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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오늘은 졌소 내일 한판 더

[공간&공감] 기원

이승환 기자 hwan@idomin.com 2013년 02월 21일 목요일

통에 들어간 손이 돌 하나를 꺼낸다. 검은색 돌은 반듯한 나무판 한 곳에 놓인다. 돌 하나와 판 위에 가로·세로 19줄로 그어진 선이 만나면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 검은색 돌이 의도하는 세계를 허락할 수 없는 눈길이 판 위에 한참 꽂힌다. 마주앉은 이가 손을 통에 넣어 흰 돌 하나를 꺼낸다. 흰 돌이 판에 놓이면서 검은 돌이 주도하려던 판을 되돌린다. 한쪽은 꾸준히 주문하고 다른 한쪽은 그 주문을 거부하면서 또 다른 의도를 펼친다. 검은 돌과 흰 돌은 판 위에서 얽히며 목판 위에 펼쳐진 세상이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가장 가깝게 마주앉은 두 사람은 판이 끝날 때까지 상대 뜻을 거부한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창동에는 '한국기원 마산지부'가 있다. 요즘 젊은이들에게 PC방이 있다면 예전 어르신들에게는 기원이 있었다. 몇십 년 전 탁자에는 컴퓨터와 키보드, 마우스 대신 바둑판과 검은 돌, 흰 돌을 담은 통이 있었다. 쉬는 날이면 온종일 기원에서 보내는 아버지는 낚시 가방을 챙겨들고 집을 비우는 아버지들만큼 가정에 무정한 사람대접을 받았다. 조훈현에게 환호하고 이창호에게 감탄하며 서봉수를 응원하고 유창혁에게 빠져들었던 사람들은 몇 시간씩 세계대회 중계에 넋을 잃곤 했다. 한 수에 감탄하고 아쉬워하며 바로 앞에 놓인 바둑판에 TV에 펼쳐진 판을 재현했다.

   

창으로 둘러싸인 벽에서 들어오는 빛은 넉넉하다. 긴 탁자에 나란히 놓인 바둑판과 마주 놓인 의자. 무한한 판이 벌어지는 '싸움터'가 차지하는 공간은 오히려 소박하다. 하지만, 이 소박한 공간을 요즘 거리에서 찾기는 쉽지 않다.

"컴퓨터 때문이지요. 요즘은 온라인으로 바둑을 모두 두니까. 애써 기원에 찾아올 이유가 없어요. 젊은 사람들 보기는 어렵고 대부분 어르신이 옵니다."

기원에서 일하는 직원 말처럼 바둑을 두려고 기원을 찾는 젊은 사람은 드물다.

한 발씩 떨어져 판에 놓이던 돌들이 점점 서로 엉키기 시작한다. 이어졌다가 끊어졌다가, 둘러싼 듯싶으면 다시 빠져나오는 돌의 움직임이 점점 복잡해진다.

"아!"

검은 돌을 놓던 이가 뭔가 잘못 풀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는지 짧은 숨으로 자책한다. 앞에 앉은 사람 표정만으로는 선뜻 상황을 읽을 수 없다. 내가 잘 풀린다고, 상대가 아쉬워한다고 해서 환호하며 티를 낼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머릿속에서 한없이 복잡한 싸움은 겉으로 보기에는 너무나 평온하다. 위기를 빠져나갈 수 없는지, 손해를 최대한 줄일 수 없는지, 포기해야 하는지를 가늠하는 셈은 점점 복잡해진다. 돌을 꺼내는 손길은 더욱 더디다. 하지만, 매정하게도 마주 앉은 사람이 뻗는 손길은 빠르고 단호하다. 승패는 점점 굳어지는 듯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판은 정리된다.

"여기서 이렇게 뒀으면…."

판을 승리로 이끈 이는 지나간 수를 더듬는다. 패한 이가 가장 아쉬워할 수를 정확하게 짚는다. 그 한 수를 다르게 놓았으면 판은 또 어떻게 변했을지 모른다. 그 수로 길은 수십 갈래, 수백 갈래로 퍼져 나간다. 승자는 별말 없이 아쉬운 장면을 재현하며 다른 수를 검토해본다. 치열하게 다른 세계를 그렸던 사람들은 함께 이상적인 수를 생각한다. 굳이 말을 꺼내지 않아도 한 수 한 수 번갈아 놓으며 대화는 길게 이어진다. 바둑은 '수담(手談)', 손으로 나누는 대화이기도 하다.

"요즘 사람들이 워낙 바쁘니 바둑 한판 두기가 어디 쉽나. 그래도 바둑은 서로 마주보며 교감하는 것인데…."

바둑을 아끼는 어르신은 다 알면서도 뭔가 아쉽다. 비었던 자리는 보통 오후 3시가 넘으면서 채워진다고 한다. 한국기원 마산지부는 문을 닫는 날이 따로 없다. 이용료는 5000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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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기자

    • 이승환 기자
  • 2017년 1월부터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지부 일을 맡았습니다. 상담은 010-3593-5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