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꿈이 현실 같고 현실이 꿈 같을 때가 있다. 내가 꿈을 꾸는 것인지, 꿈이 나를 꾸는 것인지 벚나무 아래서 호접지몽(胡蝶之夢)의 옥돌 나비가 된다.

남도는 지금 꽃의 낙원(paradise)이다. 울타리를 두른 땅이란 페르시아어 'pairidaeza'가 파라다이스가 되었다고 했는가. 여기가 유토피아인지도 모를 일이다.

꽃의 세상이 왔다. 토머스 모어의 소설로 한정하지 않는다면, 지상의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상향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장소를 뜻하지만, 한낱 공상을 뜻하지는 않았다.

호머의 〈오디세이〉에 묘사된 도시국가 패아키아(Phaeacia) 이후 정의와 진리, 동정과 사랑, 공평과 조화에 대한 열망이 피어오르던 시대에 사회계획가들은 유토피아적 공간을 편성하고 직접 실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토피아 상상은 실체화되는 과정에서 의도는 소멸되고 기획은 타락했다. 빛의 공간에 그림자가 드리우고, 유토피아는 디스토피아로 역전된 것이다. 물론 질풍노도의 향리들이 귀담아들을 일이다.

우(U: 없음)와 토포스(Topos:장소)라는 어원을 지닌 유토피아(Utopia)의 개념과는 달리 동양적 사유체계에서는 이 현실 안에 있다는 인토포스(in-topos)의 성격을 지닌다고 했다. 그래서 '지극한 덕이 이루어진 세계', 존재를 초월한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은 존재의 차별과 대립을 넘어서 소통되는 자유의 경계다.

서양의 사유체계에는 흘러간 시간을 이야기하지만 무하유지향은 있는 것이란 아무 것도 없는 곳이며, 계절이 오고 가고 변하듯이 시간은 공간 안에 존재하며 반복하면서 공간과 시간을 넘나들고 있는 곳이다.

허무 자연의 향토와는 다르게 첩첩산중의 샹그릴라로 인도했던 티베트 청년은 샹그릴라에 도착하자마자 숨을 거두었다. 서양의 사유체계에서 낙원을 잃어버리는 까닭이다. 잃어버린 낙원은 우리가 자신의 행복을 대자화하기 위해 필요한 거리를 부여한다. 바로 여행자들을 동하게 만드는 다른 사회를 향한 주제넘은 향수이기도 하고, 만질 수 없고 잡을 수 없는 그림자나 허상이기도 하다.

제임스 힐튼은 샹그릴라를 이상향으로 묘사했지만, 작중 인물은 그곳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진정한 이상향임을 깨달았다. 아마도 여행에서 돌아온 여행자들은 그리움처럼 비로소 샹그릴라를 느끼는 것이다.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신세계(Novus Mundus)'와 정복자 코르테스가 꿈꾸었던 황금의 나라 '엘 도라도(El dorado)'조차 이상향 속에 있는 존재가 아니라, 이상향 바깥의 존재였던 것이다.

   

칼 융의 동시성의 원리처럼 어제 벚꽃을 즐기는 나비의 꿈을 꾸었는데 오늘 나비가 내 앞을 날고 있다. 벚나무 아래서 꾸는 나비의 꿈. 호접지몽의 낙원에서 선유후부가설화(仙遊朽斧柯說話), 신선놀음을 즐긴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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