 집권여당에 입당하겠다는 글을 쓴 적 있다. 잠시 댓글만 봤어도 장난이란 걸 알 수 있었음에도 친구 삭제한 사람이 여섯 명이나 됐다. 충격이었다. 한 번 의심해 보는 게, 반응하기 전에 확인부터 해 보는 게 그리 어려운 걸까. 누군가 지적했듯 인터넷 공간은 무차별적 '사고(思考) 전염'이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특히 저주와 증오 같은 감정들의 전이가 가장 빠르다고 하니 그 같은 감정에 기댄 단순반응에 얼마나 관대했던가 돌이켜보게 된다. 바라노니, 확신하고 있는 것들을 의심해 보는 건 어떤가. 영화 속 신부는 말한다. "확신만큼 강력하고 지속가능한 힘을 발휘하는 게 의심입니다."

/김갑수(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외래교수)

이번 주부터 (주)라디오21 전 대표이자 민주통합당 창원의창구 지역위원장을 지낸 김갑수 씨가 '문화 읽기' 칼럼 필자로 참여합니다. 기존 고동우 문화체육부장과 격주 단위로 연재를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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