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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이 만난 사람]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67세 성공한 사업가가 요리학원 다니는 까닭

김주완 편집국장 wan@idomin.com 입력 : 2013-03-17 12:02:47 일     노출 : 2013-03-17 12:02:00 일

‘오로지 일에 미쳐 멋과 풍류도 모를 것 같은 사람.’

‘사업가’ 또는 ‘기업인’에 대해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선입견은 이럴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술을 마시거나 골프를 쳐도 좋아서라기보다 비즈니스 때문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효중 포스텍 대표, 한철수 고려철강 대표, 박영빈 경남은행장,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 등을 알게 되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다들 음악에 관한 관심과 사랑, 조예가 남달랐던 것이다.

특히 최충경(崔忠坰·1946년생) 회장은 단순한 애호가 수준을 넘어 색소폰과 클라리넷, 트럼펫, 피아노 등 4가지 악기를 다루는 전문가급 음악인이다. 그는 1991년부터 창원시윈드오케스트라(전 마산관악합주단) 단원으로 활동하면서 5·6대 단장을 지냈다. 또 1996년부터 경남재즈오케스트라에서도 알토 색소폰 연주자로 활동해왔다. 1997년에는 비엔나 국립음대 썸머스쿨에서 클래식 색소폰 디플로마 과정을 이수하기도 했다.

   
  경남재즈오케스트라에서 색소폰 연주.  

부잣집에서 태어나 어릴 적부터 악기를 가까이했다거나 음악을 전공한 것도 아니다. 대학은 행정학과를 나왔고, 석사와 박사과정은 경영학을 전공했다. 학사장교(ROTC) 출신 육군 중위로 전역 후 잠시 외항선 항해사 생활을 거쳐 9년간 삼성전자 영업부에서 일하다 1982년부터 줄곧 철강업에 종사해온 사람이다. 지금 그가 대표이사 사장으로 있는 경남스틸(주)은 냉연강판을 절단·가공하는 철강회사다. 차갑고 강한 철강과 부드러운 음악의 조합이라…. 뭔가 어색하다.

좀 미안한 말씀이지만, 투박한 말투나 외모도 음악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게다가 그는 요즘 요리학원에 다니고 있다. 조리사 자격증 취득이 목표다. 그걸로 뭘 하려는 것일까?

궁금했다. 그동안 언론에 보도된 그에 대한 기사는 대부분 ‘기업 이익의 10% 사회 환원’ 등 기부 활동과 강소기업 경남스틸(주)의 투명 경영과 높은 복리후생 수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하지만 이번 인터뷰에서는 최충경이라는 사람을 더 깊이 알고자 하는 데 집중했다.

   
  경남재즈오케스트라.  

다섯 살 때 아버지를 여의다

-태어나신 곳은 대구 동구 입석동이죠?

“네. 거기서 5대째 살았습니다.”

-아버지께서 네 살 때 돌아가셨다던데.

“정확히는 다섯 살 때였습니다. 제 동생이 두 살 때였으니까, 두 살, 다섯 살, 여덟 살, 열 살, 열세 살…. 이렇게 5남매를 남겨두고 돌아가셨죠.”

-아버지는 어떻게….

“50년대 금융조합이라고 있었는데, 이후 금융개편 되면서 하나는 기업은행이 됐고, 하나는 오늘날 농협이 되었죠. 그 금융조합에 이사로 계셨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아마 간 디스토마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요즘 같으면 돌아가실 병도 아닌데…. 어머니가 참 힘드셨겠네요.

“워낙 낚시 좋아하시고 날고기 좋아하시다 보니…. 돌아가실 때 3남 2녀를 두셨는데, 모친은 서른둘에 청상과부가 되신 거죠. 그렇게 되니 얼마나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모친이 당시 양계도 하고 학교 근처에서 하숙도 쳤죠. 그 때는 워낙 물자가 귀하던 50년대니까 학교 공부보다는 우선 먹고 사는 게 급한 시절이었죠. 그래도 형은 공부를 잘해 입주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의과대학을 갔고, 위에 누님은 당시 사범학교에 갔었어요. 그 때 사범학교는 들어가면 전부 공짜였죠. 또 다른 누님 한 분은 간호대학에 갔는데, 거기도 또 공짜였어요. 전부 자기가 벌어서 갈 수 있는 데로 갔죠.”

-그럼 아래 동생은?

“제 밑에 동생은 삼성테크윈에서 부장하다가 퇴직해서 지금 우리 회사에 와 있습니다. 걔는 두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아버지 얼굴도 모르지.”

-최 회장님도 어린 시절이 힘들었을 것 같은데.

“나는 삼덕초등학교를 나왔는데, 최근에 신문을 보니 박근혜 당선인이 그 학교를 나왔더라고요. 큰 빽 하나 생겼어요.(웃음) 경북중학 다닐 때 김세철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나중 비뇨기과 분야에선 우리나라에서 최고 권위자가 됐죠. 그 친구의 아버지께서 대구상고 교감선생님으로 계셨어요. 김관익이라는 분인데, 그 분이 저를 잘 돌봐주겠다며 대구상고 진학을 권했어요. 그 분이 학교와 관계있는 출판사에 저를 소개해주셔서 거기서 사환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며 다녔죠.”

-낮에는 출판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야간에 학교 다니고?

“그렇죠. 그 때 김관익 선생님이 왜 대구상고로 오라고 했냐면, 상고 나오면 은행에 취직이 되었거든요. 그 때도 은행이면 상당히 좋은 직장이었으니까. 그런데 2학년쯤 되니까 대학 갈 학생들만 모은 진학반이라는 게 있더라고요. 그 때 선생님이 대학 진학을 권유했고, 그 때부터 대학 갈 마음을 먹은 거죠.”

-3학년 때 진학반으로 들어간 건가요?

“그렇죠. 그 때가 1964년이었어요. 당시 대구에는 경주 최부잣집에서 마지막 재산을 털어넣은 대구대학이 있었고, 청구대학이라고 또 사립대학이 있었는데, 청구대학은 증축을 하던 중 큰 사고로 무너진 일이 있었죠. 그래서 도저히 청구대학이 독자적인 운영이 어려워졌을 때 두 대학을 합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 박정희 대통령이 개입했어요. 그렇게 두 대학이 합쳐서 만든 게 영남대학이죠.”

-삼성 이병철 회장이 대구대학을 운영하던 시기도 있었잖아요.

