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갱블] 벌교오일장과 80년 된 5성급 여관에서의 하룻밤

남도의 겨울은 혹독하지 않았다. 유난히 매섭던 추위도 벌교에선 한풀 꺾이고 있었다. 작년에는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벌교를 찾았었고 올해는 지난 12일에 다녀왔다. 벌교 장은 4일과 9일에 열리는 오일장이다.

다소 권위적이게 보이는 벌교역사 앞으로는 소읍치곤 제법 너른 광장이 있고 길 건너 인도는 이미 자리를 차지한 장사꾼과 오가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이 소읍은 남도의 외딴곳에 뚝 떨어져 있음에도 궁벽하지 않다. 한창 잘 나갔던 시대의 옛 영화가 지금까지 골목 구석구석에 남아 있다.

시장은 입구부터 부산스럽다. 단연 눈에 띄는 건 '꼬막'이다. 벌교 하면 태백산맥, 꼬막을 떠올리는 건 당연지사. 근데 꼬막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게 있다.

단연 눈에 띄는 건 '꼬막'... 근데 꼬막보다 더 많은 이것은?

다래다. 그것도 참다래. 시장 길목마다 그득 쌓인 다래는 꼬막의 명성을 갈아치울 정도로 기세가 등등하다. 이 겨울에 참다래라. 작년 2월에 벌교를 찾았을 때도 그 어마어마한 다래 꾸러미에 놀라기는 했다.

벌교시장이라고 새긴 투박한 아치형 입구를 지나면 본격 벌교 장이다. 입구는 사람들로 북적댄다. '벌교 매일 시장 매달 안쪽 1일, 15일, 도로변 16, 30일 쉽니다'고 큼직하게 글씨를 적은 현수막을 내걸었다. 시장의 질서를 상인들 스스로 지켜가는 듯하다.

   

어물전이다. 어물전은 장터 한복판에 있으면서 벌교 장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 그 유명한 꼬막뿐만 아이라 전국에 명성을 떨치고 있는 고흥 굴이 벌교를 거쳐 간다. 시장에선 껍질째 무더기로 쌓아둔 굴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여자만을 끼고 있는 벌교는 그만큼 풍성한 곳이다.

어물전에 처음 보는 생선이 있어 뭔가 했더니 상어란다. 상어 새끼인데 날것 그대로다. 제사상에 올리기도 하는 상어는 그냥 조리해서 먹기도 하지만 대개 말려서 포를 뜬다. 시장에서 가장 흔하면서도 특이한 것은 두부다. 두부장수가 두부공장에서 곧장 나온 듯한 두부 상자를 손수레에 가득 싣고 모두부를 상자 채 이 집 저 집 배달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두부는 부식 가게에서 제법 잘 나가는 품목 중의 하나란다.

자, 벌교의 명물... 참꼬막 납시오!

   

아무리 남도라 한들 시장 구석의 한기조차 이겨낼 수는 없었는지 상인들은 잠시 짬을 내어 모닥불로 모여든다. 시장골목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가게는 한산하고 이미 문 닫은 가게도 두서넛 보인다.

자, 이쯤 되면 벌교의 명물, 꼬막이 나실 때다. 찬바람이 불면 참꼬막은 벌교의 겨울철 대표 음식. 청정 갯벌에서 나는 참꼬막을 최고로 치는데, 특히 겨울의 참꼬막은 살도 차고 그 맛이 쫀득하기가 명품으로 불리기에 손색이 없다.

꼬막은 흔히 개꼬막으로 불리는 새꼬막과 참꼬막, 피꼬막이 있다. 피꼬막은 크기가 워낙 커서 단번에 알 수 있지만, 새꼬막과 참꼬막은 유심히 봐야 구별할 수 있다. 요즈음 벌교에서도 참꼬막 보기는 어렵단다. 시장에서도 열 꾸러미가 새꼬막이라면 참꼬막은 겨우 한 꾸러미 있을 정도로 귀했다. 가격을 물어보니 kg당 1만5천 원에 판다고 했다.

우리가 흔히 반찬으로 먹는 꼬막은 새꼬막, 특히 양념해서 먹는 것은 전부 새꼬막이다. 벌교의 꼬막식당들에서도 꼬막정식을 주문하면 삶은 꼬막만 참꼬막이고 양념꼬막, 꼬막무침, 꼬막전 등에는 거의 새꼬막을 쓴다. 가격이 비싸니 어쩔 수 없다. 양심적인 식당에선 미리 새꼬막이라고 말해주기도 한다.

