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 재발견-창원] 공업도시 속에서도 '날것의 감성'을 품고 있구나

우리가 잊고 지낸 계획도시·공업도시 창원의 이면

창원시 의창구 소계동에서 성산구 불모산동까지 쭉 뻗은 도로는 일직선이다. 길이 13.8㎞에 왕복 8차로. 나라 안에서 가장 긴 직선 도로 이름은 '창원대로(昌原大路)'이다. 굽은 데 없는 길은 이 도시가 도로를 먼저 깔고 도로를 중심으로 만들어졌음을 보여 준다. 

아닌 게 아니라 창원은 해방 이후 이 나라 정부가 작심하고 만든 첫 도시, 이른바 '계획도시'다. 1970년대 초 나라가 살길을 중화학공업에서 찾은 정부는 산업을 거창하게 일으킬 땅을 찾는다. 산으로 둘러싸인 넓은 들판을 품은 창원은 그럴듯한 땅으로 지목됐다. 오늘날 번듯한 도시는 땅을 밀고 주민을 옮기면서 그 기반을 닦았다. 창원대로는 허허벌판을 국가 산업 전진기지로 만드는 시발점이자 기준선이었다. 창원은 창원대로 남쪽을 공단, 북쪽을 주거지역으로 삼으면서 도시 모양새를 갖췄다.

창원대로와 더불어 이 도시가 면밀한 계획에서 나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은 창원광장(의창구 용호동)이다. 지름 210.8m, 둘레 661.9m, 면적 3만 4900㎡인 이 원형 광장에도 '국내 최대'라는 수식이 붙는다. 광장을 둘러싼 도로는 6차로이며 남북으로 '중앙대로', 동서로 '원이대로'가 이어진다. 광장 주변은 창원시청과 대형마트, 백화점, 은행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대로 양끝에 있는 경남도청과 한국산업단지공단 일대까지 묶으면 창원을 넘어 경남 행정·산업·문화·금융·유통 중심지는 이곳이 된다.

국가산업 전진기지

창원 의창·성산구 면적(293.3㎢) 가운데 경지 면적(53.8㎢)은 18.3% 정도다. 하지만, 실제 농사를 짓는 땅인 의창구 동읍·북면·대산면(167.2㎢)만 따로 놓고 보면 경지면적(49.9㎢)은 29.8%에 이른다. 옛 창원시 농업은 동읍·북면·대산면이 전부라고 보면 된다. 낙동강 물줄기를 듬뿍 머금어 예부터 가뭄 걱정은 없었다는 동읍·북면·대산면에서 나는 농산물량은 상당하다. 동읍 단감, 대산 수박은 진영 단감, 함안 수박보다 이름값은 덜할지 몰라도 생산량은 항상 웃돈다고 한다. 하지만, 오늘날 농업으로 창원을 떠올리는 이는 매우 드물다. 읍면 사람들은 '창원은 공업도시'라는 짙은 인상이 이곳 농산물 장사에 걸림돌이 된다고 여긴다. 산이 가르고 엄연히 물과 공기가 다른 땅에서 나는 농산물인데도 바깥사람들은 공장 땅에서 나는 것이라며 덜 깔끔하게 본다는 것이다. 어쨌든 공업도시 창원 한쪽에서 예부터 제법 튼실한 농업이 유지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창원은 나라를 대표하는 공업도시다. 사업체 종사자 40만 7500여 명 가운데 제조업 종사자만 13만 3500여 명(32.7%)이라는 점만 봐도 창원 산업 구조는 명확하다. 도·소매업(5만 200여 명), 숙박·음식점업(4만 3000여 명) 활기 또한 공단 노동자 소비에 기댄다고 보는 게 맞다.

천주산(640m)·정병산(567m)·불모산(802m)·장복산(582m)·산성산(400m) 등으로 둘러싸인 전형적인 분지를 정부는 일찌감치 공장 터로 닦았다. 창원은 여러모로 중화학공업을 키우기 적합한 곳이었다. 먼저 포항·울산·구미·부산·마산 등 공업도시와 연계성이 좋았다. 또 낙동강 물을 끌어들일 수 있어 공업용수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됐다. 게다가 무거운 물건을 생산하는 공단을 단단히 받칠 만큼 지반도 야물었다. 1970년대 초 이 땅을 점찍은 정부는 차곡차곡 중화학공업을 이끌 기지 건설을 진행한다.