“그렇죠. 삼성이 운영하던 기간이 2~3년 정도였는데, 우리가 바로 그 때 들어갔어요. 삼성이 대구대학을 인수하면서 삼성장학생으로 뽑히면 4년간 학비 면제에 하숙비와 책값까지 다 대주는 조건이었어요. 졸업과 동시 삼성에 취업도 보장했죠. 그 때만 해도 서울 가서 하숙하며 학교 다시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는데, 그래서 대구대로 간 거죠.”

삼성장학생으로 대구대에 입학하다

기록을 찾아보니 경주 최부잣집이 삼성 이병철에게 대구대를 넘긴 건 1964년이었고, 이후 1966년 삼성 소유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사건’이 터진다. 곤경에 처한 삼성은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한다고 발표했고 이어 대구대도 포기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청구대는 이미 박정희 정권의 주요 인사들에게 운영권이 넘어가 있는 상태였고, 박 정권은 1967년 12월 22일 대구대와 청구대를 통합, 영남대를 출범시켰다. 이로써 최부잣집 소유 재산은 모두 영남대 소유로 넘어갔고, 이후 정수장학회로까지 이어진다.

-그럼 회장님도 그 때 삼성장학생이었겠네요?

“그렇죠. 100% 지원을 받았죠.”

-대학 다닐 때 공부는 잘 했나요?

“그러진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했으면 행정고시를 했겠죠. 삼성에 입사가 보장되어 있으니까…. 그래서 군대 문제를 빨리 해결해야 했어요. 우리 때만 해도 ROTC를 하면 26개월이었어요. 일반 군인으로 가면 36개월이었는데. 지금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먼저 군대에 갔죠.”

-그래서 69년 입대하여 71년에 전역하셨군요. 어느 사단에 근무했나요?

“통역장교로 갔는데, 26사단이었어요. 내가 모셨던 분이 유학성 장군이라고 그 때 날리던 분이었지. 내가 갔을 때 월남 파병 십자성 부대장을 마치고 26사단으로 왔죠.”

-당시 군대에서 만나 인연으로 이어진 분들이 많더라고요? 삼현철강 조수익 대표도 그렇고…. 결국 손위 처남이 되었죠?

“그렇습니다. 처남은 연세대학교를 나와서 38사단장 하던 이희성이라고 나중에 계엄사령관도 했죠. 그 양반 전속 부관을 했어요.”

-어쨌든 그렇게 알게 된 인연이 평생 이어지게 되었네요.

“그렇죠. 처남은 제대하고 포항제철로 들어갔고, 나는 삼성으로 가게 됐는데, 그런 인연이 되어가지고 우리 와이프를 만나게 됐죠. 와이프는 그 때 이화여대를 다니고 있었는데, 처남이 소개를 한 거지.”

   
  결혼전 대구 자택에서 형님이랑 모친.  

군대에서 만난 사람, 인생 바꾸다

-조수익 대표가 최 회장님의 어떤 점이 마음에 들어 자기 여동생까지 소개하게 되었을까요?

“그건 모르지. 처갓집에선 반대를 많이 했죠. 장인어른(조영호·1914~2012)은 작년에 돌아가셨는데, 충북의사회 회장을 했거든요? 99세로 돌아가셨어요. 경북의대 1회 졸업생이고, 의사로서 충북 영동이라는 곳에서 평생을 시골 사람들을 위해 의료봉사를 해오신 분이죠. 봉사를 많이 한 의사들에게 주는 보령의료봉사상 대상도 받으셨죠. 그런 분인데, 사윗감이라고 해서 보니 영남대라는 지방대 출신인데다, 아버지도 없지, 재산도 별 없는 것 같지…. 찬성할 이유가 사실 없었던 거죠. 그런데 조수익 대표가 ‘내가 내 동생을 아무데나 추천하겠느냐’ 그래서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조수익 대표가 왜 동생을 소개했을까요?

“아! 이제 생각 나네요. 통역학교 가기 전에 전주에 있는 35사단에서 기초군사훈련을 4주동안 받는데, 그 때 나는 촌놈이니까 등산도 많이 해봤고 고생도 해봤지만, 조수익 대표는 부잣집 아들이다 보니 맨날 집합할 때도 뒤에 처지고, 짐 메고 가다 천막 치는 것도 쩔쩔 매고…. 그 때 내가 옆에서 많이 도와줬고, 그래서 좋게 본 것 같기도 하네요.”

-그렇군요. 이후 부인과는 연애 기간이 얼마나 됐나요?

“그러고 나서 서울에 있는 통역학교로 가게 됐는데, 이번엔 반대로 제가 촌놈이다 보니 서울에선 갈 데가 없잖아요. 그래서 토요일에 조수익 대표가 자기 집에 나를 데리고 간 거지. 서교동 홍익대 앞에 집이 있었는데, 그렇게 해서 자연스럽게 만나 영화도 보고 당시 동대문야구장에 야구도 보러 가고 그러면서 한 3년간 연애를 하게 된 셈이죠.”

-조수익 대표는 어떻게 철강회사를 창업하게 된 거죠?

“포항제철에 있던 중 부산과 경남이 분리됐어요. 당시 포철이 판매 강화 센터를 시·도 단위로 하나씩 뒀는데, 분리되면서 경남에 센터가 하나 더 생기게 된 거죠. 처남이 당시 박태준 씨 비서실에도 좀 있었고, 그런 인연으로 센터를 하나 따낸 거죠. 그래서 사업을 해보려고 하니까 여러 가지 어려움도 많고 해서 나에게 함께 해보자고 제의를 해왔어요. 당시 나는 삼성에 있을 때였는데, 주식을 30% 정도 할애할 테니까 동업 형식으로 와서 함께 하자고 해서 삼성전자에 사표를 내고 여기 와서 합류를 한 거죠.”

항해사 되어 해외 문물에 눈 뜨다

-결혼은 언제 하신 겁니까? 삼성전자 입사하실 때?

“결혼은 1973년도에 했어요. 삼성 입사는 1974년이었고….”

-그러면 71년에 군 제대하고 삼성에 입사하기 전까진 뭘 하셨나요?

