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9) 통영별로 5일차

서울에서 수원까지의 통영별로는 정조 임금의 원행길로도 이용되었기에 우리는 이 길을 따라 걸으며, 개혁 군주의 자취도 함께 더듬어 볼 수 있었습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벌써 한 달이 가까워 오지만 여전히 정국은 어수선하고, 국민을 위한다는 정치인들은 정쟁만 일삼을 뿐입니다. 바로 지금, 200여 년 전 화성에서 개혁을 꿈꾸었던 이산 그가 무척이나 그립습니다. 오늘 여정은 화성을 나서서 현륭원으로 이르는 원행길의 마지막을 같이합니다.

◇팔달문시장에서 유상(柳商)의 유래를 좇다

팔달문을 나서면 화성을 만들 때부터 상업 활동을 지속해 온 팔달문시장이 있습니다. 이곳에 시장을 두게 된 것은 하삼도에서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장이 비롯한 때는 수원을 화산(花山) 옛터에서 지금 자리로 옮기고 신도시 건설을 본격 진행하던 정조 14년(1790)으로 거슬러 오릅니다. 정조는 수원을 상업도시로 만들기 위해 주민과 상인을 불러들일 수 있는 여러 방안을 검토하던 중, 수원부사 조심태의 안을 바탕으로 중심 가로를 따라 시전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런 사실은 1792년에 간행된 〈수원부읍지〉 시전(市廛)에 관문 앞 한길 양쪽에 여덟 가지 시전이 늘어서 있다고 전합니다. 그러던 즈음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갑작스레 승하하자 이 시전은 독점 상권으로서의 특권을 획득하지 못한 채, 남문 밖으로 옮겨 가서 4일과 9일에 장이 열리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을 기리기 위해 수원시에서는 이곳을 '왕이 세운 시장'이라 선양하고 있습니다. 수원에 시전을 개설할 때 모인 상인들은 정조 임금과 뜻을 같이하여 부국의 근본이 상업에 있음을 잘 알고 일찍이 상업에 투신한 선비 상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유경(柳京)이라 불린 수원에서 상업 활동을 하였기에 '유상(柳商)'이라 부르며, 지금도 수원에서는 선비 상인의 전통을 이어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버드내를 따라 옛길을 걷다

팔달문을 벗어나 매교동에서 버드내(柳川)를 건너 그 흐름과 나란히 난 길을 따라 남쪽으로 향합니다. 그 원천이 광교산에서 비롯하지만, 〈화성성역의궤〉에는 구간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렸습니다. 발원지에서 성 안으로 드는 물길은 광교대천(光敎大川), 성 안을 흐르는 구간은 대천(大川), 남수문을 지나 성을 빠져나가는 물길은 구천(龜川)이라 했습니다. 버드내는 구천에서 황구지천에 이르는 물길을 이르는 이름인데, 수원 신도시를 조성할 당시에는 팔달산 아랫녘을 이르는 지명이기도 했습니다. 이름으로 보아 물길 양쪽 방죽을 따라 버드나무가 자라던 수변경관이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매교를 지나는 지점에서 바라 본 버드내. /최헌섭

지금도 하천 동쪽 방죽을 따라 다시 버들을 심어 역사성을 되살리고 있지만 어찌된 셈인지 이름은 수원천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역사성과 정서를 생각한다면 아무래도 원래 이름을 되살려야 할 것 같습니다.

그것은 수원을 일러 버드나무가 많은 도시라 유경이라고도 불렀던 점을 상기한다면 더욱 그러하며, 바로 그 자취가 이곳 버드내에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버드내를 지나 멀지 않은 길가에 상류천(上柳川)이라 새긴 표석이 복제되어 있습니다. 이즈음이 상류천점(上柳川店)이 있던 곳인데 표석은 원래 버드내 방죽에 세워져 있던 것으로 현륭원 원행 길에 세운 이정표의 하나입니다. 상류천 표석을 지나 주택가 사이로 난 옛길을 찾아 걸으니 얼마지 않아서 하류천(下柳川) 표석이 나옵니다. 화성에서의 거리가 15리가 되는 이곳은 지금의 세류동 아랫버드내마을입니다. 옛길은 여기서 지금의 경부선 철도를 지나 수원비행장 안으로 열렸습니다. 옛길은 이 구간에서 황교(皇橋)와 옹봉(甕峰)을 지나게 되었는데, 지금은 비행장이 들어서서 옛 자취조차 가늠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원행길과 헤어지다

비행장을 내기 전에는 이리로 옛길을 덮어 쓴 국도 1호선이 지났지만, 지금은 새 길을 곧게 낸 바람에 우리 일행은 옛길을 따르지 못하고, 수원비행장을 지나 화성시 경계에서 황구지천을 건너 다시 옛길과 만납니다. 이곳에 놓은 다리 이름을 살피니 대황교라 적었지만, 〈대동지지〉에 나오는 그 다리는 아닌 듯싶습니다. 통영별로와 현륭원이 갈리는 곳에 둔 대황교와 옛길은 수원비행장이 들어서면서 잠식되었고, 옛 다리는 화산 아래 융건릉 근처에 옮겨 두었습니다. 〈대동지지〉에는 이곳 대황교에서 능이 있는 곳(현륭원)으로 들어간다고 했으니, 아쉽지만 예서 정조 임금의 원행길과는 이별을 고해야 합니다.