참꼬막은 고급 종이라 제삿상에 올라가서 '제사꼬막'으로 불렸다

   

참꼬막과 새꼬막을 구별하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새꼬막에 비해 참고막이 서너 배는 비싸니 차이를 알아두는 것도 좋을 터... 얼핏 보면 비슷하나 자세히 보면 참꼬막이 껍질이 두껍고 골의 간격이 더 넓고 깊은 편이다. 새꼬막은 껍질이 얇고 골이 얕으면서 간격이 촘촘하다. 맛은 아무래도 참꼬막이 살이 탱탱하여 쫄깃한 맛이 훨씬 좋다.

전국 참꼬막의 70%를 생산하는 벌교 앞바다 여자만 갯벌 그러나 최근에는 무분별한 남획과 서식환경의 악화로 생산량이 줄어들어 참꼬막이 귀해져 가격이 5배나 뛰기도 했다. 참꼬막이 '금꼬막'이 된 셈이다. 새꼬막은 참꼬막보다 5배가량 더 생산됨에도 가격은 3분의 1가량이다.

참꼬막은 우리가 방송 등에서 흔히 보듯이 갯벌에 직접 들어가 채취하고 새꼬막은 배를 이용하여 대량으로 채취한다. 그러니 자연 가격 차이도 많이 날 수밖에 없다. 참꼬막은 고급 종이라 제사상에 올라가서 '제사꼬막'으로도 불렸다. 골이 깊고 껍질이 두꺼운 참꼬막을 옛 문헌에는 기왓골을 닮았다고 하여 와농자(瓦壟子)라고도 했다.

"거시기 짬뽕, 참 거시기 하네"

시장 중간쯤 오니 작년에 먹었던 중국집이 보인다. 북적댔던 작년과는 달리 장날이 아니어서 그런지 손님이 별로 없다. 이 집을 기억하는 건 아주 재미나는 메뉴 때문이다. 그 메뉴인즉 흔히 보는 짬뽕인데 이 집에선 '해물 짬뽕'이라는 이름의 메뉴가 10여 가지나 된다.

메뉴판을 이리 보고 저리 봐도 열 가지나 되는 짬뽕들의 차이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얼큰이해물왕짬뽕, 거시기해물왕짬뽕, 특해물왕짬뽕, 모듬해물왕짬뽕... 메뉴를 고를 수가 없어 하는 수 없이 종업원을 불러 물었다. 설명하려던 종업원도 갑자기 말문이 막혔는지 주인아주머니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밝은 미소로 의기양양하게 다가온 주인아주머니. 처음에는 잘 설명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헷갈려한다. 본인도 원체 많은 짬뽕 이름을 정확히 구별하기가 힘겨웠던 모양이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내어놓는 짬뽕을 주문했다. 잠시 후 큰 대야만 한 그릇에 꼬막과 홍합이 가득 든 짬뽕이 나왔다. 짬뽕 안 꼬막은 물론 새꼬막, 한참을 먹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 꼬막 먹기는 결국 포기. 면을 먹기 시작하는데 이런! 국물과 면, 꼬막, 홍합의 맛이 따로 논다. 뭔가 어설프다.

   

짬뽕 한 그릇을 먹고 일어서면서 나도 모르게 한마디 한다.

"참 거시기 짬뽕, 맛 한 번 거시기 하네."

가게를 시작한 지는 2년째라는 주인. 그의 말을 듣고 보니 맛이 깊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외지에서 왔다는데 마스크도 하고 나름 위생도 신경을 썼고 친절도 한 모습은 보기 좋았다. 메뉴를 조금 줄여서 맛을 좋게 하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말하고 시장으로 나왔다. 그것이 벌써 1년 전의 일이다. 오늘은 그냥 중국집을 지나치기로 했다.

시장 골목이 끝날 즈음 사람들로 북적대는 곳이 있었다. 국밥집. 역시나 <1박2일> 촬영지다. 값도 싸서 촬영 이후 장터 국밥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시장을 한 바퀴 돌고 나니 시장기가 온다. 벌교까지 왔으니, 아니 매번 오는 곳이지만 꼬막을 맛봐야 할 터, 그중 한 식당에 들렀다. 벌교를 열 번 넘게 다녀갔으니 꼬막을 먹어본 식당만도 여섯 군데가 넘는다.