“군 제대 후 상선을 타고 항해사로 근무한 적이 있었죠. 부산 영도구 동삼동이라고 거기에 해양대학이 있었는데, 당시 해양대학 정원이 200명밖에 안 되었어요. 그런데 해외 나가는 상선이 많았는데, 항해사 수요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거죠. 그래서 박정희 대통령이 묘안을 낸 게, 장교로 제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해양대학에서 1년만 항해사 과정을 수료하면 항해사 자격증을 주도록 했어요. 그 때만 해도 항해사가 되면 삼성에서 주는 월급의 열 배를 받았죠. 게다가 상선을 타면 100% 외국에 나가게 되니까, 외국에 대한 선망에다 높은 월급 때문에 장교출신들이 항해사가 많이 되었죠. 당시 나도 그렇게 1년을 수료하고 갑종 2등 항해사 자격을 땄고, 일본 센다이에서 캐나다까지 오가는 오리엔탈 킹이라는 6만 5000톤 배를 타고 2등 항해사로 근무를 했죠. 원목 실어 나르는 배였는데, 거기서 1년 반에서 2년 정도 배를 탔죠.”

-삼성보다 월급도 훨씬 많고, 당시로선 가기 힘든 외국도 다니는데, 왜 그만두게 됐나요?

“이야기하려면 좀 긴데….(웃음) 우리 형님이 의사였고 형수는 약사인데, 당시 의사들이 미국 가는 게 유행이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의사 이민을 가게 되었어요. 그러다보니 딸도 시집가버리고 혼자 계신 모친이 살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나라도 국내에 있으면서 모친을 보살펴야 했고, 그런데다 처갓집에서도 ‘배를 탄다면 결혼은 곤란하다’고 해서….”

   
  창원상공회의소 회장./박일호 기자  

-그 시절 외국에 나가본 경험들이 이후 인생을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었겠네요?

“큰 도움이 됐죠. 내가 악기를 하게 된 것도 그게 계기가 됐어요. 원목선을 타고 캐나다로 가는데, 바다에서 23일, 원목 내리는데 23일이 걸렸어요. 그러니까 23일 동안 뭘 하겠습니까? 배가 딱 도착하면 항해사는 배하고 관계없습니다. 캐나다 온 동네를 돌아다니며 외국의 문물을 익히게 됐죠.”

네 가지 악기 익히고, 조리사에 도전

-항해사 자격증에 대한 궁금증은 풀렸는데, 요즘은 조리사 자격증에 도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건 왜 따시려는 겁니까?

“글쎄. 주위 사람들도 그걸 묻던데, 그걸 왜 묻는지 이해가 안 가요.(웃음) 산업인력공단에 (조리사) 시험 치러 갔는데, 공단 지사장이 내 얼굴을 아니까 어떻게 오셨냐고 물어요. 그래서 거짓말 할 수도 없고 해서 소문이 났는데, 글쎄요. 나는 배 탈 때도 특별히 좋아하는 음식이 있으면 슈퍼에 가서 재료를 사와가지고 직접 해먹고 했어요. 외국에 다니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가 ‘악기를 하나 배워야 겠다’는 거였고, 또 하나가 요리였어요. 당시 외국의 선교단체 사람들이 선교 목적으로 자기 집에 데려가서 요리도 해주고 하는 걸 봤어요. 그 때 보니까 남편이나 아내 가리지 않고 다 같이 요리를 하더라고요. 그것도 그렇고, 평생 마누라한테 밥을 얻어먹었는데, 이제 내가 요리를 배워서 신세를 갚는 것도 좋은 일이고, 친구들이 와도 내가 맛있는 요리도 해주면 좋잖아요.

내가 이화요리학원에 다녔거든요? 다니며 느낀 건데, 조리사 시험이 다섯 가지가 있어요. 한식 중식 일식 양식, 그리고 복어 이렇게 다섯 가진데, 나는 양식을 했는데, 요리 솜씨도 중요하지만 역시 음식은 재료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이 재료가 좋은 건 비싸요. 음식점에선 비싼 재료를 쓸 수가 없어요. 쓰면 마진이 없고…. 그래서 내가 조리사 자격을 따서 좋은 재료를 가지고 요리를 하면 정말 좋은 음식이 될 수밖에 없잖아요. 마누라한테도 요리로 서비스하고, 자식들 손자들 오면 할아버지가 요리해주고, 친구들도 불러다가 와인 한 잔 놓고 요리해서 즐기면 좋지 않습니까? 그래서 지난 번에 우리 상공회의소 회의할 때 직원들 모두 조리사 자격증 따자고 했더니 아직 직원들 반응은 시큰둥하네요.(웃음)”

   
  창원상공회의소 회장./박일호 기자  

-듣고 보니 그렇네요.

“한 번 두고 보십시오. 내가 25년쯤 전에 악기를 배울 때, 산호동 용마맨숀에서 시끄럽다는 욕을 듣기도 했는데, 주위에서도 ‘딴따라처럼 나발이나 불고 저러다 곧 사업도 망할 거다’라는 말들이 있었어요. 그런데 한 10년쯤 지나니까 ‘시간 있으면 저런 취미도 괜찮지’ 하는 시선으로 바뀌더니, 지금은 내 주위 우리 또래 사람들이 ‘지금 내가 배워도 되겠냐’고 물어오는 경우가 많아요. 세상이 바뀐 거죠. 요리도 그럴 겁니다. 5년, 10년만 지나면 요리 배우는 남자들이 엄청 많아질 겁니다. 프랑스 사람들의 상류사회 조건에 악기 연주를 할 줄 알아야 하고, 잘 하는 요리가 있어야 한다잖아요. 악기나 요리라는 게 나쁠 게 없잖아요.”

-요리 중 특별히 잘하시는 건 뭔가요?

“뭐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웃음) 조리사 자격을 치려면 운전면허와 똑 같이 먼저 필기시험을 쳐야 합니다. 이것도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게 되고 나면 실기시험을 치는데, 서른여덟 가지 요리를 다 할 줄 알아야 해요. 시험 치는 날 제비뽑기를 하여 서른여덟 가지 요리 중에서 나온 두 가지를 각각 30분 동안에 해야 하거든요. 그렇게 해서 합격하려면 그 서른여덟 가지 요리를 적어도 두세 번은 해봐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필기시험 합격 후 2년 안에 실기 합격을 못하면, 필기부터 또 다시 해야 해요. 나는 아직 실기 합격은 못했어요. 세 번 쳐서 떨어지고 네 번째 도전하고 있는 중이죠.”

-필기 유효기간이 언제까진가요?

“올해 말까진데, 시험 치러 오는 사람들 보면 저 말고는 모두 자격증 따서 취직하려는 친구들이죠. 그 친구들은 목숨 걸고 하는데, 그래도 실기 합격률이 30% 정도밖에 안 돼요. 그만큼 어렵다는 거죠.”

-이왕 말 나온 김에 악기 배운 스토리도 좀 말씀해주시죠.