'창원국가산업단지' 내 공작기계 업종은 전국 생산량의 80%, 기계 업종 생산량은 20% 정도 차지한다. 더불어 이곳에 입주한 상당수 방위산업체는 군수 물자 국산화를 맨 앞에서 이끌고 있다. 이 때문에 여기 사람들은 전쟁이 나면 가장 먼저 공격을 받을 곳이 창원이라고 말하곤 한다. 전쟁이 나더라도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판단했기에 산업단지를 조성했다는 점을 떠올리면 역설적이기는 하나 완전 빈말은 아닌 듯하다.

1970년대 수공업·경공업에 기댔던 국가 산업을 중화학공업으로 전환하는 디딤돌은 창원이 놓은 게 맞다. 오늘날까지 나라 살림과 도시 살림을 불리는 밑천 역시 이곳 산업단지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산업구조와 공장 용지 수급 불균형 같은 문제는 창원국가산업단지가 풀어야 할 과제로 늘 제시되고 있다.

주남저수지.

노동자의 도시

도시 생김새나 산업 구조를 보면 창원은 두말할 것 없이 '노동자의 도시'다. 이곳에 들어선 행정·교육·의료·문화·유통 시설 대부분은 공단을 지원하거나 공단 노동자 씀씀이에 대한 기대로 생겼다고 보면 된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생산할 때는 나라 살림이, 밖에서 소비할 때는 창원 살림이 살쪘다. 1970년대 이후 '산업화 시대 주역'을 거론한다면 여기 노동자들이 차지하는 지분은 상당하다. 하지만, 이들을 '산업 역군'으로만 보는 것은 곤란하다. 그 찬사가 뻔뻔하게 덮어버리곤 했던 권리에 유난히 예민했던 이들은 야무진 노동자이기도 했다. 노동자들이 오늘날 연대와 투쟁을 내걸고 정치 세력화를 이룰 수 있던 바탕은 창원에서 비롯한다. 그 시작을 더듬어 올라가다 보면 반드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과 마주치게 된다.

1987년 창원국가산업단지 11개 노동조합과 마산수출자유지역 8개 노동조합이 '마창노련' 출범을 선언한다. 해방 이후 나라에서 처음 결성된 노동자 지역 연대 조직이다. 마창노련은 1988년 '공동 임금 투쟁'을 시작으로 구체적인 지역 연대 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1988년 2월 <마창노련신문>을 창간해 지역 노동자를 대상으로 교육과 선전에 나선다. 이 같은 활동은 1988년 임금·단체협상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낳았다. 당연히 지역 연대 조직으로서 위상도 강화됐다. 마창노련은 유난히 노동자들에게 지독했던 정부에 대한 저항 역시 끊임없이 이어갔다. 이는 1988년 12월 '지역·업종별 노동조합 전국회의' 결성으로 이어진다. 지역에서 움튼 노동운동은 전국 노동자 조직화에 마중물이 된다. 그리고 1990년 출범한 '전국노동조합협의회' 역시 마창노련이 낳은 큰 결실이다.

물론 마창노련이 이 같은 성과를 내기까지 겪은 시련도 상당했다. 지금보다 훨씬 노동자에게 엄혹한 시절 일상적으로 탄압에 맞서야 했다. 연대는 노동자에게 큰 무기이기도 했으나 그 과정에서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극복하는 것 역시 오롯이 마창노련 구성원들 몫이었다. 1990년대 초반 매서운 고용 한파에 시달린 창원국가산업단지 환경 역시 마창노련에는 만만찮은 걸림돌이었다. 그럼에도, 마창노련은 더디지만 함께 가는 한 걸음을 묵묵히 내디뎠다. 그리고 1995년까지 그 활동을 이어간다. 1995년 12월 마창노련은 정기 대의원 대회와 해산 대회를 거쳐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산별노조로 흡수된다.

이렇게 다진 저력은 이후 노동자 정치 세력화에 탄탄한 바탕이 된다. 그 결실은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원내 진출로 맺는다. 17대 총선에서 민주노동당은 의원 10명을 낸 정당이 됐으며, 창원에서는 민주노동당 대표인 권영길을 지역구 의원으로 배출한다. 그리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권영길은 재선에 성공하며 창원이 '노동자의 도시'라는 것을 널리 알렸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 권영길은 노동자와 진보 세력 대통합을 명분으로 불출마를 선언했다. 당시 흔들리던 노동자 정치 세력이 분열하는 것을 막고자 내린 극약 처방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를 이어 노동자와 창원을 함께 대표할 정치인은 나오지 못했다.

