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8) 통영별로 4일차

오늘도 우리 여정은 수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화성(華城)에서 머뭇거립니다. 길을 걸으며 정조 임금이 그곳에서 꿈꾸었던 바를 알뜰히 살피기 위함입니다. 신구관이 업무 교대를 하던 곳이라 교귀정(交龜亭)이라고도 했던 진목정(眞木亭)에서 길을 잡아 영화역을 거쳐 화성을 살피고, 버드내를 지나 남쪽으로 현륭원으로 이르는 길을 따릅니다.

진목정(眞木亭)

노송 지대 사이로 난 옛길을 지나 중부지방국세청과 천주교 수원교구청 사이로 길을 잡아 화성(華城)으로 향하면, 파장초교를 거쳐 만석거(萬石渠:일왕저수지 또는 교귀정 방죽이라 부름) 서쪽에 있던 진목정(眞木亭)을 지나게 됩니다. 만석거 서쪽의 낮은 고개를 참나무고개라 했으니 이즈음에 진목정이 있었던 것으로 헤아려집니다. 벼슬아치들이 업무를 교대하던 곳이라 달리 교귀정(交龜亭)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참나무고개에서 영화역으로 향하는 옛길가에는 수원시에서 길을 복원하기 위해 부려 놓은 자재가 있고, 수변공원으로 정비를 마친 만석거(萬石渠) 외곽의 산책로에는 경칩이 지난 봄볕을 받으며 운동에 열심인 시민들이 많이 눈에 띕니다. 정조는 화성을 건축하면서 이곳에 주둔할 장용위(壯勇衛)에 충당할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둔전을 설치하고 사방에 저수지를 팠는데, 그 가운데 북쪽의 것이 바로 1795년에 조성한 만석거입니다. 지금도 길이 387m, 높이 4.8m 규모로 남아 용수원으로 활용되며, 도심 속에서 훌륭한 수변 경관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만석거에 대한 기록은 〈정조실록〉 20년(1796) 1월 20일에 원행에 나선 정조 임금의 어가가 교귀정에 이르렀을 때, 우의정 윤시동에게 이르시길 "관개하는 이익이 크다고 하지 않겠는가. 이 못을 파면서부터 1년이 지나지 않아 앞 들판에서 수확한 것이 이미 1천 곡(斛)이 되었다. 하고는, 인하여 정자를 영화(迎華)로, 야(野)를 관길(觀吉)로, 평(坪)을 대유(大有)로, 도랑(渠)을 만석(萬石)으로 각각 명명하고 비석을 세워 기록하도록 명하였다"고 전합니다.

만석거를 벗어날 즈음 운동장 옆에 복원한 정자가 있어 찾아가니 여의루(如意樓)란 이름을 달고 있습니다. 아마 먼저 이 길을 걸은 이들이 보았다는 영화정이 이름을 바꾼 것으로 보입니다. 이 누각을 지나면 만석거에서 흘러나오는 내가 있는데, 여기에 여의교란 다리가 있었으니 그렇게 이름을 바로 잡은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화성까지는 7리 거리이고 2리를 더 가면 영화정이 있던 곳입니다. 여의교에서 남동쪽으로 길을 잡아 수원종합운동장과 만나는 곳에서 정조로를 따라 가면 장안문을 통해 화성으로 듭니다.

영화역(迎華驛)

장안문에 이르기 전, 문이 지척에 바라보이는 곳에 영화역이 있었습니다. 장안문 밖 동쪽 1리에 있었다고 했으니 대체로 지금의 수원 교육청 사거리 부근으로 헤아려집니다. 옛 역터 주변에는 역말·역마촌·마장산·역마산이라는 지명이 남았습니다. 역말은 지금의 신한은행 동쪽이고, 영화초교 뒷산을 마장산 또는 역마산이라 부릅니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마장산에서 역말 사이에는 마방과 주막이 있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100필 이상의 역마를 보유한 영화역이 설치되었던 영향이라 여겨집니다.

영화역이 설치된 것은 정조 20년(1796) 8월 29일이며, 설치 배경은 〈화성성역의궤〉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이 책에는, "영화역은 장안문 밖 동쪽 1리쯤에 있다. 병진년(정조 20) 가을 화성 직로에는 역참이 없고 북문 밖은 인가가 공광(空曠)하여 특히 막아 지키는 형세에 흠이 되기 때문에 경기 양재도역을 옮겨 이곳에 창치하고 우선 역에 속한 말과 역호(驛戶)를 이사 시켰다. 이어서 관사 건물을 짓고 역명을 바꾸도록 명하니 영화(迎華)라 이름하였다"고 전합니다.