“(항해사 마치고 삼성에서 일하다가 조수익 대표가 창업한) 삼현철강이란 회사에 전무로 왔어요. 처음엔 삼현철강이라는 개인회사였고, 내가 온 2년 후에 법인이 되었는데, 아들 두 명 중 큰 애가 대원외고로 진학했어요. 초등학교 친구 집에서 다니면 된다면서 보내달라고 해서 보내줬죠. 그런데 동생도 또 대원외고에 따라 간 거예요. 그렇게 되니까 마누라가 ‘여긴 한 명이고, 서울엔 둘이니까 내가 서울에 가서 아이들 밥을 해줘야 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내가 당시로선 드물게 국내판 기러기 생활을 12년이나 했어요. 그래서 혼자 매일 밥을 해먹으니까 요리 실력이 늘 수밖에 없어요.”

-(웃음) 아, 그렇게 된 거로군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웃음) 게다가 토·일요일에서 서울 가는 게 어려웠어요. 당시로선 주 5일 근무도 아니고, 왔다 갔다 시간도 너무 많이 걸려서 거의 주말에도 마산에 혼자 있었단 말이에요. 그런데 혼자서 할 게 뭐 있습니까? 그 때 서른여덟인가 그랬는데, 나이는 젊지, 전무 정도 하니까 돈도 좀 있지, 그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게 여자, 노름, 술, 뻔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그 때 목표를 세운 게 ‘악기를 하나 배우자’는 것 하고, ‘대학에 가서 공부를 좀 더 하자’ 이렇게 두 가지였어요. 그래서 20년 넘은 재즈를 하게 된 계기가 됐고….”

기러기 아빠, 공부가 생활이 되다

-맨 처음 한 악기가 색소폰이었습니까?

“아니, 처음엔 클라리넷이었어요. 그 다음이 색소폰이었죠. 그래서 대학원도 진학하게 됐는데, 그 당시엔 대학원이 모두 주간이었고, 야간이나 주말에 하는 대학원은 유일하게 교육대학원이었죠. 대신 학기는 다섯 학기였고. 대부분 거기 오는 사람들은 중고등학교 교사들이었어요. 토요일 열두 시부터 밤 열 시까지 했거든요. 그래서 경남대 교육대학원에 들어가 교육학 석사와 중등 2급 정교사 자격을 땄죠.”

-프로필에는 보니 ‘경남대 대학원 경영학 석사’로 되어 있는데요?

“아닙니다. 교육학 석사를 받고, 그 다음에 경남대 대학원 최고경영자 과정을 했죠. 그 다음에 보니 창원대에 노동대학원이 생겼어요. 또 거기 들어가서 1회 졸업생으로 석사를 했죠. 그리고 나서 또 경영학 박사과정을 마쳤죠. 악기도 그렇고, 석사·박사과정을 한 것도 기러기 아빠를 하면서 그렇게 된 거죠.”

-나쁘게 쓸 수 있는 기회를 좋은 쪽으로 잘 활용하신 거네요? 그렇게 악기를 시작했고, 나중에 비엔나 음대까지 가서 배우셨잖아요.

“나도 한 번 시작하면 끝까지 해보자는 성격이어서 하다 보니까.(웃음) 당시 우리가 경남재즈라는 보컬을 만들었어요. 멤버는 대부분 프로들이고 학교 음악선생님들이 많았는데, 그 악단을 96년부터 쭉 해오던 중 이왕 하는 것 제대로 한 번 배워보자 해서 97년 여름에 모차르트 탄생 100주년인가 기념으로 재즈 색소폰 과정이 개설되었어요. 2주짜리 디플로마 과정이었죠. 그래서 여름에 휴가를 내고 비엔나까지 가서 배우고 온 거죠.”

-다시 앞으로 돌아가서, 군대 시절 조수익 대표도 만나게 됐고, 유재성 태창철강 사장도 군에서 사병으로 만났다면서요?

“우리 경남스틸 21년사를 봤나 보군요. 유재성이라는 친구는 어릴 적부터 아는 동네 친군데, 사병으로 입대해 사단장실에 당번병으로 있었고, 처남은 장교로 전속부관을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거에요. 처남 조수익 사장이 철강회사를 하게 된 계기도 유재성이란 친구와 관련이 있어요. 이 친구는 아버지가 왜정 시절부터 대구에서 유명한 철강회사를 하고 있었죠. 그래서 원래 조수익·유재성 두 사람이 처음엔 동업으로 시작했고, 이후 유재성 자리에 내가 들어가게 된 거죠. 유재성이란 친구는 이후 내가 조수익 사장과 아이템을 나눠 독립할 때 담보가 부족해서 사업을 접을까 하던 때에 큰 도움을 줬죠. 그 당시 13억이었으니 지금으로선 100억도 넘지 않겠습니까? 그 친구가 ‘너는 돈을 떼먹지 않을 것이다’는 믿음으로 그걸 보증을 해준 거죠. 그게 제가 사업을 하는 데 결정적인 디딤돌이 되었죠.”

-군에서 만난 조수익 대표와 유재성 친구가 최 회장님의 이후 삶을 결정하는 데 큰 도움이 된 거네요.

“어휴~. 상당한 도움이 됐죠.”

-삼성전자에 들어가셔서 자동판매기 프로젝트 때 과장도 하셨던데요. 처음 사원으로서 생활은 어땠나요?

“그 땐 삼성전자가 생긴 지 얼마 안 됐을 땝니다. 제일 큰 라이벌이 엘지, 그 땐 금성사였죠. 금성사의 세탁기, 냉장고, 텔레비전에 삼성이 모두 뒤졌거든요. 그래서 비서실에서 ‘금성사가 하지 않는 아이템을 개발해라’는 오더가 떨어졌어요. 그걸 하기 위한 상품기획팀이 만들어졌는데, 제가 거기로 들어갔죠. 그 때 일본을 다니면서 보고 개발한 것이 오늘날 삼성카메라, 자동판매기, 복사기, 태양열 집열판 온수기, 세이코 시계, 그런 것들이에요. 그 팀에는 나는 자동판매기를 맡았는데, 한국에서 자동판매기는 최초로 삼성전자가 만들었어요.”

   
  창원상공회의소 회장./박일호 기자  

삼성전자에서 초고속 승진 하다

-그 때 마케팅하러 다니면서 설움도 많이 겪었다면서요.

