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로 옛길을 되살린다] (37) 통영별로 3일차

과세 잘 하셨는지요? 오늘은 사근행궁에서 지지대고개를 넘어 수원 화성으로 이르는 길을 걷습니다. 의왕시 고촌동에 있던 사근행궁은 남녘으로 행차하던 왕의 어가가 쉬어가던 곳이었습니다. 원래 과천을 경유하던 옛길이 정조 때에 시흥을 경유하는 새 길을 낸 뒤에도 이곳은 여전히 거둥 행렬이 머무는 교통의 요충으로 소임을 다했습니다.

새 길을 만들다

1795년부터 정조는 수원을 오가면서 과천을 경유하던 옛길을 버리고 새로 시흥로를 내어 이용합니다. 새 길을 내는 논의는 〈정조실록〉 18년(1794) 4월 2일 기사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경기감사 서용보(徐龍輔)가 과천은 남태령을 넘나드는 고갯길이 험하고 다리도 많아 번거롭지만, 시흥을 거쳐 가는 길은 지대가 평탄하고 길이 평평하며 넓으니 이 길로 정하자고 한 바에 따른 것입니다. 이듬해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원행에 나설 때 모후를 편안히 모시기 위한 정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1793년의 현륭원 참배를 계기로 비변사로 하여금 원행의 절차, 행렬 규모와 의식 등을 저술케 한 〈원행정례(園行定例)〉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근행궁서 지지대 가는 길

이곳에서 두 길이 합쳐져서 수원으로 향하게 되는데, 지금은 옛길이 지난 곳으로 왕복 10차로 산업도로가 열려 있어 그 갓길을 따라 지지대로 향합니다.

〈춘향전〉에는 사근행궁을 나와 지지대고개에 오르기 전에 '미륵당 지나 오봉산(의왕시청 서쪽) 바라보고 지지대를 올라서서…'라 했는데, 이는 고개 너머 수원에 있는 미륵당을 잘못 기술한 것입니다. 고촌에서 얼마지 않아 의왕 입체교차로를 지나면 〈원행정례〉에 나오는 일용고개(日用峴)라 불렸던 낮은 고개를 넘어 도로 서쪽에 아늑하게 자리한 골사그네를 지납니다.

먼저 이곳을 답사한 〈삼남대로 답사기〉와 〈반차도로 따라가는 정조의 화성행차〉에서는 사근행궁을 이곳으로 헤아리는데, 아마 골사그네란 지명에 착목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대동지지〉에 사근행궁에서 지지대까지의 거리를 5리(당시 1리는 540m)라 한 바에 의하면, 지금의 고촌동 사무소 일원으로 보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지지대(遲遲臺) 고개

지지대고개의 하마비와 지지대 비각.

사근행궁에서 5리를 걸어 오르게 되는 지지대고개의 옛 이름은 사근현(沙斤峴) 또는 미륵당고개인데, 그것은 지향 장소를 고개의 이름으로 삼은 것이라 그렇습니다. 오늘 여정의 진행 방향에서 보자면, 의왕에서 수원의 미륵당(彌勒堂)으로 넘어가던 고개라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지요.

지지대로 바뀐 것은 정조의 현륭원(顯隆園) 원행과 관련됩니다. 정조가 아버지(사도세자: 뒤에 장조(莊祖)로 추존)의 무덤을 참배하고 이 고개를 넘어 환궁할 때 화산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행차가 느릿느릿(지지: 遲遲)해진 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지지대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는 정조의 이런 효성을 기리기 위해 순조 7년(1807)에 화성 어사 신현의 건의로 세운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찍은 사진을 보면, 고개에서 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셋 정도이고 그 북쪽에 하마비로 보이는 빗돌이 서 있습니다.

지금은 비의 동쪽으로 도로를 내면서 고개를 크게 깎아 내어 길에서 빗집까지 많은 계단을 딛고 올라야 합니다. 계단 아래로 내려 세운 하마비와 지지대비에는 총탄 자국이 선연한데, 바로 이곳이 한국전쟁 때의 격전지였기 때문입니다. 전쟁의 상흔이 가슴을 저리게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것이 누구의 목숨을 구한 값진 상처일 것이기에 위안을 삼습니다.

빗집 곁에는 옛 사진에 나오는 느티나무가 지금도 자리를 지키고 있고,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쌓은 단에는 빗집의 지대석으로 쓰였음 직한 석재가 뒤집힌 채 박혀 있습니다.