벌교까지 왔으니 꼬막을 제대로 맛 보아야...

   

지금이야 벌교에서 어느 음식점을 가더라도 삶은 꼬막, 꼬막전, 꼬막무침, 양념꼬막이 메인으로 나온다. 참꼬막은 삶는 방식부터 다르다. 푹 삶으면 절대 안 된다. 살짝 데치듯 핏기만 가는 정도로 삶아야 한다. 그래서 약간 비릿하기도 하다. 비위가 약한 이들은 많이 먹지 못하지만, 마니아들은 이 비릿하고 짭짤한 맛에 환장하게 된다.

꼬막무침은 비릿함을 마뜩잖게 여기는 사람에게 좋다. 대부분의 무침이 그렇듯 시큼하니 매콤한 맛이 입안을 상큼하게 한다. 양념꼬막은 우리가 가장 자주 먹는 것으로 물론 새꼬막으로 요리한 것. 새꼬막은 참꼬막에 비해 성장 속도도 배나 빠르고 가격도 훨씬 싼 편이라 부담 없이 즐기기에 좋다. 참꼬막에 비해 조금 오래 삶아 비릿한 맛도 덜한 데다 양념까지 되어 있으니 누구나 먹기에 좋다.

그나저나 벌교에서는 참꼬막이든 새꼬막이든 그리 오래 삶지 않는다. 오래 삶으면 특유의 탱글탱글한 속살이 없어지고 풍미도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이다.

여행자가 이번에 찾은 곳은 예전에 몇 번 갔었던 불친절하지만, 맛은 있는 '역전식당'. 소설가 조정래씨도 이곳을 다녀간 모양이다. 벽에 그의 사진과 사인이 걸려 있다. 작년 2월과 11월에는 꼬막정식을 먹었고 이번에는 짱뚱어탕도 같이 맛보았다.

작년에 들렀던 '국일식당'은 원래 40년 넘게 백반집으로 유명했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턴가 꼬막정식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벌교 어디서고 꼬막정식이라는 이름의 특이한 음식문화가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임권택 감독이 영화 <태백산맥>을 촬영할 때에 제작진과 함께 자주 밥을 먹으면서 소문이 나 유명세를 탄 식당이다. 여행자가 찾은 날에는 마침 참꼬막이 다 떨어져 새꼬막밖에 없다고 했다. 음식은 대체로 투박한 편이다.

꼬막으로 배를 채운 여행자, 태백산맥거리를 어슬렁어슬렁 걷기 시작했다.

   

너른 중도 벌판의 갈대밭을 지난 진한 갯내음이 벌교역까지 불어왔다. 광장 한편에 벌교역장이 세운 비석에는 '벌교'라는 이름이 '뗏목을 엮어 만든 다리'에서 유래되었다고 적혀 있다. 역 앞 광장을 나오자마자 여자만의 보물이라 일컫는 꼬막이 길가 여기저기에 널브러져 있다.

4일과 9일에 열리는 벌교오일장을 구경하고 '소설태백산맥문학거리'로 향했다. 굳이 태백산맥이라는 이름이 아니더라도 한때 번성했던 이 소읍에선 옛 영화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한 거리에 서면 일제강점기나 해방 직후의 부산했던 벌교 읍내거리를 자연 떠올리게 된다. 벌교역에서 소설 <태백산맥>의 김범우의 집까지 걷기로 했다. 그냥 쉬엄쉬엄 걷는 데에만 30여 분은 족히 걸리니 구경이라도 제대로 할 요량이면 발걸음을 재게 놀려야 한다. 그럼에도 걸음은 옛 시간의 흐름에 맞추느라 자연스럽게 느려졌다.

벌교역에서 출발하여 차부 터(현 벌교우체국), 솥공장 터(현 대창기계), 보성여관(남도여관), 삼화목공소, 벌교초등학교, 벌교금융조합(현 농민상담소), 청년단 건물 터, 채동선 기념관, 채동선 생가, 자애병원(현 벌교어린이집), 송광사벌교포교당, 벌교 홍교를 건너 김범우의 집까지 갔다. 다시 소화다리와 중도방죽을 지나 태백산맥문학관과 현부잣집, 소화의 집을 보면 얼추 문학기행은 끝이 나는 셈이다.

벌교의 스타킹, 예순다섯 목수의 노래.