“당시는 금성사가 삼성을 아주 우습게보던 시절이었는데, 삼성은 기술이 없으니까 일본 미쓰비시라든가 소니 같은 데서는 상대도 안 해줬어요. 제일 삼류가 산요라고 있었는데, 그런 회사도 우리 상무를 모시고 가면 그쪽에선 과장 대리 이런 놈들이 겨우 만나줄까 말까 할 정도였어요. 그래도 목마른 건 우리니까 싹싹 빌고, 술 사주고, 도면 같은 거 하나 훔치기도 하고, 그래가지고 오늘날 삼성전자가 왔는데, 이제 일본 소니와 미쓰비시 등을 훨씬 앞서가고 있으니까 꿈인지 생시인지…. 정말 우리의 저력이 대단한 겁니다.”

-그 때 자판기 마케팅을 하면서 문전박대도 많이 당하고, 그러면서도 성공해 사보에 기고도 하시고 그랬던데.

“제가 경남은행에서 강의할 때도 ‘지방 출신이라고 기죽지 마라’면서 그 얘길 했는데, 자판기 이전에 쇼케이스라고 우리가 국내에 개발한 게 있었어요. 냉장고 중에서도 금성사가 안 하는 냉장고를 해야 하니까. 가게에서 아이스크림 담아두는 냉장고 있잖아요. 그걸 쇼케이스라 했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금성사는 뚜껑을 열어서 아이스크림을 꺼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일본 산요에 가보니 유리 뚜껑을 써서 투명하게 보이는 쇼케이스가 있는 거에요. 열 손실이 많기 때문에 그런 건 상상을 못했는데, 유리와 유리 사이에 열을 차단하는 냉매를 개발했더라고요. 그걸 산요에서 떡 빌듯이 빌어가지고 로열티 주고 기술을 사와서 그 냉장고를 만들었죠. 당시 그런 쇼케이스를 사가는 회사가 해태 부라보콘과 빙그레 퍼머스트, 그리고 맛으로 보답하는 롯데 아이스크림이었는데, 그 회사 사람들이 어디 만나 주나요? 매일 찾아가서 부탁하고 그랬는데, 위에서 최종 결정을 안 해준다는 겁니다. 

당시 신준호라는 롯데 전무의 낙점이 필요했던 거죠. 이 양반이 나를 만나주나요? 그래서 알아보니 아침마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다는 거예요. 그래서 매일 그의 산책길로 출근을 했죠. 매일 그렇게 갔더니 마침내 그 분이 부르더군요. 당신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어요. 그래서 명함을 드리면서 쇼케이스 이야기를 했죠. 그렇게 해서 마침내 100% 납품이 성사됐던 거죠.”

-그런 덕분에 초고속 승진을?

“그 때 보통 7년 걸리는 과장을, 지방에서 대학 나온 제가 3년 반 만에 했죠. 지금도 안 깨진 기록을 세운 게, 딱 실적이 있으니까. 롯데 100%, 빙그레 70%, 해태 50% 납품하게 됐는데, 그게 처음으로 삼성전자가 금성사를 이길 수 있다는 출발점이었죠. 그래서 그 공로로 마케팅 대상을 받으면서 부상으로 이병철 회장이 입던 양복을 두 번이나 받았죠.”

-두 번째는 어떤 일로 받았나요?

“하나는 쇼케이스였고, 두 번째는 자판기였죠. 그 양복은 지금도 보관하고 있어요.”

-지방대 출신이란 핸디캡을 실적으로 극복하신 거로군요.

“촌놈이 서울 갔더니 영남대라는 학교 자체를 잘 몰라요. 해외 출장에서 돌아와 전무에게 보고하러 가면 ‘자네 어디 대학 나왔나’ 하고 물어요. 그래서 ‘영대 나왔습니다’ 하면 연세대로 알아들어요.(웃음) 촌놈이 돈 없지, 동창이나 친구도 없지, 토·일요일이 되어도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1년 365일 중 거의 360일을 출근했어요. 그리고 해가 떠 있을 때 퇴근했던 적이 한 번도 없어요. 그러니 어느 상사가 싫어하겠어요?”

-삼성에 있을 때 같으면 결혼 후 신혼 시절인데, 그렇게 휴일에도 출근하면 부인이 싫어하지 않았나요?

“뭐, 할 수 없죠.”

-넥센타이어 강병중 회장과도 인연이 있더군요. 며느님과 관련해서….

“며느리가 강희진인데, 바깥사돈이 진주 이반성면 강병중 회장, 방송인 강호동 씨 집안이고, 안사돈은 한 씨인데, 강병중 회장 부인의 이반성중학교 제자였죠.”

-며느님은 지금 뭐 합니까?

“서울대학교 강사하고 있습니다.”

-아드님도 삼성에 있죠?

“그 애도 나와 똑 같은 코스를 밟았네요. 고려대를 나왔는데 ROTC를 했고 삼성전자 동경지점에 근무했죠. 그런데 어차피 이 사업도 누군가는 이어가야 하고 해서 3년 전부터 여기(경남스틸) 와서 서울사무소에 있어요. 그러면서 서울대학교 MBA 경영학 석사를 받았죠. 둘째는 공부하는 타입이에요. 서울 법대 나와 가지고 해군사관학교 교수 하다가 동경대학에서 학위 받고 지금은 명지대학교 교수 하고 있어요.”

-소대장 시절에 익혔다는 ‘Follow me!' 정신이란 게 뭔가요?

“나중에 우리 상공회의소 직원들 월례회의 하는 테이프를 한 번 보세요. 하절기는 6시 30분, 동절기는 7시부터 세 시간 동안 합니다. 여기서 한 명은 최근에 읽은 책에 대해 발표하고, 한 명은 서울에서 열리는 유명한 포럼에 1박 2일 공부하러 보내는데 거기서 교육받은 내용을 발표하게 합니다. 또 한 명은 재즈나 클래식 음악에 대한 공부한 내용을 발표합니다. 그리고 저부터 일어서서 ‘회원사 최우선주의를 지향하는 우리의 다짐’을 선서합니다. 소대장의 역할이라는 것은 결국 솔선수범의 정신, ‘내가 앞장서 갈 테니 따라와라’는 거죠.”

-매월 그렇게 월례회 하는 날은 일찍 출근하는 거네요?

“그렇죠. 업무도 해야 하니까, 일찍 와서 세 시간 회의하고 업무에 들어가는 거죠.”

-이력을 보면 상고를 나왔고, 행정학을 전공했으며, 철강회사를 경영하고 계시는데, 음악과 요리, 그리고 인문학에 대해서도 관심이 대단하다고 들었습니다. 철강이라는 강하고 차가운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데….

