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그린 그림 문자'인 캘리그래피(calligraphy)는 의미와 함께 감성까지 전달하는 힘이 있다. 덕분에 브랜드 로고와 광고 등에 광범위하게 쓰인다. 특히 제목 자체가 내용을 함축하는 영화나 책의 제목에서 큰 몫을 한다.

더 친근하게는 우리가 즐겨 마시는 모든 소주 브랜드가 실은 캘리그래피 작품이다. 쓰임새가 다양하니 이를 직업으로 삼거나 취미로 배우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가끔 그들이 운영하는 블로그를 찾는다. 좋은 글귀를 개성 넘치는 필체로 표현한 작품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들 블로그를 살피다보면 공통적인 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시필(試筆)이다. 시음·시식·시승 등은 익숙하지만 시필은 낯설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니 '시험 삼아 붓대를 놀린다'는 뜻이다. 해석이 참으로 멋드러진다. 마음에 두었던 붓 한 자루를 손에 넣었을 때 이를 처음으로 '놀려보던' 선비들의 감흥이 어떠했을지 미루어 짐작된다.

선비의 붓처럼 캘리그래피 작가들에겐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필기구가 도구로 쓰인다. 각각의 필기구가 가진 독특한 느낌을 처음으로 접해보는 과정이 시필이다. 자판이나 디스플레이를 두드려서 의사전달하는 시대에 이 얼마나 멋드러진 행위란 말인가!

캘리그래피로 만든 한국 영화 포스터. 왼쪽부터 〈은교〉 〈광해, 왕이 된 남자〉 〈늑대소년〉.

캘리그래피 작가들뿐만 아니라 육필의 즐거움을 아는 이들은 유독 필기구에 민감하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박사는 "만년필은 내 것이라는 분명한 소유 의식을 만족시켜 주지만, 볼펜은 주인을 몰라보는 개 같은 느낌"이라고 일갈할 정도다. 만년필을 애용하는 이들은 대부분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 경우는 꼼꼼하지 못한 성격과 경제적 이유로 만년필을 애용하지는 못한다. 주로 '개 같은' 볼펜이나 수성펜을 즐겨 쓴다. 대신 종이의 질감에 집착한다. 같은 필기구라도 어떤 종류의 종이와 만나느냐에 따라 필기감은 전혀 달라진다. 좋은 재질의 종이는 마치 표면에 기름을 바른듯 글씨가 유려하게 나간다. 촉촉하고 매끄러운 질감은 감촉과 소리로 전달된다. 이 '손맛'에 길들여지면 자연스레 손글씨의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른 건 몰라도 수첩에 대한 투자만큼은 아끼지 않는다. 작은 사치가 주는 만족은 예상을 뛰어 넘는다.

종이의 두께와 재질 표면의 매끄러운 정도를 우선 손의 감각으로 느껴보고, 최종적으로 필기구와 궁합을 따진다. 캘리그래피 작가들이나 옛 선비들의 시필에 못지않은 즐거움이다.

좋은 재질의 종이에 기록된 글씨는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다. 무수한 메모들로 채워진 수첩은 한 권의 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나'라는 작가가 '나'라는 유일한 독자를 위해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 수첩을 읽는 재미는 어지간한 베스트셀러와 비교도 되지 않는다.

형식이 때로는 내용을 규정한다. 뭔가 끼적거리는 동안 생각은 정리되고 상상력이 발동된다.

손으로 글씨를 쓰면서 문장을 구성하는 것은 키보드를 두드릴 때와 뇌의 활성화 방식이 달라 뇌 발달에 훨씬 유리하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빈센트 반 고흐, 파블로 피카소,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불후의 명작을 남긴 예술가들이 대부분 메모광이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생활의 속도를 조절하긴 쉽지 않지만 생각의 속도는 얼마든지 조절 가능하다. 속도가 달라지면 사유의 폭과 깊이가 달라진다. 우선은 당신의 취향에 맞는 필기구와 수첩을 고르는 것부터 시작하면 된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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