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아, 겁내지 마라, 손이 다 한다." "놓아버리는 것이 더 크게 얻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때, 일이 겁이 나서 지레 뒷걸음질쳐질 때 마음속에 떠오르는 할머니의 목소리이다. 이상하게 이 말을 생각하면 큰 문제도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되고 뭐든 못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용기 있게 도전할 힘을 얻게 된다.

늘 유쾌하고 생활의 철학과 같은 지혜로 넘쳤던 외할머니는 바지런하셨다. 어쩌다 외손녀딸의 집에 방문할라 치면 제발 그냥 계시라 해도 쉬는 일이 없었다. 걸레로 방을 훔치거나 반찬거리 멸치를 손질하시고 먼저 일어나서 식사 준비를 하곤 하셨다. 갑갑해서 그냥 못 있는다며 아파트의 계단까지 혼자 쓸었다. 부지런함이 몸에 밴 할머니는 일을 앞에 두고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할머니는 많은 자식을 억척스레 키워내셨고 한 마을에 사는 시앗동서와도 마치 친자매처럼 사이좋게 지내셨다.

결혼 초 나는 과로로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다. 손끝 하나 움직이기 힘들 만큼의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겨우 병원 다녀오고 하루 종일 누워 지냈던 그 시간에도 곁을 지키며 말없이 간호해 준 분은 바로 외할머니셨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던 때 말없이 이마를 짚어주시던 할머니의 야윈 손이 얼마나 따뜻했는지 모른다.

자신을 위해 움켜쥐기보다는 늘 나눔을 기뻐하신 할머니의 덕으로 주변에 사람이 넘치곤 했다. 언제나 상황을 정확히 꿰뚫고 문제에 현명하게 대처하셨다.

지난 몇 년 간 학교에서 사용하던 방과 후 교실을 비워야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사용하던 개인용 물건만 가지고 나오면 되지만 문제는 책이었다. 아이들에게 좋은 책을 읽히려는 욕심에 시나브로 사 모으다 보니 어느새 5000여권 가깝게 쌓여버린 것이다. 이 많은 책을 어디로 어떻게 옮길 것인가, 걱정에 이사 날짜가 다가오는 것이 공포스럽기까지 했다. 사람은 각자 유달리 욕심내는 것들이 있게 마련이다. 나의 경우는 그것이 책이다. 이 책들을 다 옮길 만한 마땅한 장소도 없었고 옮기는 일도 문제였다. 고민하다가 문득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움켜쥐고 있기보다 손에서 놓기로, 나누기로 작정했다. 겁내는 눈을 다독이며 손이 용기를 내었다.

꼭 필요한 책만 골라낸 다음 평소에 책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누어 주었다. 먼저 우리 지역의 낙후한 곳을 찾아다니며 책 나누기 운동을 하는 경남교육포럼에 가장 많은 책을 기증했다. 그리고 언젠가 강의 갔다가 책 사정이 너무 열악해 '다음에 책 좀 나누어 드릴게요' 하고 약속했던 한 지역아동센터의 복지사에게 원하는 만큼 가져가게 했고, 아름다운 가게에도 필요한 물품을 기증했다. 그러고도 남은 책은 폐지 할머니에게 가져 가시게 했더니 고맙다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신다.

   

모든 것이 치워지고 텅빈 교실엔 아이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의 추억과 쓰레기만 남아 뒹굴고 있다. 서운하고 허전하기보다는 마음이 깃털처럼 가볍다. 내 책은 없어졌지만 우리 모두의 책은 많아졌고 더 필요한 아이들이 읽게 되었으니 좋은 일이다. 이제 흩어져간 그 책들은 다시 세상을 여행하며 많은 아이들의 마음에 흔적을 남길 것이다. 나를 위로하던 할머니의 야윈 손처럼 아이들의 마음을 위로할 것이다. 그것이면 되었다.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 할머니께 응석부리듯 여쭙고 싶다. "할머니, 저 잘했죠?"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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