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아들(조현규)이 쓰는 아버지(조택래) 이야기

조택래(54) 씨는 1960년 3월 29일 경북 청송군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가난한 가정에서 순탄치만 않았던 생활을 보냈다.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그의 노력은 성공한 오늘을 만들었다. 그는 현재 오봉임(50) 씨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LG전자 생산기술계 설비보전 부문에서 예방보전(PM)업무를 하고 있다. 살아온 인생의 반 이상인 33년간 LG전자에서 근무하고 있다. 청년 시절부터 지금까지 대기업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성실·근면·정직'이었다. 아버지 조택래 씨의 54년 인생을 아들 조현규(27)가 들여다봤다.

◇녹록지 않은 삶의 연속 = 경북 청송에서 소작농의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나 부모님 농사일을 도우며 자랐다.

"그 당시 워낙 가난해 장티푸스에 걸린 줄도 모른 채 살았어. 초등학교 3학년 여름에 장티푸스 탓에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온 적도 있지. 치료를 받던 중 머리카락이 다 없어지기도 했지. 가난 때문에 병을 제대로 알지 못했고, 죽음의 문턱까지 경험하다 보니까 어린 나이에 세상 보는 눈이 달라졌던 것 같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무렵에는 우연한 기회에 육상에 소질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년체전에 나가게 되고 결선까지 가게 되었으나 아쉽게 순위 안에는 들지 못했어. 하지만, 달리기에 소질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된 계기가 되었어. 그러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육상선수보다는 핸드볼이 낫다고 생각해 그쪽으로 옮겨 운동했지."

1년여 동안 열심히 운동했고, 초등학교 6학년 때 소년체전에서 8강에 오르기도 했다. 시골의 자그마한 학교가 소년체전 8강에 들어갔다는 것은 큰 이슈거리였다.

"아버지께서 삶은 달걀 2개를 가져오셔서 하신 말씀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지. '이거 2개 먹고 꼭 우승해라. 도움은 많이 못 줘서 미안하지만 잘할 거라 믿는다'라는 말씀이셨지."

열심히 노력하였으나 4강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 정도 결과가 나올 수 있었던 것에 감사했다.

"지원도 거의 없다시피 한 상황에서도 큰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하다고, 시골에서 왔다고 무시당하는 것이 싫어서 밤낮으로 열심히 했기 때문이지."

그렇게 중학교에 진학했다. 너무 가난해 학교에 다니지 못할 정도였다. 이러한 시점에서 운동을 계속하기란 정말 어려웠다. 큰형은 초등학교만 나오고 중학교는 진학하지 않았기에 큰 고민이 되었다. 운동은 본인에게 사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해, 학교만 졸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운동을 해 학업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었다.

이를 가엽게 여긴 선생님이 있었다. 마침 같은 조씨이고 본관이 같았다.

"어린 시절 운동만 하고 와서 아는 게 없는 나를 열정적으로 가르쳐 주셨어. 국어·영어·수학에 대해 기초부터 심화까지 말이야. 숙제를 제대로 하지 않고, 알려준 내용을 숙지하지 않았을 때는 사랑의 매로 다스리기도 하셨어. 그때 가르침을 아직도 기억하고 감사해 하고 있단다."

중학교 3년 내내 때론 자상한 아버지, 때론 엄한 아버지였던 그분을 아직도 기억 속에서 떠올린다.

◇생업전선에 뛰어들다 = 중학교 졸업 후에는 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돈을 벌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형님이 부산에서 취업하여 일하고 있었어. 그래서 형님이랑 같이 살면서 부산 광복동 전자 대리점에서 일하면서 밤에는 공부도 혼자 했어. 평소에 관심 있었던 공부를 하고, 배워가면서 하나하나 알아가는 즐거움을 찾았지."

직장 동료와 함께한 20대 후반 아버지(왼쪽) 모습.

그 후에 금성사(현 LG전자) 직업훈련원에 들어가 1년간 기계조립 및 용접교육을 받았다. 수료 후에는 금성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배우지 못한 한이 있었다. 그래서 회사에 다니면서 마산공업고등학교 야간에 입학했다.

그 당시 금성사에는 병역특례 제도가 있었다. 이를 신청해 5년 동안 군 복무를 대신했다.

금성사를 다니면서 같은 처지의 여성, 즉 지금의 아내를 만나게 됐다.

"사람이 참하고 청순해 보였어. 자연스레 끌리게 됐지. 다른 청춘 남녀들이 그렇듯, 평범하게 데이트하면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거 같다. 같은 회사, 같은 공간에서 지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대면할 기회가 많아 젊은 남녀 마음이 통한 거지."

그렇게 1986년 12월 12일, 백년가약을 맺었다. 부부 연을 맺은 이후 아내는 회사를 그만두고 가정에만 전념했다.

◇위기를 성실로 넘긴 사나이 = 직업훈련소·야간학교에 다니면서 배운 기술과 자격증을 인정받아 설비보전 일을 맡게 된다. 하지만, 회사 생활이 늘 순탄치만은 않았다.

"노사분규가 있었을 때 협상과정에서 진통이 있어 임·직원 모두에게 힘든 시간이었지. 그리고 IMF 경제 위기 때 동료를 떠나보내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도 했어. 나 자신은 회사에 남았지만, 동료가 떠나는 모습을 보았을 때 왠지 모를 미안함이 사무치고는 했지."

회사 출근 시간은 오전 8시다. 그러나 그는 1시간 먼저 출근해 준비한다. 남들보다 먼저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다.

"아마 이런 면들이 33년 동안 주위 사람들에게 비쳐 성실·근면이라는 이미지가 박힌 것 같다. 그렇게 인정받아 지금은 기술팀에서 최고 자리까지 올라가게 되었어."

그의 인생에서 LG전자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LG전자가 없었으면 그도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회사가 곁에 있었기 때문에 한 가정이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90년대 가족사진.

"부귀영화는 아니더라도 돈에 대한 큰 걱정 없이 즐겁게 살 수 있게 해준 회사에 늘 감사한다."

그는 1남 1녀를 두고 있다. 자녀들이 취업하고, 출가한다면 도시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정년퇴임 후 전원생활을 꿈꾸고 있어. 아침·저녁으로 자연을 만끽하는 풍요로운 전원생활을 하고 싶어. 아내와 오순도순 여생을 즐기며 자유롭게 살고 싶다. 우리 가족 모두에게 웃는 날만 가득하길 바란다."

/조현규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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