"쉿"

앞서 걷던 아이가 갑자기 멈춰 섰다.

   

"무슨 일인데?"
"……."

아이와 아내는 입에 갖다 댄 손가락에 잔뜩 힘을 주고 제발 좀 조용히 하라는 시늉으로 안간힘을 쓴 채 목공소 안쪽을 뚫어져라 살피고 있었다.

이윽고 귀에 들어온 익숙한 음악소리.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목공소에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예의 그 쓱싹쓱싹 대패질 소리하며 쿵쿵쿵 탕탕탕 망치질 대신 가곡이 흘러나오다니…. 목공소 주인의 취향이 제법 고상하군, 어디 LP판이나 틀어두었나, 하며 각종 목재가 어지러이 널린 목공소 안을 들여다보다 나도 모르게 흠칫 놀랐다.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노래의 주인공은 오디오가 아닌 중년의 사내였다. 제법 커다란 안경 너머로 흰자위를 드러낸 그의 눈은 목재 이곳저곳을 보느라 여념이 없었는데 입에는 중후한 노랫소리가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언제 지었는지 알 수 없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천장 서까래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위태했다. 사내는 이리저리 바삐 몸을 움직였다. 인기척을 내자 그제야 고개를 들더니 무슨 일이냐며 눈짓으로 물었다.

"엄~악이 좋다고라. '음악'을 '엄악이라 하는 거 보니 경상도사람이구먼."

노래하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는 듯 사내는 연삭기로 나무를 자르면서도 연신 흥얼거렸다.

"여기가 벌교여. 전라도 벌교 말이여. 채동선이가 이짝 사람인디 소리 한가락 못해서야 쓰것능가."

아주 익숙하게 손을 놀리면서 벌교사람이면 이 정도쯤은 다 부른다는 투로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노래를 청하자 하필 오늘 감기가 걸렸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러고는 잠시 침묵….

"정지용의 '향수'는 너무 길어. 대신 그 뭐시기냐. 손승교의 '옛날은 가고 없어도'를 불러 보죠 뭐. 더듬어 걸어온 길 피고 지던 발자국들 / 헤이는 아픔 대신 즐거움도 있었구나 / 옛날은 가고 없어도 새삼 마음 설레라 / 옛날은 가고 없어도 새삼 마음 설레라~♬"

목공소 안을 쩌렁쩌렁 울리던 그의 노래가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그제야 목공소 한쪽에 서너 명의 사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는 언제 노래했느냐는 식으로 다시 연장을 들었다.

"스타킹에 한 번 나가보시죠? 대단한 실력입니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서 가끔 불러요. 근데 목수가 무슨 방송에…. 내 일이 천직인디…."

삼화목공소 왕봉민 사장과의 만남은 그렇게 노래로 시작됐다. 그의 나이를 묻고 나서 여행자는 다시 한 번 놀랐다. 올해 예순다섯. 도저히 외모로는 그가 올해 65세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선생은 올해 몇 살이오? 아마 모르긴 몰라도 작가 양반 나이보다 내가 목수 짓 한 지가 더 오래 되었을 거요. 저기 있는 직원이 나와 같이 일한 지도 벌써 30년이 넘었수다."

2대에 걸쳐 목공소 일을 해왔다는 그가 이곳에서 목수로 일한 지는 50년이 넘었다고 했다. 천장 서까래만 봐도 이 집이 얼마나 오래되었는가를 알 수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보성여관이 벌써 한 80년 안 되어가요. 소화 10년인 1935년에 보성여관이 지어졌으니께 우리 집은 소화 16년인 1941년에 지어졌다 말이요."

그의 기억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왕씨는 교회 성가대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노래를 하도 잘해서 여행자가 이력을 집요하게 묻자 돌아온 답이었다. 벌교 제일교회 소속 성가대 일원이란다. 그제야 손전화기를 꺼내더니 자신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여 줬다.

"이렇게 말쑥하게 차려 입고 불렀어야 하는디…."

그는 아쉬워하면서도 목공소 한쪽에 있는 사람들이 친구들이라며 이 사람들도 사진에 담으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와의 짧은 시간 동안 여행자는 무한한 긍정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가 왜 그리 멋있는지, 나이에 비해 외모가 왜 유난히 젊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다음에 벌교 오시면 꼭 한 번 더 들러요. 저기 바깥에 있는 것이 뭔 줄 아요. 맞소. 풍로요. 잘 아시네. 원래 내가 그런 걸 잘 만드는디…. 한옥 문살 만들 때 오면 정말 기가 막히는데…. 그때 꼭 한 번 오소."