영화역은 화성을 축조하고 난 뒤, 장안문 밖의 공한지에 인구를 이주시키고 성의 북쪽을 막아 지키는 척후 역할을 하기 위해 신설한 것입니다. 영화역을 둔 것은 책임자인 찰방을 군제에 포함시키고 북성(北城: 화성의 북쪽)의 척후장을 겸직하게 한 것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영화역의 규모는 위의 책에 "관사는 정당 및 삼문이 있는데 모두 남향이며 내아는 모두 52칸"이라 했습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면, 영화역의 건물 규모는 40칸이고 새로 들어온 민가는 50호 정도였습니다.

영화역에서 장안문으로 이르는 길을 '새술막거리'라 하는데, 일대에 영화역과 장용외영의 훈련장이 들어서면서 장안문 바깥에 술집이 번성하게 된 데 따른 이름입니다. 지금은 거북시장이 옛 자리를 차지하였고, 상권의 부활을 위해 2011년부터 새술막거리 술축제가 열리고 있습니다. 올 1월에는 이곳 거북시장에서 영화역 복원을 위한 고유제를 올렸다니, 머잖아 그 모습을 드러낼 날을 기대해 봅니다.

화성(華城)

새술막거리를 지나 북쪽의 장안문을 통해 개혁 군주 정조의 꿈이 담긴 화성(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에 듭니다. 정조의 명을 받은 실학자 정약용이 1년여에 걸쳐 설계한 〈성설(城說)〉을 바탕으로 채제공이 책임을 맡아 완성한 우리나라 성곽의 완결판입니다. 1794년 1월에 착공하여 이태 뒤인 1796년 9월 초에 완성되었습니다. 이렇게 예정 공기를 앞당겨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은 정교한 설계와 거중기 유형거 녹로 등 첨단 장비를 이용하는 한편, 성역에 참가한 모든 이에게 빠짐없이 품삯을 주어 열심히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했기에 가능했습니다. 이 모든 과정은 〈화성성역의궤〉를 통해 살필 수 있는데, 화성 건설 과정을 빠짐없이 실어 우리나라 기록문화의 한 전범을 이루게 했습니다. 지금의 화성 복원이 가능한 것도 바로 이 기록물 덕분이라 할 수 있지요. 지난 정권에서 강행했던 4대강 사업을 반추해 보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지난 역사에서 깨달아야 할 교훈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수원 화성 동쪽 적대에서 본 장안문. /최헌섭

장안문(長安門)

   

장안문은 북쪽의 한양을 향해 세워진 화성의 정문으로 화성을 드나드는 4대문 가운데 가장 웅장하고 화려합니다. 2층으로 된 장안문은 숭례문과 여러 모로 닮았습니다만, 숭례문에는 없는 옹성과 적대 같은 새로운 방어용 시설을 갖추고 있습니다. 성의 기능 강화를 위해 여러 학자들이 제안한 바를 실현한 것이며, 당시까지의 우리나라 성곽 축조 기술이 집약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출입 시설은 무지개 모양으로 만든 홍예문이며, 그 위에 2층 누각을 올리고 바깥쪽에 둥근 옹성(甕城)을 갖추었습니다. 옹성은 바깥에 벽돌로 반원을 그리며 쌓았는데, 우리나라 성에서는 쓰지 않던 자재로 유려한 곡선을 표현하여 기능성과 의장성을 잘 살렸습니다. 문의 양쪽으로 이어져 있던 성벽은 1920년대 수원시의 시가지 계획으로 헐렸던 것을 2007년에 다시 세웠고, 누각은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된 것을 1978년에 복원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은 〈화성성역의궤〉라는 기록물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팔달문(八達門)

장안문을 지난 옛길은 지금의 중심도로에서 동쪽으로 난 좁은 길인데, 그에 따라 지금의 도로명도 원행길입니다. 길을 따라 화성행궁을 지나 남쪽으로 이르면 장안문 못지않은 위용을 자랑하는 팔달문이 있습니다. 이름은 평산성인 화성을 아우르는 팔달산에서 비롯했다 하지만, 화성 축조 당시에 이 문 바깥에 시장을 둔 것을 보면, 사통팔달이 가능한 이곳에 장을 열어 물화가 잘 유통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은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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