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창원] 외부문화 공존 속 대표음식 부재

조선시대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창원 특산물이 나열돼 있다. 유자·석류·굴·해삼·오징어·대구·낙지·붕어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해당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지금 이곳 사람들에게 창원 대표 먹을거리를 물으면 시원스러운 답을 얻기 어렵다. 어릴 적 기억으로 냇가에서 민물고기 잡아먹던 이야기를 꺼내지만, 다른 지역에 비해 유별날 정도도 아니었다.

창원은 1970년대 중반 계획도시 작업을 급격히 진행했다. 바깥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반면 이곳 사람들은 삶 터를 내주고 떠나기도 했다. 해수면이 낮아져 바다가 땅으로 변하는 지형변화도 있었다. 먹을거리 문화가 진득하게 이어질 환경은 아니었던 것이다.

대신 급격히 진행되는 도시화 과정에서 외부 것들은 빠르게 흡수됐다. 1983년 경남도청이 들어선 이후 도내 각종 기관이 집중됐다. 그러다 보니 관료들이 좀 속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간도 필요했을 것이다. 고급 일식집이 유독 많이 들어서 있는 이유 중 하나겠다.

한편으로 창원 상남상업지구는 전국에서 알아주는 유흥지대로 이름 알리고 있다. 어디서 어떻게 나왔는지 모를 각종 퓨전 음식도 넘쳐난다. 다른 지역보다 좀 더 다양하고 폭넓은 문화가 공존하는 셈이다.

그래도 이 지역 사람들은 제대로 내세울 무언가를 찾으려 했다. 시에서는 지난 2008년 '창원 대표 음식'에 대한 설문을 진행했다.

창원이 대표 음식으로 내세우는 석쇠 불고기

이 지역민들은 '석쇠불고기'와 '두부'를 꼽았다. 이 두 가지는 창원에서 비교적 토박이 많은 지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소답동 일대는 창원이 급격히 팽창하기 전 중심지 역할을 했다. 이곳에는 북동시장이 있다. 요즘에도 2·7일 장날 때 사람들로 북적인다.

'석쇠불고기'가 이름 오르게 된 것은 북동시장에 터전을 잡은 어느 국밥집 할머니 손에서다. 1960년대 중반 이 할머니는 양념한 고기를 석쇠에 구워 사람들에게 내놓았다. 입소문 나며 사람들 발걸음이 이어졌다. 손님들은 간판 없던 이곳을 '판문점'이라 불렀다. 이곳에 오면 평소 얼굴 보기 어렵던 이들을 이산가족처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지금은 장소를 옮겨 대를 이어 장사하고 있다. 이 집 말고도 석쇠불고기·국밥을 내놓는 집이 몇 되는데, 임진각·통일각·언양각 같이 비슷한 분위기 이름을 달고 있다.

북동시장에는 국밥거리가 있다. 쇠고기국밥·돼지국밥을 판매하는 식당 10여 곳이 자리하고 있다. 최소 20~30년, 많게는 50년 넘은 곳도 있다. 돼지국밥 원조라 할 수 있는 부산에서 장사하다 이곳에 터전 잡은 식당도 있다. 장날 온 이들은 "어느 집에서든 국밥 한 그릇 걸쳐야 발걸음 옮겨진다"고 한다. 국밥으로 유명한 인근 밀양에서도 찾는 이가 꽤 된다고 한다.

북동시장 국밥.

북면에서는 온천 즐기러 온 이들이 막걸리·손두부로 배를 든든히 채운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 때 양조장이 들어섰다. 사람들은 좋은 물 덕에 훌륭한 맛이 난다고 믿는다. 1970~80년대에는 창원공단 행사, 대학 축제가 있으면 막걸리 받으러 온 차량이 줄을 이었다. 명절 때는 말할 것도 없었다.

북면 두부.

막걸리와 어울리는 것 가운데 하나가 두부겠다. 일제강점기 때 어느 할머니가 만든 재래식 손두부가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 이 할머니는 새벽부터 손수레 밀며 두부 파는 일을 50년 넘게 하다 세상을 떠났다 한다. 지금 이 지역에서 나오는 두부는 기계 힘을 빌리기는 한다. 그래도 여전히 막걸리 단짝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북면온천 주변에 늘어선 노점 메뉴판에는 '북면 막걸리' '북면 두부'가 빠지지 않고 있다.

창원 특산물에서는 단감이 대표한다. 단감은 1927년 김해 진영에서 처음 재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진영 인근인 창원 북면·동읍·대산면으로 점차 퍼져 나갔다고 한다.

북면, 동읍, 대산면에서 많이 생산하는 단감.

하지만 이 지역에서 단감 재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참 지나서다. 벼농사가 전부인 각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만 신경 썼다.

그러다 벼농사가 더 이상 소득 증대에 도움되지 못하자 특수작물에 눈 돌렸다. 마을마다 먼저 앞장서서 하는 이들이 있었다. 어느 마을 누군가는 김해 진영장에 가보니, 진영 단감 가격이 생각 이상으로 높다는 것을 알았다. 해볼 만하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던 듯하다. 이러한 각 마을 몇몇이 서로 정보를 공유하며 개척해 나갔다. 재래종 떫은 감보다 가격이 좋아 벌이가 아주 괜찮았다. 이것을 본 옆집에서도 하나둘 단감에 손대며 퍼져 나갔다.

1970년대에는 단감나무 한 그루로 대학 등록금을 낼 정도로 수입이 좋았다고 한다.

당시 기억을 떠올리는 이들은 "단감 덕에 자식 농사 다 시켰다"고 한 입으로 말한다. 국민소득이 높아져 소비도 늘고, 저장 기술도 발달해 1980년대 중반까지는 재미 좋았다고 한다. 그 이후 어려움이 찾아왔다. 초기 나무들이 고령화되면서 수확량이 줄고, 질도 떨어졌다. 단감 재배하는 지역도 여기저기 늘었다. 창원이 '기계공단'이라는 이미지도 걸림돌로 작용했다. 포기하는 농가가 하나둘 나왔다. 이때 창원농업기술센터에서 수목교체 등 지원에 나섰다. 그 고비를 넘겨 지금 창원은 전국 단감 생산량 가운데 20% 이상 차지하며 그 명성을 잇고 있다.

대산 수박.

'대산 수박'도 귀에 꽤 익은 편이다. 대산면 수박은 당도가 높고, 상품이 크기로 이름나 있다. 낙동강 변 비옥한 땅, 풍부한 일조량 덕이다. 수박 하우스재배 시기는 대산면 안에서도 마을마다 다르다. 먼저 한 곳은 1980년대 초반부터다. 또 어느 마을에서는 오이 재배가 재미없자 꽃으로 눈 돌렸다가 결국 수박에 정착했다고 한다.

소답동 일대는 1990년대까지 미나리 재배지였다. 집마다 논물 들어오는 곳에 미나리를 심어둔 풍경이 흔했다. 일대 개발로 이젠 옛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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