아직 벌교 일대를 둘러볼 것이 많이 남아 있어 작별을 고해야 할 시간, 그도 여행자도 짧은 만남이 못내 아쉬웠다. 목공소를 나섰다. 차가운 공기를 비집고 내린 햇살이 길바닥에 번득거렸다. 쓱싹쓱싹 쿵쿵쿵 탕탕탕, 연장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그의 노랫소리가 다시 태백산맥 거리로 나직이 흘러나왔다.

80년 된 5성급여관에서의 하룻밤 어때요

작년 2월에 왔을 때에는 남도여관은 한창 공사 중이었다. 뿌연 먼지가 가득 낀 창틀 너머로 뚱땅뚱땅 요란한 소리가 쉼 없이 들렸었고 아이는 그 소리의 정체가 궁금해 바짝 창으로 뛰어갔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만 해도 이미 외관은 얼추 제 모습을 갖춘 상태였고 실내 공사만 남겨두고 마무리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던 걸로 기억된다.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이라고 적힌 푯말 아래로 검은 바탕에 하얗게 새긴 '보성여관'이란 글씨가 선명하다. 용자 살 모양을 한 출입문은 묘한 추억을 불러 일으켜 문을 여는데 잠시 주춤거렸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카페. 예전에 쓰던, 꽤나 익숙하고 정겨운 교과서와 책들이 입구 선반 한곳에 모여 있다. 선반 너머론 제법 안온하게 보이는 작은 방이 조명 아래 제법 따뜻하게 공간을 차지하고 있다. 창 쪽으로 낸 긴 탁자에는 허리가 둥근 의자 대여섯 개가 열 지어 있어 느긋하게 등을 기대어 창밖 풍경을 보며 차 한 잔을 즐길 수 있겠다. 여기서 하룻밤을 잔 이들은 다음날 아침식사를 이 앙증맞은 카페에서 먹는 호사를 누리게 될 것이다.

'보성여관', 원래 이름보다 남도여관으로 더 알려져 있다. 검은 판자벽에 함석지붕을 인 전형적인 일본식 2층 건물인 보성여관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의 중심거리로 '본정통'이라 불렸던 벌교의 중심거리에 있다. 소설 <태백산맥>의 배경이 되면서 실제 상호인 보성여관보다는 '남도여관'으로 뭇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됐다.

소설 속에서 경찰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숙소로 썼던 곳이 바로 남도여관이다. 벌교·보성지구 사령관 심재모가 임만수를 꾸짖으며 남도여관에 주둔하고 있는 토벌대를 당장 남국민학교로 집합시키라고 명령하는 장면이 소설 속에 나온다.

"…그런데, 네놈들은 속죄의 기간을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더구나 다시 권력조직에 포함되고 말았으니 모두가 네놈처럼 안하무인의 짓을 하는 것이야. 여관잠을 자고 여관밥을 먹다니, 네놈은 그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영창감이야!" "그가 벌교에 열흘 정도 머무는 동안 벌교의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보성의 지주들까지 남도여관의 뒷문을 드나들었다"는 구절이 나올 정도로 벌교에선 알아주는 여관이었다. 당시에는 별 다섯 개 5성급호텔이었다. 여관 뒤편에 있는 벌교초등학교는 빨치산의 인민재판 처형장이었다.

카페를 나와 전시공간을 둘러보고 있는데, 안내를 자청하는 이가 나타났다. 남도를 닮은 예쁘장한 아가씨였다. 명함에는 다소 생소한 '문화유산국민신탁 보성여관'이라고 적혀 있었고 그녀는 김성춘 매니저라고 본인을 소개했다. 원래 이런저런 설명을 듣는 것을 귀찮아하는 성미라 전시장은 그냥 설명 없이 관람하기로 하고 곧장 숙박동이 궁금해 그리로 가자고 했다.