유흥가 한가운데에 있는 고인돌

1970년대부터 조성된 계획도시가 전체적으로 그럴듯한 모습을 갖춘 것은 1990년대 들어서다. 1980년대 후반까지 창원은 공단과 일부 주거지역을 빼면 쓰임새를 알 수 없는 벌판 천지였다. 그나마 1990년대 들어 중앙동 일대에 상가지역이 형성되면서 이 지역 소비를 부채질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오늘날 창원 상권을 대표하는 지역은 중앙동이 아니라 옆 동네 상남동이다. 2000년대 들어 대규모 상가 건물이 밀고 들어오면서 상남동은 창원은 물론 경남에서 가장 늦게까지 불이 꺼지지 않는 곳이 됐다. 특히 이 지역은 주변을 둘러싼 든든한 소비자들은 물론 유별난 유흥을 즐기려는 바깥사람들까지 끌어들이면서 비대해지고 있다. 제한된 지역에 밀집된 유흥업소는 밤마다 기형적인 경쟁을 벌이며 이 지역에 들어서는 이들을 홀린다. 주점과 노래방 그리고 숙박업소까지 구겨 넣은 덩치 큰 건물이 빽빽하게 늘어선 풍경은 그 기형적인 유흥 구조를 고스란히 드러낸다. 상남동 일대는 계획도시 창원이 전혀 계획할 리 없는 인상을 만들어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공간과 시간이 뒤엉키는 유흥가 가운데 느닷없이 놓인 큰 바윗돌은 어색하면서 능청스럽다. 바로 '상남 지석묘'(도기념물 제224호)다. 전형적인 남방식 형태를 갖춘 이 고인돌은 1997년 발굴됐다. 청동기시대 무덤은 당시 최고 수장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옛무덤은 그런 설명보다 창원이 아주 오래전부터 사람 살기 괜찮은 땅이었다는 증거로 유용하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 창원은 '계획도시'라는 강렬한 인상 탓에 가리고 잊히는 게 한둘이 아니다. 특히 쌓일수록 매력적인 옛 흔적이 매우 가난해 보이는 도시이기도 하다. 하지만, 없어 보인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상남동 유흥가 한복판에 있는 청동기시대 고인돌 상남 지석묘.

가려지고 잊히는 귀한 것들

산으로 둘러싸인 분지를 한 번 밀어버리고 세운 도시에서 옛사람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성산구 외동에 있는 '성산패총'은 창원에서는 제법 귀한 유적이다. 1974년 조사가 시작된 조개무지에서는 돌칼, 돌도끼, 뼈로 만든 바늘, 화살촉, 토기 등이 나왔다.

의창구 동읍 다호리에 있는 '다호리 유적'은 개발 손길이 닿지 않은 외곽 지역에 남은 옛 흔적이다. 1988년 발굴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옛사람들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귀한 흔적이 쏟아져 나온다. 특히 이곳 고분군에서는 청동기·철기·칠기 등 부장품과 통나무널이 제모습을 고스란히 갖춘 채 나와 눈길을 끌었다. 다호리 유적은 진펄에 형성돼 목제 유물도 비교적 보존 상태가 양호했다. 또 철광석 유물에서 드러나는 세련된 가공 기술과 외국과 교역을 보여주는 유물 등은 이 나라 고대사를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다.

이처럼 긴 세월을 건너뛰어 버젓이 남아 있는 옛것과 달리 불과 몇십 년 전 흔적은 또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창원이다. 창원에서는 뜬금없이 외롭게 서 있는 비석들을 간혹 볼 수 있다. 계획도시 창원이 들어서기 전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 이른바 '원주민'이 남긴 아련한 흔적이다. 더는 마을 모습을 볼 수 없더라도 그 이름만은 남기고자 세운 비석은 1980년 '목리 유허비'를 시작으로 모두 44개가 세워져 있다. 나라가 밀어붙인 개발 사업 한쪽에는 팍팍한 삶을 버틸 수밖에 없었던 원주민들 희생이 있다. 이들은 1990년 '삼원회(三元會)'를 조직해 같은 서러움을 달래고 있다.

창원의 집.

모든 것을 가지다 못해 차고 넘칠 것 같은 이 도시가 항상 옛것에 대한 아쉬움이 있다는 것은 '창원의 집'(의창구 사림동)에서도 엿보인다. '창원의 집'은 200년 전 순흥 안씨 5대조인 퇴은 두철 선생이 거주하던 집 일부를 개보수한 것이다. 안채와 사랑채, 민속관, 민속교육관, 정자, 팔각정 등이 있어 여기 사람들에게 호젓한 휴식처가 되고 있다. 애써 다듬은 옛집은 숨 가쁜 변화로 지나칠 수밖에 없었던 것에 대한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조선시대 장군 최윤덕(1376~1445)에 대한 편애 역시 같은 맥락으로 읽을 수 있다. 바깥사람들에게는 낯선 이름이기도 한 최윤덕은 창원시에서 각별하게 재조명하는 인물이다. 1410년 무과에 급제해 여진족이 날뛰는 것을 막았으며 1419년 이종무(1360~1425)와 함께 쓰시마섬(對馬島)을 정벌했다. 1428년 병조판서에 올랐으며 1435년 좌의정이 됐다. 의창구 북면 대산리에 묘가 있으며, 창원시는 2010년 창원광장 북쪽 중앙로 입구에 최윤덕 동상을 세웠다. 늠름한 동상에서는 지역에 내세울 만한 옛 사람 한 명쯤은 있어야겠다는 창원시 오기가 엿보이기도 하다.

