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야기] 외손녀(박주현)가 쓰는 할머니(김창순) 이야기

결혼한 지 만 5년차, 28살의 꽃다운 나이에 혼자가 되어 갖은 고생 속에서 자녀를 키우며 평생을 혼자 살아오신 우리 외할머니 김창순(72). 함께 차례를 지낼 아들이 없는 우리 할머니는 이번 명절에도 혼자서 할아버지의 차례상을 차렸다. 할머니의 거칠어진 손을 잡아드리고 싶었던 외손녀 박주현(26·경상남도건강가정지원센터)이 힘들었던 지난 삶을 함께 돌아보았다.

-할머니 혼자 명절음식 준비하느라 고생 많으셨죠?

"힘들었지. 그래도 어쩌겠어. 너희 이모는 멀리 나가있고, 니 엄마는 또 너네집 제사가 있으니 어쩔 수가 없지. 그러고 보니 딸 둘 보내고 나 혼자 명절 준비한지가 어언 30년이 다 되어가네. 차례상을 차려놓고도 차례를 마칠 때 까지 절 할 사람도 없이 나 혼자 앉아 있으니 그게 참 마음이 안좋지."

-할머니는 왜 재혼 안하고 혼자 살았어요?

"내가 재혼을 하면 그 어렸던 너네엄마랑 이모를 내가 불쌍하게 만들까봐. 고아원에 데려다줄까봐 재혼은 생각도 안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혼자 살았지. 예전엔 여자가 재혼을 해도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게 힘이 들었어. 지금 이산가족 찾는걸 보면 다 비슷한 사연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도 커. 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플 때 나랑 잘 지내던 시숙이 '할아버지 돌아가시면 니 엄마랑 이모 고등학교까지 공부 시키게 도와주어야지' 하는 말에 서울 살던 큰형님이 '고등학교까지 시키긴 왜 시켜요. 고아원에 보내주면 요새는 거기서 다 알아서 해주는데' 하는걸 내가 들었어. 그런 말을 듣고 내가 어떻게 그 어린 것들을 두고 갈 생각을 했겠니. 내 아이들을 불쌍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지. 아이들을 고아원에 보낸다는데…. 그럼 나중에 만나지도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그럼 할머니 혼자 키우면서 힘들지 않았어요?

"키우면서 많이 힘들었지, 그땐 돈이 있었나, 니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까 그동안 병원비로 돈을 다 써버려서 그날 저녁 끼니 할 돈도 없었는데…. 참 많이 고생 했지. 내가 나무를 할 줄도 몰라서 나무하는 것도 애를 많이 먹었어. 어릴 때 섬에서 살 때 밥하는 건 잘 했지만 다른 일을 해보지는 않았어. 산을 탈줄 모르니까 얼마나 넘어지고 찍고 옆구리 다치고 했는지…. 다 같이 나무를 하러 가도 나무를 잘하는 사람들은 잔뜩 이고 짊어지고 가는데 나는 그걸 못해서 매번 까치집처럼 요 만큼 해서 그걸 들고 집에 들어가면 나무 적게 해서 화난다고 받지도 않고 홱 돌아가버렸어. 지금으로 치면 저기 칠서보다도 더 멀리까지 나무하러 20리, 30리를 걸어갔지. 멀리 안가면 사람들이 다 나무하러 다니니까 여기는 나무가 없어서 거기까지나 가서 나무를 해오곤 했어. 산을 탈줄 알았으면 그 멀리까지 안가도 됐을텐데 산을 탈줄을 몰라서 걸어 걸어 나무를 하러 가고 했었지."

-그럼 할머니는 엄마랑 이모를 키우면서 어떻게 살았어요?

