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위·아들(장진석)이 쓰는 두 어머니(조무선·김복순) 이야기

남자는 태어나서 두 분의 어머니를 모시게 됩니다. 나(장진석)를 낳아주시고 길러 주신 어머니(김복순·80), 나의 아내를 낳아 길러 주신 어머니(조무선·76). 항상 철없는 막내이자, 언제나 부족한 막내 사위에게 두 분 어머니는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세상 유혹을 이길 수 있다는 불혹이 된 지금 두 어머님 삶을 되돌아봅니다. 두 어머니가 우리에게 전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내 아내의 어머니 이야기

-장모님 이야기를 듣고 싶네요.

"진주 부잣집에서 귀하게 얻은 딸이었지. 우리 집에 머슴도 있었으니까. 우리는 동네에서 두 번째도 안 갔어. 제일 부자였지. 그러니 할매가 맨날 내를 우다(품에 안고) 키우셨제."

-중학교에 다니지 않았다고 하시던데요?

"중학교? 아부지하고 삼촌하고는 학교를 가라했고, 엄마는 집에서 살림 배우라 했지.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보니 집에서 엄마하고 살림 배우는 게 낫겠다 싶었지. 그때만 해도 우리 반 50명 중에서 3명 정도 중학교를 갔지. 우리 때는 여자가 중학교 가면 떤다(바람든다)고 생각해서 잘살아도 중학교 가라고 억지로 안 하데. 아부지가."

-결혼은 어떻게 하셨나요?

"동네 유명하고, 면장 하시던 분이 잘 알고 친척인 아부지를 소개했지. 아부지하고 할매는 좋은 집안에 양반이라고, 두말 안 하고 시집을 보냈제. 그래 시집을 갔더니만, 사는 게 형편이 없더라고."

-이후 결혼 생활은 어땠는데요?

"자네 장인은 진주서 제일 큰 화원 상사에서 점방(가게)을 봤지. 그때는 주판 놓는 시절이었거든. 장인이 주판도 없이 계산을 했제. 이자 계산이나 이런 거 할 때는. 그러다가 부산으로 장사하러 갔지. 부산 가서 메리야스(속옷) 장사를 했는데, 억수로 돈 많이 벌었지. 대목 한번 지내면, 돈 셀 여개(시간)가 없어서 돈은 던져 놓고 장사했지. 동생은 회사에 다니고 있었는데, 사업하자는 사람이 있어서 바람이 든 거라. 그라다가 전기기술을 한다는 사람한테 사기를 당했어. 그래서 있던 과수원 팔아서 부도난 거 정리했지. 복숭아 과수원은 온 동네 갈라먹는 거였는데, 어휴…. 자네 장인은 일도 잘 안되고, 취직해도 오래 못 있고 그랬제. 그때 학문당 할배가 마산 오라 해서 왔지. 학문당에서 일하는 거는 잘 맞는가 오래 했제."

딸과 함께 한 장모님 조무선 씨와 장인어른.

-딸만 네 명입니다. 아들 욕심은 없었어요?

"나는 아들 낳아주라고 빌어 본 적 없다. 딸들이 다 좋잖아. 딸이라도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었지. 나는 애들한테 지금까지 '안 하낍니다' 이 소리 한 번도 안 들어 봤다."

-네 딸이 모두 든든합니다. 특별한 비결이 있었나요?

"자기들이 컸지, 뭐. 뒷받침만 더 해 줬으면 훨씬 더 잘 했을 건데…."

-딸들에게 바라는 점이 있나요?

"이 나이에 뭘 더 바라겠나? 자기들 잘해서 잘살면 되지."

◇막내 눈에 비친 어머니

몸이 불편하신 장모는 몸이 더 불편하신 장인을 보살펴 주고 계십니다. 장인께서 누워 수발을 받으시니, 식구들이 할 일이 참 많습니다. 우리가 가장 가까이에 살았기에, 살림을 합쳐 생활하고 있다. 벌써 5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어른들 모시고 산다'고 살림을 합쳤지만, 늘 우리가 도움을 더 받고 있습니다. 당신 불편한 몸을 겨우 이끌고, 장인어른 수발하시는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면 때론 안쓰럽고, 또 존경스럽습니다.