“인문학은 누구나 좋아하는 것 아닙니까?”

   
  창원상공회의소 회장./박일호 기자  

-모두가 좋아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요?(웃음)

“창원대 인문학 과정이 좋더라고요. 그래서 창원상의와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CEO들의 수강료를 지원하기로 했죠. 과거 5000불, 1만 불 시절에는 시키는 대로 열심히만 하면 됐지만, 이제는 깊은 철학에 기반한 창의적인 사고가 필요한 때가 되었잖아요. 깊게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도 있잖아요. 내가 뭐 인문학에 깊이가 있는 건 아니지만, 직원들에게 강조를 많이 하는 편이죠. 직원들이 많이 힘들어하죠.”

직원들에게도 인문학 공부 시키다

-직원들에게 어떻게 강조합니까?

“얼마 전 해남 땅끝마을에 워크숍을 다녀왔는데, 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 모두 연구해오라고 했어요. 인터넷 검색만 하면 나오는 것 말고, 내가 생각하는 다산의 철학과 사상에 대해 발표하도록 했는데, 발표자는 현장에서 추첨해서 뽑기 때문에 누가 발표하게 될 지 아무도 몰라요. 그러니 모든 직원이 다 공부해오지 않을 수 없죠.”(모두 웃음)

-삼성전자를 그만두고 나와 삼현철강에 합류하셨는데, 그 때 현대전자에서 영입 제의가 있었다면서요?

“그건 잘못 알려진 겁니다. 물론 81년 당시 정주영 씨가 현대전자를 만들었고, 제가 멘토처럼 생각하던 남궁석 상무가 삼성에서 현대로 옮겼죠. 나중에 정보통신부 장관도 하신 분인데, 그 때 삼현철강 오려고 나도 사표를 내니까 ‘틀림없이 남궁석이 데려가려는 것’이라고 오해를 한 거죠. 그래서인지 3개월 동안 사표수리를 안 해줬어요. 그래서 월급을 두 군데서 받았죠. 여기서도 받고 삼성전자에서도 받고….”

-1982년 조수익 대표의 삼현철강에서 지분 30%로 동업을 하셨다는데, 그 돈은 어떻게 마련하신 겁니까?

“돈이 없었죠. 삼성에서 받은 퇴직금과 집 한 채밖에 없었는데, 그걸로 30%가 안 되죠. 내 능력을 보고, 앞으로 받을 월급과 수당에서 갚아나가기로 하고 참여하게 된 거죠.”

-회장님이 참여하신 후 법인이 되고 열 배, 스무 배 성장을 했잖아요.

“삼성에 있던 인연으로 삼성중공업과 거래를 100% 성사시켰죠.”

-그 후 10년이 지나 경남스틸을 창업하셨죠? 삼현철강은 열연, 경남스틸은 냉연이죠?

“열관압연, 냉관압연이 있는데, 당시 삼현철강은 열연이 1000억이라면, 냉연은 100억으로 10분의 1밖에 안 됐죠. 그래서 내가 냉연을 떼어 독립을 했죠.”

-그러면 서로 시장에서 충돌할 일은 없겠네요.

“품목이 다르니까. 올해로 22년째인데, 정확히 56억으로 시작했던 냉관은 작년에 3400억 했고, 1200억으로 시작했던 열관은 2600억 했고….”

-지금은 경남스틸이 삼현철강을 추월한 거죠?

“외형만 그렇지, 이익은 지금도 훨씬 삼현철강이 많죠. 영업이익은 경남스틸 120억, 삼현철강이 200억 정도.”

-경남스틸의 경우, 직원들은 물론 직계존비속 모두 무상의료를 실현하고 있고,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국·사립을 막론하고 무상교육을 지원하고 있잖아요. 그리고 장제비 300만 원, 취미활동비 연 150만 원, 출산하면 분유값 월 10만 원, 주택구입시 대출금 이자 지원, 3년마다 해외연수 기회 등 복리후생이 잘 돼 있기로 유명한데, 그럴만한 특별한 경영철학이 있나요?

“업계에서도 그걸 묻는 사람들이 있어요. ‘너희 회사는 논 팔아서 월급 주냐’는 거죠. 저희는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아예 비정규직은 한 명도 없습니다. 운송하는 사람들에게도 어음 끊어주는 일 없습니다. 100% 현금으로 지급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실제로 대상이 그리 많지 않아요. 우리 직원이 80명이 좀 넘는데, 대학 학자금 지원 대상은 3명뿐이에요. 물론 부모가 큰 병에 걸리면 몇 천만 원 병원비 나가는 경우도 있긴 하죠. 그러나 그만큼 직원들이 더 회사에 기여를 더 해주고 있다고 믿고 있어요.

정확히 계량화할 순 없지만, 예를 들면 똑같이 3000억 매출 올리는 회사 직원이 100명일 때 우리는 80명 갖고 그렇게 했단 말예요. 어떤 부서에 가서 이렇게 말해요. 경쟁사 열 명이 하는 일을 여덟 명이 하면, 그 두 명 몫을 당신들에게 나눠주겠다. 다섯 명이 할 일을 네 명이 하면 한 명분을 나눠주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실제로 다섯 명이 할 일을 네 명이 할 수 있습니다.”

충분히 대우해준 만큼 되돌아 온다

-그렇게 해주면 그만큼 일을 더 하게 된다?

“물론 그러려면 솔선수범도 필요하죠. 지금은 사옥을 새로 지었지만 그 전엔 사장실도 없었습니다. 두 평 되나? 결재? 내가 현장에 가서 결재했어요. 그런 식으로 하니까 다른 회사 열 명이 하는 걸 우리 회사는 여덟 명이 하게 되더라는 거죠. 그 돈으로 주는 거죠. 내가 뭐 떼돈이 남아서 줍니까? 그리고 돈 벌어서 사회에 장학금도 내는데 내 직원 챙기는 건 원칙 아닌가요?”

-그렇게 하니 생산성이 올라가는 걸 느끼십니까?

“나는 그걸 선순환이라고 표현하는데, 확신하고 있죠. 2년 전인가? 일요일 밤에 태풍이 세게 온 적이 있어요. 하도 바람이 세게 쳐서 밤 아홉시쯤 걱정이 되어 회사에 가봤더니 이미 관리직원들이 서너 명 와 있더라고. 그것이 저절로 이뤄지겠냐는 거죠.”

