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직업은 사진사였다. 엄마와 결혼 당시는 사진사가 지금의 컴퓨터 프로그래머만큼이나 첨단의 직업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세상은 빠르게 변해갔다. 개인 카메라가 보급되면서 사진사라는 아버지의 직업은 속절없이 낡고 말았다.

그러다보니 여섯 남매의 맏이인 언니는 많은 희생을 강요당해야 했다. 언니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림 대회에 나갔다 하면 상을 휩쓸었다. 게다가 시골 중학교 출신으로 마산 제일여고 학생회 간부까지 할 만큼 통솔력이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재주가 아니라 형편이었다. 동생들을 위해 언니는 대학을 포기했고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부터 직장 생활을 하며 어린 나를 책임져야 했다.

언니와 함께 자취를 하던 때의 일이다. 마침 월급날이었는데 언니가 퇴근길에 강도를 만났다. 칼을 들이대며 돈 내놓으라는 그 강도에게 언니는 겁도 없이 '오늘 월급날이어서 돈은 있는데 이 돈 다 주고 나면 동생과 한 달 동안 굶어야 한다'고 매달렸던 모양이다. 결국 강도는 월급 중 5만 원만 내놓으라고 했다 한다. 그 돈을 빼앗긴 언니는 두려움보다 한 달을 어떻게 살지 더 걱정했다. 이런 사정도 모르고 나는 샴푸랑 치약 좀 좋은 것 쓰자며 철없이 조르곤 했다.

형부와 9년여의 열렬한 연애 끝에 결혼을 한 언니의 결혼식에서 축시를 읽으며 나는 그 시간들이 생각나서, 열아홉 살 때의 어렸던 언니에게 미안해서 참 서럽게 많이 울었다.

결혼 후에도 한동안 언니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재주 많고 마음 넓은 언니가 왜 그렇게 어렵고 힘들게 사는지 언니 집에 갈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언니가 마산 구산면 수정의 야산에서 컨테이너를 놓고 가축 키우며 살던 때, 빨래를 개는데 뱀이 빨래 속에 똬리를 틀고 있더라는 말을 들은 날은 가슴이 무너졌다. 수도도 없고 난방도 안 되는 집에서 겨울 내내 감기를 달고 살던 어린 조카들을 보는 마음은 또 어땠는지.

하지만 언니는 가난에 주눅 들지 않았다. 언제나 씩씩하게 일하고 큰소리로 웃었다. 창고 같은 컨테이너도 언니의 손길이 가면 미술관처럼 변했다. 봄이면 아이들과 진달래 화전을 부쳤고 두릅을 삶아서 맛난 밥을 차려 우리를 불렀다. 우리의 기쁜 일을 함께 즐거워해 주었고 슬플 때는 우리보다 먼저 울어주었다. 문제가 생겼을 때 늘 마음으로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언니였다.

이제 언니는 그 솜씨와 넉넉한 인심으로 창원공단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아직까지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 시장으로 향하는 고단한 생활이지만, 식당을 찾아오는 손님을 귀하게 여기며 맛난 밥으로 배고픈 세상을 달래고 있다.

   

나는 잠시 틈이 나면 자주 언니의 식당에 들른다. 그곳에 가면 넉넉한 언니의 밥에 배가 부르고, 이제 정말 좀 살 만해진 언니의 형편에 마음이 부르다. 밥값은 언제나 이 한 마디.

"언니야, 사랑해."

/윤은주 (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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