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사 참석차 1주일 정도 일본을 다녀왔다. 때마침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개봉 중이었다.

붉은 곤룡포를 입고 정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 포스터 속 광해의 모습은 위엄 있고 화려해 보였다. 조선의 역사에 전혀 무지한 일본인조차도 충분히 매력을 느낄 만한 힘을 가진 이미지였다.

2월 16일 90여 개 개봉관에서 상영된 〈광해〉는 개봉 첫 주 4만 2000여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10위에 올랐다. 최근에 개봉한 한국영화 가운데 가장 좋은 성적이다. 일본의 영화 정보사이트 '피어영화생활'의 조사에 따르면 관객 만족도 순위에서 1위를 차지했다. 언론과 평론가들의 반응 역시 호의적이다.

물론 영화 자체의 완성도나 1200만 관객 동원이라는 한국 내 흥행 성적보다 '뵨사마(이병헌)'의 인기가 큰 몫을 차지했겠지만, 〈광해〉에 대한 일본인들의 반응에는 이전과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가 감지된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일본 포스터.

일본 제목은 〈왕이 된 남자〉다. 일본인에게 익숙하지 않은 조선 왕의 이름을 빼고 보편적인 제목을 선택한 것이다. 대신 영화 공식 홈페이지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 광해군의 생애, 조선왕조의 역사와 역대 왕들의 연표 등을 상세히 소개하고 있다.

지금까지 일본에서 볼 수 없었던 현상일 뿐만 아니라 한국 개봉 당시에도 이처럼 상세한 소개는 없었다.

아울러 이 영화에는 일본인들에게 매우 친숙한 흥행 요소가 한 가지 숨어 있다. 왕위를 둘러싼 권력 다툼과 당쟁으로 목숨에 위협을 느낀 광해는 도승지 허균에게 자신을 대신해 위협에 노출될 대역을 찾게 한다. 허균은 기방의 취객들 사이에서 걸쭉한 만담으로 인기를 끌던 하선을 발견하고 그에게 왕의 대역을 할 것을 명한다.

〈왕이 된 남자〉는 역사의 실존 인물인 광해가 아닌 가상의 인물 하선을 의미한다.

바로 이 하선이라는 인물이 일본인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캐릭터다. 16세기 중엽 중앙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자 각 지방의 영주들이 거병함으로써 일본은 내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든다. 이를 말 그대로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당시 적군과 자객들로부터 목숨을 보호하기 위해 영주들은 자신과 모습이 똑같은 대역을 전쟁터나 공식 석상에 내세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그림자 무사'라는 뜻의 카게무샤( 影武者)라고 불렀다. 세계적인 거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만든 동명의 영화는 일본 내 흥행뿐만 아니라 칸영화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성까지 두루 인정 받았다. 이 영화는 1998년 일본 대중문화 개방 이후 두 번째 일본영화로 국내 개봉되기도 했다.

일본에서 개봉된 〈광해〉는 하선이 왕의 카게무샤라는 점을 부각한다. 영화를 직접 본 일본인들 역시 바로 이 점에서 동질감과 이질감을 동시에 느낀다고 했다. 일본인 친구는 전율을 느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왕이 된 남자〉는 그 내용과 잠재력에서 이전에 개봉했던 한국 영화와는 확실히 다른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

어쩌면 흥행 여부에 따라 드라마 〈대장금〉이 불러왔던 한류 열풍이 새로운 전기를 맞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들었다. 아무쪼록 〈왕이 된 남자〉가 일본 내에서 흥행대박을 이루기를 기원한다. 아울러 '뵨사마' 파이팅이다!!

/박상현(맛 칼럼니스트)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