-노동조합은 없는 거죠?

“노동조합? 그런 건 생각해본 적도 없고, 그런 말이 나온 적도 없어요. 난 노동조합이 있으면 더 좋겠어. 그러면 노동법 기준대로 (복지혜택이) 더 줄어들겠지.”(웃음)

-성공한 기업가로서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던 일이라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담보능력이 없어 사업을 접으려고 했을 때 친구가 선뜻 보증을 서줬던 일이죠. 내가 잘난 것도 있겠지만, 그런 도움 없이 할 수 있었겠냐는 것을 생각하면 사람 관계가 참 중요하다고 보죠. 그리고 또 하나는 공부를 했던 거죠. 제가 국내 중소기업으로선 최초로 2000년에 코스닥 상장을 했는데, 그 때만 해도 우리 또래 경영인들은 상장한다는 걸 상상도 못했죠. 또 회사채가 뭔지도 모를 시기에 회사채를 발행했는데,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건 내가 회사를 하면서도 계속 대학원에 가서 공부를 하고 남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죠.”

-가장 힘들었던 일은?

“내가 지금도 가장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일은 우리 공장에서 사람 둘이 죽었습니다. 또 한 명은 팔이 잘리는 사고를 겪었죠. 기계가 자동화하지 않는 시대 이야긴데, 그게 참 가슴 아픈 이야기죠. 그 유자녀는 지금도 내가 학비를 대주고 있습니다만….”

-그런 위기를 어떻게 넘겼나요?

“사람이 죽었는데 유가족들이 나에게 항의를 하고 멱살을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나를 위로해준 일도 있었어요. 총각이긴 했지만 내가 야간대학을 보내줬거든요. 젊은 친구가 야간대학에서 공부하고 낮에 일하고 하다 보니 피곤해서 그런 사고가 난 것 같아요. 그 부모들이 생전의 아들에게 들었다면서 오히려 위로해줬어요.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 내가 돈 벌면 정말 우리 사회에 잘 해야겠다. 내가 잘 나서 된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죠.”

‘서울 집중’ 해결 못하면 폭동…

-그래서 어떤 기업보다도 많은 기부도 하시고, 귀남장학회와 송원장학회를 통해 장학사업도 15년째 해오고 계신데….

“요즘 경제민주화 이야길 많이 하는데, 대기업과 중소기업 상생 되겠습니까? 문제는 기업주들, 자본가들, 특히 대기업 오너들이 생각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 대기업 오너들 모두 2세 아닙니까? 지가 벌었습니까? 지 혼자 번 게 아니라는 생각을 해야죠. 국민이 낸 세금으로 우리 공장 앞에 길도 내주고 전기도 해주고 수도도 해주니까 공장이 돌아가는 거지.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을 가져야 해요. 저는 누가 뭐라 하든, 내가 번 돈의 10%는 무조건 사회에 환원한다는 계획입니다. 물론 못 벌면 못합니다. 1년에 50억 벌면 5억 아닙니까? 주로 장애인 지원, 장학금, 문화예술 이런 쪽을 후원하고 있습니다만,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겁니다.”

-1996년 창신대에 ‘귀남관’을 지어줬잖아요. 어머니의 이름(정귀남 여사·작고)을 딴 장학관인데, 어머니와 어떤 인연으로?

“내가 창원으로 왔을 때 홀어머니를 모시고 와서 산호동에서 함께 살았는데, 어머니가 독실한 기독교 신자예요. 그래서 문창교회를 다니게 됐죠. 문창교회와 창신고가 특별한 관계였거든요. 평소 어머니가 장학사업에 관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 때만 해도 제가 그럴만한 형편이 못됐죠. 그러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생전에 어머니가 하고 싶어 하시던 장학사업을 위해 ‘귀남관’ 건립비용을 지원하게 됐죠. 알고 보니 강병도 학장의 고향도 경북 영주더라고요. 그 이후 어머니 서거 10주기 때 ‘귀남체육관’도 지었는데, 그건 건립비의 3분의 1을 내면 국가에서 3분의 2를 지원하는 방식이었어요.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2억 원을 제가 부담한 거죠.”

   
  모친 고희 축하연.  

-앞으로 꼭 이루고 싶은 꿈이 있나요?

“아유, 내가 뭐. 다른 건 없고 이 지역에 와서 이 지역민들 덕분에 돈을 벌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을 위해 돈을 쓰겠다는 거죠. 내가 영남대를 나왔기 때문에 영남대에 좀 기부해라는 말도 듣지만,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지역에서 버는 분에게 이야기해라. 나는 이 지역 주민이 나를 밥 먹게 해줬는데, 이 지역을 위해서 쓰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얼마 전 ‘경남은행 통장 갖기 운동’ 행사에서 언론사 사장님들에게도 이야기 했지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의 가장 큰 치적을 ‘지방분권’이라고 봐요. 그 부분에 관한 한 그 분을 존경한다. 역사상 지방분권에 대해 그 분만큼 시도라도 해본 사람이 있느냐.

그러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방과 중앙의 양극화가 지금 이대로 간다면 국가의 재앙이 될 거라 봅니다. 폭동이 일어난다고 봐요. 문제는 갈수록 이게 점점 심해지고 있다는 겁니다. 제가 대구에서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경북대와 부산대는 연·고대 바로 아래 정도였습니다. 특히 의과대학의 경우 경북의대 가지 서울 연대, 고대 안 갔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줄 아십니까? 우리 아들이 명지대에 있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요즘은 부산대 안 가고 명지대 간다고 합니다. 이래서 되겠습니까?”

-그렇죠. 갈수록 서울과 지방의 격차는 더 벌어지고 있죠.

“그래서 그 자리에서도 이렇게 말했어요. 창원시가, 창원상공회의소가 전국 3위인데, 신문사가 경남신문, 경남도민일보 두 개밖에 없다. 그런데 그 두 개 신문사가 잘 안 된다면 그건 우리 시민들의 책임 아니냐. 광주는 열 몇 개나 된다는데. 이건 기업인들이나 지역민들이 한 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창원대학 경남대학도 우리가 키워야죠. 내버려두면 누가 챙겨줄 거냐. 경상대병원이 창원에 오는데, 지금 돈깨나 있는 사람들은 건강 검진할 때 서울로 갑니다. 지방 병원은 불신하는 거지. 이래 갖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경상대학교 병원 후원회장 맡아달라고 해서 내가 맡기로 했습니다. 그런 차원에서 부산 울산 경남도 뭉쳐야 하거든요. 그런데 신공항 문제부터 서로 찢어져 있는데, 서로 뭉쳐도 될까 말까 하는데 이래서 되겠습니까?”