이곳에서부터 수원을 향해 가는 길은 지난해 경기도에서 '삼남길'을 조성해 걸음이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삼남길은 옛 삼남대로가 지났던 경로를 되살리려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 경로와는 많이 다릅니다. 아마도 도시화로 사라진 옛길을 그대로 살리기 힘든 현실과 오늘 걷기 좋은 새로운 길을 여는 뜻이 담긴 것이라 여겨집니다. 고개를 내려서는 중간에는 지지대쉼터가 조성되어 있고 도로 맞은바라기에는 정조의 효행을 기리는 공원이 조성되어 있습니다만, 도로를 가로지를 수 없어 눈길만 주고 화성을 향해 길을 서둡니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지지대. 당시의 사진을 보면 고개에서 비각으로 오르는 계단은 셋 정도이고 그 북쪽에 하마비로 보이는 빗돌이 서 있다. 〈근세희귀사진〉에서 발췌.

미륵당(彌勒堂)

지지대고개의 옛 이름이 비롯한 미륵당은 파장동 괴목정교 근처에 있는데, 조선 중기에 만든 돌미륵을 모시고 있습니다. 당호는 1960년 당집을 보수하면서 법화당(法華堂)으로 바꾸었습니다. 근처에는 괴목정(槐木亭)이란 정자가 있었고, 바로 곁에는 정자의 이름을 딴 다리가 있었습니다. 당시 이곳에 세워져 있던 괴목정교(槐木亭橋) 표석은 2008년에 개관한 수원역사박물관에 옮겨져 있습니다.

조선시대 신작로(新作路)

미륵당을 지나 에스오일 휴게소에서 1번 국도를 버리고 서쪽으로 난 옛길을 잡습니다. 〈원행정례〉에 나오는 용두(龍頭)에서 남쪽의 노송삼거리까지의 노송지대(경기도 지방기념물 제19호)에 남아 있는 이 옛길은 우리 도로사의 기념비적 유적입니다. 먼저 정조 때 이름이 나오기 시작하는 신작로의 현전 실물자료인 점을 들 수 있습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정조 4년(1780)부터 '새로 닦은 길'이라는 신작로(新作路) 기록이 많이 나타나는데, 바로 이곳 노송지대의 옛길 또한 한 예입니다. 앞의 책 영조 15년 1월 19일 기사에 '과천현 노량진에서 수원부에 이르는 새 길을 만들었다. … 지난겨울 새로 길을 만들 때 부역한 백성들에게 각각 십전(十錢)을 지급하였다'라 한 기록에 신작로라는 용어가 보입니다.

다음은 이 옛길을 통해 당시 도로의 너비를 실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길은 지금의 편도 1차로와 비슷한 규모입니다. 요즘 길과 비교해 보면, 길가에 갓길을 두고 가로수를 심을 정도의 너비를 갖춘 잘 정비된 구조 도로라 할 수 있지요. 당시 정조가 새로 낸 길의 너비가 24척이었는데, 이를 조선시대 영조척으로 환산하면 대략 7.5m가 되니 이 길이 그와 비슷한 너비인 것입니다.

노송지대의 조선시대 신작로와 가로수.

조선시대 가로수길

   

지금 이 길에는 정조가 아버지의 무덤을 화산으로 옮긴 이듬해 2월 심었다는 소나무 가로수가 남아 있고, 그 사이로 빗돌이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내용은 〈정조실록〉 14년(1790년) 2월 1일에 '내탕고의 돈 1000냥을 보내 현륭원의 나무 심는 비용에 대게 하였다'고 전합니다. 우리나라에 가로수를 심은 기록은 조선 세종과 단종 때의 것이 전하지만, 당시의 실물이 그대로 전하는 것은 올해로 223년 되는 이곳 노송지대의 소나무 가로수뿐입니다. 이곳 소나무는 내륙에서 자란다 하여 육송(陸松)이라 하며, 속과 겉이 붉어 적송(赤松)으로도 불리는 것입니다.

당시에 심은 소나무는 모두 500그루이며, 가로수는 지지대에서 화성까지 이어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얼마지 않아서부터 훼손이 잦았는데, 정조가 나무에 엽전을 매달아 두어 부득이 나무를 베어가야 할 형편이면 그 돈으로 나무를 구하라고 배려한 뒤부터 베는 일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송충이의 피해로부터 가로수를 지킨 일화도 전해집니다. 어느 해인가 송충이가 크게 창궐하여 가로수가 크게 해를 입었을 때입니다. 마침 원행을 다녀오던 정조 임금이 솔나방 애벌레를 잡아 씹어 먹었더니, 어느 샌가 까치와 까마귀가 떼로 날아와 송충이를 순식간에 박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잘 지켜지던 소나무는 1942년에 일본인들이 배를 만들기 위해 베어내고, 남은 것이 이곳의 노송입니다. 오래된 이 가로수 길은 이리로 옛길이 지났음을 일러주는 징표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최헌섭(두류문화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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