◇떡전거리(병점)에 들다

   

현륭원 가는 길과 헤어진 우리는 황구지천(黃口池川)을 건너 태안으로 향합니다. 지금 이 내에는 북쪽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는 철새들이 먹이 활동에 열심입니다. 냇가에 조성된 화산체육공원 울타리를 따라 걷다가 경부선 철로를 건너 옛적 길손들이 요기를 했던 병점에 듭니다. 이곳은 통영별로 첫 나들이에서 지났던 서울의 떡전거리와 같은 구실을 했던 곳으로 〈춘향전〉에도 같은 이름으로 나옵니다. 지금도 병점역 부근에는 음식점이 성업 중이라,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갖가지 전과 막걸리로 허기를 달래고 다시 길을 다잡습니다.

◇죽미령을 넘다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길을 여느라 온통 토목공사 현장으로 변해 버린 곳을 지나 잔다리가 있던 세교동(細橋洞)을 거쳐 오산과 경계에 있는 죽미령(竹美嶺)을 오릅니다. 유엔군초전기념공원이 있는 이곳은 한국전쟁 당시 1950년 7월 5일 유엔군과 북한군이 처음 전투를 치른 곳입니다. 수원에서 태안을 거쳐 남쪽 오산으로 이르는 교통의 요충이었기에 전투를 치렀던 것이겠지요. 〈대동지지〉를 보면 옛 이름이 중미현(中彌峴)이라 했는데, 병점에서 15리 거리인 오산시 내삼미동에 있습니다.

이즈음에서 서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백제 때 쌓았다는 독산성(禿山城)이 보입니다. 임진왜란 때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전승지로 유명한 곳입니다. 민둥산(禿山)이란 이름에서 보듯 물이 부족한 것이 큰 결점이었습니다. 이를 왜군은 성을 포위하고 보란 듯이 물을 헤프게 쓰면서 조선군을 조롱하며 심리전을 펼쳤습니다. 이에 권율은 성의 가장 높은 곳에서 말 목욕을 시키는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적의 심리전술을 역이용하여 물리쳤는데, 말을 목욕시킨 곳을 세마대(洗馬臺)라 합니다. 봉수도 남아 있어 이곳이 교통의 요충임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융릉 건릉 용주사

융건릉(장헌대왕으로 사도세자의 무덤 융릉(隆陵)과 정조의 무덤인 건릉(健陵)을 합쳐 부르는 이름)으로 옮겨 둔 대황교를 찾아 성황산 남록을 따라 서쪽으로 길을 잡아 까치고개를 넘으면 용주사(龍珠寺)에 듭니다. 원래 신라 문성왕 16년(854)에 창건된 갈양사가 전신이며, 병자호란 때 소실됐다가 현륭원을 관리하는 능찰로 다시 세웠습니다. 절의 이름은 현륭원의 형국과 낙성식 앞날 정조의 꿈에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용이 나타난 데서 비롯하였으며, 위패를 모신 호성전 앞에는 부모은중경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서쪽으로 1㎞ 정도 더 가면 수원 고읍의 주산인 화산 남쪽 자락 현륭원에 이릅니다. 사도세자의 무덤을 이곳으로 모신 일은 명당 길지 선정으로부터 비롯하였습니다. 여러 장소를 물색하던 중 풍수의 비조 도선이 '용이 여의주를 희롱하는 형국'이라 한 이곳을 선정하여, 정조 13년(1789) 7월 말에 천장을 시작하여 9월 말에 마무리되었습니다. 무덤은 여느 왕릉에 못지않게 장엄하게 꾸몄는데, 무덤 둘레에 화려한 병풍석을 두르고, 그 아래에는 지붕의 치마를 두르듯 와첨상석을 장식하였습니다. 정조의 능인 건릉은 융릉의 서쪽에 있습니다. 원래의 무덤은 죽어서도 아버지 곁에 묻혀 효를 다하고자 한 정조의 유언에 따라 융릉 동쪽 200m 아래에 있었지만 자리가 좋지 않아 정조의 비이신 효의왕후가 돌아가시자 지금의 자리에 합장했습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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