이동을 하는 잠시의 짬이나마 그녀는 설명을 했고 나는 잠자코 듣기 시작했다. 보성여관은 1935년 건립됐고 한옥의 특징과 일식이 혼합된 양식이란다. 2층짜리 일식 목조 1동과 한식 벽돌조 1동으로 구성됐다. 조정래의 <태백산맥>에 남도여관으로 등장했고 해방 후에도 여관으로 운영되다가 1988년부터 상가 등으로 사용되다 2004년 12월에 근대사적·생활사적 가치가 인정되어 등록문화재(제132호)로 지정됐다. 2008년 문화재청이 사들여 문화유산국민신탁을 관리단체로 지정하고 2009년 말부터 2년여의 복원공사를 마치고 2012년 6월 7일에 재개관했다고 한다.

   

그제야 명함에 적힌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것이 이해가 됐다. 1층은 보성여관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공간과 소극장, 카페로 정기문화행사를 열고, 2층은 다목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꾸며져 세미나, 발표장 등으로 활용된다. 한옥은 숙박 체험 장소로 조성돼 얼마 전부터 손님을 받고 있단다.

따스한 햇볕이 내리쬐는 툇마루에는 소반 하나가 단아하게 놓여 있다. 소반 위에는 누군가 무심이 꽂아둔 꽃병이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싸릿대로 엮었을 법한 채반에는 고구마를 썰어 널어 말리고 있었다.

단풍나무·동백나무가 있는 소박한 정원과 낡은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방들이 들어찬 뒤채, 일본 전통 가옥 '마츠야'의 특징인 계단 딸린 2층에는 4칸짜리 다다미방이 들어서 있었다. 건물 사이의 중정에는 석류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곳에서 초등학교를 다닌 조정래 작가가 어릴 적에도 있었다고 하니 오랜 시간 여관과 함께 살아온 나무인 셈이다.

김성춘 매니저는 먼저 1층 숙박동을 안내했다. 숙박동에는 모두 7개의 온돌방이 있는데, 가격은 1박 2일에 8만 원대에서 15만 원대까지 있었다. 8만 원짜리 방은 공동화장실, 공동샤워실, 다용도실을 이용할 수 있었다. 10만 원, 12만 원짜리 방은 화장실이 별도로 있으며 15만 원짜리 방은 화장실과 별도의 작은 방(마루), 간단히 요리 할 수 있는 주방시설이 되어 있었다. 공간은 퍽이나 아늑했으며 일본 특유의 다다미방과 편백 향이 짙게 났다.

2층으로 올라갔다. 다다미방인 2층은 긴 복도로 연결된 4칸의 꽤 너른 방이 있다. 죽 드러누우면 50명은 너끈히 잘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인데 각종 세미나장이나 발표장으로 활용될 다목적 커뮤니티 공간으로 대관할 예정이란다.

다시 1층으로 내려왔다. 1월 14일부터 입장료 1000원을 받는단다. 여행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12일, 불과 이틀을 앞두고 방문한 것이 행운이 되었다. '태백산맥 문학의 길'에 있는 이 일본식 옛집은 남도 근대역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화려했을 보성여관의 질펀한 풍경이 앞서 지나가고 그 뒤를 보성과 벌교 지주들의 회합하는 장면이, 연이어 빨치산 토벌대의 군홧발 소리가 점점 가까이 울리는 듯하다.

소설 태백산맥을 따라 걷는 시간여행

보성여관을 지나면 '소설태백산맥문학거리'를 알리는 커다란 비가 있다. 제법 널찍한 골목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여기저기서 태백산맥의 흔적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등록문화재 제226호로 지정된 보성 벌교 농민상담소(옛 벌교금융조합)는 얼핏 봐도 아주 견고해 보인다. 1919년에 지은 붉은 벽돌의 이 건물은 그 위치 또한 번화가의 첫머리인 삼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소설에서는 일제강점기부터 금융조합에서 근무해온 조합장 송기묵이 치부에도 능하고 고리대금업까지 해서 재력을 확보해 딸을 서울 이화여대까지 유학시키지만 결국 좌익들에게 죽고 만다. 일제강점기에 기득권을 행사했던 친일파들이 해방 후에도 척결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소설 속 자애병원은 현재 어린이집이다. 병원장 전명환에게는 김범우도, 안창민도, 염상구도, 최서학도, 좌익도 우익도 아닌 그저 치료해야 할 한 사람의 환자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참된 의사의 모습도 끝내 해방정국은 그를 죽음의 위기까지 몰아가게 된다.