최윤덕 장군 묘.

삭막한 공업도시 속 인공과 자연

때가 되면 '주남저수지'(의창구 동읍) 철새들은 지저귀지 않고 짖는다. 그 우악스러운 합창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철새를 마주할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구석구석 사람 손이 닿지 않은 곳이 없는 창원에서 주남저수지만은 그나마 맨살에 가까운 자연을 보여준다. 산남·용산·동판 3개 저수지로 이뤄진 주남저수지는 예부터 동읍·대산면·북면지역 농업용수를 공급했다. 나라가 다 말라도 여기는 걱정 없다는 이곳 사람들 자신감은 주남저수지에서 나온다. 하지만, 오늘날 주남저수지 가치는 농업용수 공급보다 이미 자리매김한 생태계에서 나온다. 그리고 그 가치를 여기 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창원시는 해마다 11월 '주남저수지 철새 축제'를 열어 나라에서도 귀한 철새도래지를 널리 알리고 있다.

분지를 감싼 산 역시 삭막한 도시가 갑갑한 이들에게는 가까운 탈출구다. 창원 북쪽을 병풍처럼 둘러싼 정병산(567m)은 보이는 높이와 달리 버거운 등산로로 유명하다. 정상에서는 잘 정돈된 창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천주산(639m)은 여름철 피서지로 즐겨찾는 달천계곡과 산에 두루 펼쳐진 진달래 밭이 유명하다.

천주산.

이 같은 자연과 더불어 도심 곳곳에는 인공 공원이 조성돼 있다. 일반공원과 체육공원, 전통놀이공원에 광장까지 주변 다른 지역과 견줘 유난히 많다. 회색빛으로 뒤덮일 뻔한 도시에 발랄한 색을 더하는 작업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그렇게 가꾼 공간은 빡빡한 일상에 시달리는 여기 사람들에게는 소중할 수밖에 없는 쉼터다. 창원시가 내세우는 '환경도시' 구호는 잠시라도 소홀하면 잃을 수밖에 없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다짐으로 보는 게 맞을 듯하다.

통합 창원시 출범

2010년 창원·마산·진해를 묶은 통합 창원시가 출범했다. 마산·진해와 어깨를 결으면서 50만 명 정도였던 인구는 100만을 넘어섰고 293.3㎢였던 땅은 745.3㎢로 불어난다. 세 도시가 한 덩어리가 되면서 경남에서 웬만한 항목에 '최대'·'최고'라는 수식은 창원 앞에 붙게 됐다. 하지만, 정작 옛 창원 사람들은 이 같은 변화에 담담한 편이다. 원래 큰 도시 사람들에게 갑자기 불어난 덩치는 그렇게 매력적이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늘 섭섭한 행정이 추진될까 예민한 마산·진해 사람들을 볼 때나 엉뚱하게 떨어져 나가는 게 없을까 신경 쓰는 정도다.

반면 창원시 포부는 거창하다. 2013년 창원시는 2025년을 내다본 도시기본계획안을 내놓았다. 계획안이 내세우는 도시 미래상은 '세계도시를 선도하는 녹색 성장도시'다. 그리고 계획 목표에는 균형, 친환경, 문화, 선진 등을 담았다. 창원·마산·진해권으로 나눈 개발 계획 역시 예사롭지 않다. 2025년 인구 150만 명이 살 것이라는 도시는 계획 단계부터 거대하다.

하지만, 1970년대 조성한 계획도시 속 사람들이 숨 가쁜 변화 속에 많은 것을 누리고 잃었듯 창원으로 묶인 창원 밖 사람들 역시 느닷없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거대 도시 구성원으로서 거는 기대와 제 것을 잃기 싫은 미련은 상당 기간 공존할 듯하다. 태생도, 거대화 과정도 오롯이 사람 머릿속에서 나온 도시 창원이 풀어낼 과제는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결국, 사람이다.

/사진 박일호·박민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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