   
  인터뷰하는 최충경 창원상공회의소 회장(왼쪽)./박일호 기자  

청년이여! 해외로 눈을 돌려라

-기업하는 사람도 지방분권에 함께 나서야 한다는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지방분권’ ‘지역균형발전’에 대해선 손을 놓고 있어선 안 된다는 거죠. 아까 지역언론 이야길 했지만, 이대로 가면 서울에 있는 메이저 신문 몇 개밖에 남지 않을 겁니다. 그렇게 되면 메이저 신문이 끌고 가는대로 여론이 따라갈 수밖에 없어요. 지방은 더 배제되고 여론다양성은 사라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 지역민들이 지역 신문, 지역 학교, 지역 병원, 지역 은행 등을 우리 스스로 책임을 지고 키워야 합니다. 나는 그런 운동을 해보고 싶어요.”

-도지사에 한 번 출마해보시죠.

“(목소리를 높이며) 그런 소리를 할까 싶어서 나서지를 못해요. 그런 운동을 해보고 싶은데….”

-지방분권, 지역발전 운동에 대한 구체적인 구상이 있나요?

“그런 아이디어도 좀 있긴 한데, 그러면 ‘정치하려고 저러는 것 아니냐’는 시선이 부담스러워요. 털끝만큼도 아닌데…. 지난번에도 창원시장 어쩌고 하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나는 창원상의 회장과 경남상의 협의회장이 창원시장보다 낮다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명예가 떨어진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데, 오해하려는 사람들이 있더라고.”

-요즘 청년실업 문제도 심각한데, 사회 진출을 앞둔 청년들에게 한 말씀 해주신다면?

“나는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데, 남들이 안 가는 길을 가야 하는데 왜 그런 걸 피하는지 모르겠어요. 예를 들어 해외, 특히 미국 영국 같은 데가 아니라 우리보다 한 단계 낮은 동남아라든가 아프리카에 가보면 돈벌이 할 게 많다고 봅니다. 왜 똑같은 공무원 시험에 그렇게 매달리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공과대학 학생이란 놈들이 순경 시험공부하고 있더라니까. 이게 오늘날 현실이에요. 절대로 그런 인생은 성공 못합니다. 고생을 무릅쓰고라도 남 가지 않는 길, 남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해야죠. 자기에게 불리한 조건을 장점으로 반전시키려는 의지를 가지라는 거죠. 하긴 청년들을 욕할 수만은 없지. 어릴 때부터 교육도 그렇게 받아왔고, 솔직히 말해서 예전에 비해 개천에서 용 나는 게 더 힘든 사회가 되었고….”

-회장님도 젊은 시절 항해사로 상선을 타면서 외국의 문물을 접하게 된 게 인생에 도움이 됐다는 거죠?

“절대적인 도움이 됐죠. 마이너는 마이너답게 더 강한 열정을 가져야 하고 더 독한 마음을 먹어야죠. 그리고 나는 정부에도 이런 건의를 하고 싶어요. (조재영 기자를 바라보며) 군대 갔다 왔어요?”

   
  항해사로 승선하기 위해 일본행을 앞두고 유재성 태창철강 회장과 동대구 고속터미널에서.  

-예. 갔다 왔습니다.

“요즘 보니 군대 안 간 사람들 하도 많아서 말이야.(모두 웃음) 우리 때는 군복무 기간이 36개월이었는데, 그쯤 해야 전쟁 나면 제대로 총 쏠 수 있는데, 요즘 18개월 갖곤 웃기는 얘기죠. 그래서 저는 군대를 소수정예로 해서 36개월 시키고, 나머지는 외국 개발도상국 가서 5년 동안 취업해서 근무한 증명서 갖고 오면 병역면제를 해주자는 거죠.”

-인생의 신조나 좌우명이 있다면?

“화이부동(和而不同)이란 말이 있죠. 논어에 나오는 말인데, 아무하고나 잘 어울리되 자기만의 철학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죠. 대통령과도 술 먹을 수 있고, 수위하고도 술 먹을 수 있다. 대통령에게도 기죽을 필요 없고, 수위에게도 거드름 피울 건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애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가훈을 써오라고 해서 만든 건데,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관대하자.’ 쉽진 않은 일이죠.”

-술을 즐기시나요? 주량은 얼마나 되나요?

“즐기는 편입니다. 소주 한 병, 많은 땐 한 병 반도….”

-대학 다닐 때 산악부 활동도 하셨던데, 요즘도 등산 많이 다니시나요?

“잘 못 갑니다. 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인해 생기는 직책이 서른 가지쯤 되더라고요. 자녀 하나 더 갖기 운동,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 등. 온갖 행사 참석해야 하고, 혼사도 많고…. 골프도 한 번씩 치러 가야하고…. 등산 갈 시간이 없어요.”

   
  그는 고교시절부터 산악부 활동을 했다. 친구 유재성(오른쪽)과 함께.  

정확히 두 시간에 걸친 인터뷰가 끝났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에는 열정과 의욕이 넘쳤다. 우리 나이로 예순 여덟.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의 열정은 어떤 청년도 따르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탄탄한 몸매나 얼굴, 피부 등 외모로 봐도 인터뷰이가 인터뷰어보다 훨씬 건강하고 활기가 넘쳐보였다.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나이로 치면 나는 그보다 17년이나 젊다.)

갑자기 내가 부끄러웠다. 악기나 요리는 못 배우더라도 바쁘다는 이유로 중단했던 공부나 자전거타기 운동이라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여러 모로 특이한 기업가였다. 기업 이익의 10%를 사회에 환원하는 사람, 회사를 키우고 돈을 많이 버는 게 목적이 아니라, 번 돈을 어떻게 의미 있는 일에 쓸까를 더 궁리하는 사람, 악기를 연주하고 요리를 즐기며, 지역문화와 예술을 키우는 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 중소기업 사장이면서도 대기업이나 재벌 오너들에게 “지가 번 돈이냐”고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지역신문 기자로서 무엇보다 고마운 것은 “서울의 메이저 신문 서너 개에 여론시장을 맡길 순 없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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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완 기자

    • 김주완 기자
  • 편집국장을 거쳐 현재 이사/출판미디어국장을 맡고 있습니다. 월간 <피플파워> 간행과 각종 출판사업, 그리고 인터넷을 비롯한 뉴미디어 업무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