-어머니가 겪으신 일제강점기는 어떠했나요?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였지. 기억나는 거는 온 동네 쇠붙이란 쇠붙이는 죄다 뺏어 갔었던 거 같아. 먹을 것도 없어서 3일을 걸어 사람 뜸한 산에서 쑥을 캐다가 죽 끓여 먹곤 했지. 가까운 산에는 초근목피도 귀하던 시절이다 보니까."

-6·25 이야기도 조금만 해주세요.

"그것도 기억이 별로 안 난다. 생각해보면, 저 멀리서 포탄소리가 들리면 집으로 도망가고 했었지. 그러다가 전쟁이 끝나고, 네 아부지 중매받아 시집온 거지. 내가 스무 살 때 시집왔으니까."

-벌써 결혼한 지 60년이나 되었네요. 결혼하고 언제가 행복했나요?

"우짜모(어떻게 하면) 좋고, 우짜모 안 좋은 것도 몰랐다. 그냥 사는 거라 생각하고 살았지. 네 큰 형님도 큰 집에서 낳았잖아. 처음에는 네 아부지 삼 형제가 다 같이 살았고."

-그래도 제일 좋았던 때는요?

"너 낳고 우리 집 지어 나올 때가 제일 좋았던 거 같기도 하다."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서 많이 힘드셨지요?

"그걸 말이라고 하나. 네 큰 형님도 고집 세지. 하고 싶은 일이 많아서 일을 벌이면 내가 전부 다 뒤처리 해야 하고. 농사짓는 게 쉬워 보여도, 억수로 힘든 거다. 너도 해봐서 안 알겠나?"

어머니 김복순 씨와 손자.

-뭐가 제일 후회되세요?

"딴 거는 없다. 네 아부지 살아생전에 고기 한 점 못 먹어 보고 간 게 제일 한이다. 너네 키우고 논 사고, 밭 살 거라고, 고기 한 점 못 먹고 갔다. 너희 아부지가."

-이건 여쭤보기 죄송하지만, 큰형 사고로 죽었을 때…."

"… …." (어머니는 그렇게 긴 한숨만 내쉰다.)

-이제는 다리도 아프고, 걷기도 힘든데 농사는 그만 짓는 게 어때요?

"안 하면 뭐 하라고? 안 그래도 올해부터 아무것도 안 할 거다. (이 말씀하신 지 벌써 10년입니다.)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

-시골에서 혼자 계시는데 적적하지는 않으세요?

"별로 심심할 틈도 없다. 이웃이 있고, 큰집에 네 형님도 있는데 뭐. 촌에는 일이 많아서 잠시도 앉아있을 틈이 없다. 괜찮다."

-이제 6남매에서 5남매가 남았습니다. 자식·손자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은요?

"그냥 건강하게 살면 되지. 애들은 공부 잘하면 되고, 너희는 돈도 많이 벌고, 건강하게 잘살면 제일이지, 뭐. 딴게 있겠나?"

스물에 시집와 형제들과 한집에 사시다, 막내인 나를 낳고 몇 년 지나서야 집을 지으신 어머니. 젊어서 남편을 먼저 보내고, 막냇자식 군대 갔다 와 살만하니 큰아들을 먼저 보냈습니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 한평생을 고생만 하신 어머니. 죄송한 마음만 가슴에 담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자식에게 고합니다. 오늘 당장 부모님께 질문을 해보세요. 제가 이번에 느낀 점입니다. 정말 난감했습니다. 막상 무언가를 여쭤보려고 하니,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나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부모님을 막상 자식이 가장 모르고 살아가지 않는지, 가장 소홀히 대하고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를….

/장진석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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