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의재발견-마산] 주택,공장, 건물에 품 내어준 가깝고도 먼 바다

이 지역 학교 교가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합포(마산 옛 지명)만' '무학산'이다.

마산 바다는 가까우면서도 멀다. 가포동에는 유원지가 있었다. 이 지역에서 바닷바람을 제대로 즐길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해수욕장도 있었다. 하지만 물놀이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염돼 1975년 폐쇄됐다. 대신 1976년 진동면 쪽에 광암해수욕장이 인공적으로 조성됐다. 역시 수질악화로 2002년 그 기능을 잃었다. 바다 낀 이 지역에 해수욕장은 남아있지 않다.

2002년 폐쇄된 진동 광암해수욕장.

마산 바다는 점점 더 멀어져 가고 있다. 매립 때문이다. 가포바다가 있던 자리는 거대한 땅이 대신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에 이미 대대적인 매립이 있었다. 오늘날 남성동과 어시장 일대다. 어시장은 1760년 조창(漕倉)이 설치되면서 오일장으로 형성됐다. 조선 후기에는 전국 13대 시장에 들 정도로 번성했다. 지금 자리한 곳은 그 옛날 바다였던 곳이다. 오늘날 경남대학교 인근에는 최치원(857∼?)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월영대(月影臺·경남도 기념물 제125호)가 있다. 당시에는 이곳 아래에 백사장과 바다가 펼쳐졌다고 한다.

가포해수욕장이 있던 자리는 땅으로 바뀌었다.

이 지역 사람들은 2003년 태풍 '매미'에 대한 기억을 잊지 못한다. 태풍상륙과 만조가 겹치면서 바닷물이 육지를 덮쳤다. 18명이 희생됐다. 당시 바닷물은 매립된 땅까지만 올라왔다고 한다. 지금 마산조각공원에는 당시를 기록으로 남긴 침수표시판이 있다. 높이 92cm까지 물이 찬 것으로 표시돼 있다.

바다가 멀어지는 이유는 또 있다. 해발 143m에 자리한 회원현성지(會原縣城止·경남도 기념물 제88호)에서는 이 지역 시가지를 눈에 담을 수 있다. 하지만 바다를 시원스레 볼 수는 없다. 몫 좋은 곳에 저마다 고층건물이 자리하고 있어서다.

저도연륙교에서 바라본 바다.

여기 사람들은 큰 인물이 나거나 좋은 일이 있을 때 '무학산 정기 덕'이라고 곧잘 말한다. 무학산 주위에는 절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다. 깊은 산골짜기에는 기도원도 여럿 있다. 독립운동가인 주기철(1897∼1944) 목사는 무학산 정상 십자바위에 자주 올라 기도했다고 한다. 무학산은 서원곡을 통해 시내 중심가 쪽으로 물을 흘려보내며 그 기운을 뻗치기도 한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앞에 둔 이 지역은 살아가는데 보탬이 되는 땅을 넉넉히 내놓지 못했다. 조선시대 조창, 1899년 개항, 1970년대 수출자유지역 등으로 여러 차례 바깥 사람들이 몰려왔다. 주택·건물·공장이 우선이었기에 사람 다니는 길은 어깨 부딪칠 정도로 좁아도 감내해야 했다. 이 지역에 유독 골목길이 많은 이유겠다.

마산 조창 터 자리.

1982년 개발된 돝섬은 국내 최초 해상유원지다. 지금은 동물원·서커스공연장 같은 것 없는 자연휴식공간으로 새 단장 중이다. 돝섬에는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다. 가락국 왕 후궁이 빛으로 변해 이곳 바위틈으로 들어가자 섬이 '돼지 누운 형상'으로 변했다고 한다. 한날 밤은 월영대에 있던 최치원이 돝섬에서 돼지 우는 소리와 광채가 나는 것을 보고서는 활을 쏘았다고 한다. 다음날 이 섬에 들어가 화살 꽂힌 곳에서 제를 올리니 그러한 일은 다시 없었다고 한다. '돝'은 돼지 옛말이다.

이 지역에는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옛 마산헌병 분견대·성요셉성당·옛 마산결핵병원(마산국립병원) 같은 것이 남아있다. 1926년 지어진 옛 마산헌병 분견대는 일제가 독립운동가들에게 가혹행위를 자행했던 곳이다. 이후 군사정권 시절에는 보안사로 쓰이기도 했다. 성지여중 안에 자리하고 있는 성요셉성당은 1928년 짓기 시작해 1931년 완공됐다. 당시 국내에 성당 지어본 이들이 없어 중국 기술자들 손을 빌렸다고 한다. 옛 마산결핵병원은 반야월(1917~2012)이 노랫말을 만든 '산장의 여인' 배경지다.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신마산 지역에는 적산가옥이 일부 남아있다.

신마산에 일부 남아 있는 일본식 가옥.

이 지역에는 경남지역 최초 개신교회가 있다. 1901년 들어선 문창교회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거부 운동에 나섰고, 1908년에는 창신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 지역에는 국보급 문화재가 하나도 없다. 여기 사람들이 아쉬워하는 대목이다. 대신 1281년 원나라 병사들이 이곳에 주둔할 때 마셨던 우물인 몽고정(夢古井·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2호)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물 맑은 고장'이라는 것을 내세울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되는 듯하다.

1955년 발표된 노래 '오동동 타령'은 이 지역 오동동 권번 기생 애환을 담고 있다. 이곳이 배경지인지를 두고 한때 논란이 있기도 했지만, 노래를 부른 황정자 씨가 이를 확인해 주며 일단락됐다.

해운동에는 마산화력발전소가 있었다. 6·25전쟁이 끝나고 전력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1956년 조성됐다가 설비 노후화로 1982년 폐기됐다.

1980년대에는 창동을 중심으로 20개 가까운 극장이 있었다. '전국 7대 도시'에 이름 올리던 때다.

마산은 한때 '야도(野都)', 즉 야당도시라 불렸다. 지금은 철저히 보수화됐다. 군사정권에 뿌리 둔 정당에 오랫동안 변치 않는 지지를 보내고 있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부터다. 

※이 취재는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기업 ㈜무학이 후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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