갑자기 골목 왼쪽이 탁 트이는가 싶더니 웅장한 건물이 나타났다. 채동선 음악당이다. 채동선 선생은 이곳 벌교에서 태어난 음악가이다. 작곡가이자 바이올린 연주자인 그는 가곡 <망향>, <모란이 피기까지는> 외에 현악 4중주곡, 바이올린 소나타, 현악 모음곡 등 주옥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그의 생가를 찾기는 수월하지 않았다. 분명 음악당 인근이라고 들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길가는 이에게 물었더니 따라 오란다. 자신을 통장이라고 한 사내는 대뜸 명함을 내밀었다. 명함에는 단 세 줄, 연락처와 제석수석원 정만기라고 적혀 있었다. 그제야 안 사실이지만 생가는 골목 안쪽에 있었고 길가에는 아무런 안내문이 없었다. 우진각 지붕을 한 기다란 건물 한 채와 마당 한편에 휑하니 놓인 우물이 전부였다.

거리의 끝에서 만난 벌교 홍교, 벌교라는 이름도 예전 이곳에 있던 뗏목다리에서 유래했다. 지금도 사용하는 이 다리는 보물 제304호로 무지개 모양의 홍교 중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있다. 썰물 때에는 다리의 밑바닥이 거의 드러나고 밀물 때에는 대부분이 물 속에 잠겨버릴 정도로 이곳에는 바닷물이 쉼 없이 드나든다. 처음에는 뗏목다리를 놓았다가 1729년에 선암사의 초안선사가 석교를 세워 1734년에 완공되었으며, 그 뒤 1737년에 다리를 다시 고치면서 3칸의 무지개다리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홍교를 건너 부용산을 되돌아보았다. 이곳에는 <부용산> 노래비가 있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라는 서정적 가사로 돼 있는 노래 '부용산'은 이곳 출신 박기동 시인이 1947년 24세에 요절한 누이 박영애를 추모해 지은 시다. 근데 이 노래를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고 작곡자 안성현(그는 그 유명한 동요 '엄마야 누나야'를 작곡했다)이 월북하자 금지곡이 되어 버렸다.

다리를 건너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김범우의 집은 마치 성채 같았다. 어른 키 몇 곱절은 될 것 같은 훌쩍 높은 담장하며, 담장 주위로 해자처럼 도랑이 둘러쳐 있어 개미 한 마리 얼씬하기도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다.

소설 <태백산맥>에서 품격 있고 양심적인 김사용과 그의 아들 김범우의 집으로 나오는 이곳은 원래 대지주였던 김 씨 집안 소유였다. 조정래 작가가 초등학생일 때에 이 집 대문 옆에 딸린 아래채에서 이 집 막내아들과 자주 놀았다고 한다.

지금은 비록 쇠락하여 성한 곳이 없지만 사랑채, 안채, 겹안채, 아래채, 장독대. 창고 터 등을 보면 당시의 대단했던 대지주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다. 그럼에도 이곳에 있는 돼지우리의 흔적에서 음식 찌꺼기를 함부로 버리지 않은 대지주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과분한 땅이라고? 이 사람아, 요 정도가 내가 지닌 땅 중에서 젤로 나쁜 것이네. 눈 볽은 우리 선대의 유산이 어련허겄는가. 맘 쓰지 말고 밭 일구도록 허게. 허허허허…."

소화다리는 원래 부용교라는 이름이 있었다. 다리가 만들어진 것이 1931년, 그러니까 그때가 소화 6년인가 해서 누군가 소화다리로 부르면서 다리 이름이 됐다. 이 다리도 여순사건과 한국전쟁의 대격랑을 피해 가진 못했다. "소화다리 아래 갯물에고 갯바닥에고 시체가 질펀하니 널렸는디, 아이고메 인자 징혀서 더 못 보겠구만이라…. 사람 쥑이는 거 날이 날마동 보자니께 환장 허겄구만요." 소설 <태백산맥>에 나오는 그 처참한 상황을 떠올리니 돌연 콘크리트 다리가 핏빛을 머금은 붉은 회색빛으로 보였다.

   

중도방죽으로 나왔다. 경전선이 지나는 철길, 문득 소설 속 염상구가 떠오른다. 철다리 가운데 서서 끝까지 버티던 염상구, 결국 싸움에 진 깡패두목 땅벌은 옛 부하의 전송 아닌 감시 속에서 고리짝만 한 크기의 가방 하나를 들고 광주행 열차에 몸을 싣게 된다. 해가 뉘엿뉘엿 철다리 너머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여행자도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서둘러 방죽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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