"지금 이때껏 살면서 내가 참 오만 일 다 하고 살았지 뭐. 할머니가 안 해본 일이 없다. 젊을 때 고생을 많이 해서 지금 나이가 드니까 다리도 아프고 허리도 아프고 몸이 안좋아 졌지. 예전에 그 때는 너네 엄마하고 이모하고 그때 두 살짜리 애기가 하나 더 있었어.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내가 혼자 딸 셋 키울 때, 막내는 경끼로 죽었지. 막내가 죽기 전에는 항상 그 애기를 업고 일을 하러 다녔지 내가. 혼자 아이들 키우면서 너네 엄마랑 이모를 제대로 먹이지도 못해서 내가 그 갓난쟁이를 업고 수박 따는 작업을 하러 다녔는데, 커다란 대야에 수박을 따서 그 대야를 이고 나오는데, 예전엔 다라이도 너무 컸다. 꼭 이~만큼 큰 걸. 내가 그땐 혼자서 니 엄마랑 이모 잘 키우겠다고 악에 받혀서 아픈줄 힘든줄도 모르고 그렇게 일을 했어. 한참을 작업을 하고 밤이 돼서야 그걸 이고 나오는데, 그땐 가로등도 없어서 깜깜한데 내가 맨 앞에서 나오다가 큰 웅덩이처럼 큰 구덩이를 파놓은걸 미처 못보고, 그 구덩이에 수박을 이고 빠지면서 크게 다쳐서 허리가 부러졌었지. 옛날에 40년 전에 그때는 병원도 없고, 물리치료도 없고, 제대로 치료를 해주는 사람이나 주사도 없었어. 그냥 혼자 누워서 자연적으로 낫게 해놓으니까 지금도 허리가 많이 아프지. 니 엄마랑 이모 어릴 때 내가 안해본 일이 없다. 그래서 지금 몸이 이렇게 맨날 많이 아프고 그렇지."

-그럼 처음에 할아버지하고 결혼은 어떻게 하게 된거예요?

"지금 부산에 우리 큰언니, 그러니까 니한테는 이모할머니가 살고 있잖아. 어릴 때 내가 섬에서 자라서 살다가 큰언니가 시집가고 나서 큰언니 따라서 부산으로 왔다가 중매로 니 할아버지를 만났지. 니 할아버지는 그때 가구 만드는 일을 했는데, 지금처럼 이런 장롱이나 서랍장 말고, 전복 조개같은걸 껍질을 벗겨서 문양을 새기는 나전칠기를 하는 기술자였어. 가구도 만들고 상도 만들고 그랬었지. 부산에서 그걸 하고 살다가 병이 나서 아파서 힘이드니까 촌에 시댁으로 들어온거지. 꽤 오래 아팠어 니 할아버지가."

-할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할머니 나이는 몇 살 이었어요?

   

"올해로 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4년째거든, 할머니 스물여덟, 할아버지 스물일곱에 내가 혼자가 되었지. 니 할아버지가 나이를 속이고 결혼을 했어. 할아버지 한참 아플 때 하도 안나으니까 시어머니 하고 같이 점을 치러 갔는데 그때 생년을 보니까 나보다 한 살이 작은 거야. 그때 알았지 나보다 한 살이 적었던 걸. 니 할아버지가 저세상 가고 나서 내가 혼자 벌어서 먹고살아야 되니까 참 힘이 들었어. 지금이야 여자들이 일을 할 게 많이 있지만 그때는 여자가 일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어. 남의 논에 모도 심으러가고 밭도 메러가고, 죽은 니 막내 이모 업고 다니면서 저 시골로 이곳 저곳을 일을 하러 다녔어. 나중에는 빵을 받아서 파는 일을 했는데, 처음에 빵 팔러 갈 때는 그때는 그게 그래 부끄러워서 얼굴을 수건으로 이렇게 요래 가리고 했었어. 내가 어려서 그랬지 그땐. 갓난쟁이를 내가 등에 업고, 온 동네 동네를 다니면서 빵을 팔러 다녔지. 그땐 쌀이 귀해서 보리쌀만 나왔는데, 빵을 팔아서 보리쌀을 받으면 그걸 가지고 집에 와서 아이들 밥해주고, 시어머니 밥도 해주고 했지. 예전에는 길도 제대로 나지 않아서 온통 자갈밭이었던 그 길을 걸어서 하루에 몇 십리를 걸어서 무거운걸 이고 빵을 팔러 다녔어. 등에 업은 애는 하루 종일 업혀있어서 다리가 퉁퉁 붓고 그랬어."

-할머니가 살면서 행복했을 때의 기억은 언제예요?

"부산에서 니 할아버지랑 살 때였지. 그 때는 고생도 많이 안하고 아이들 키우면서 참 좋았지. 그 때가 제일 행복했어. 니 할아버지가 오래 살아 있었으면 너희 엄마랑 이모도 고생 덜 하고 크고 공부도 더 많이 시키고 했을건데. 너희 엄마가 참 똑똑했는데 공부를 많이 시켜주지 못해서 그게 지금도 나는 참 한이 맺혀 있어. 그땐 너무도 사는게 힘이 들어서 그걸 못해줘서 너희 엄마도 고생 시키고…. 그땐 그랬어.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시간이 지나고 나니까 지금은 참 좋아. 딸 둘이 다 잘 커서 잘 살고 있으니, 그게 내가 그동안 그렇게 힘들게 살아온 거에 보답이 아니겠나. 우리 손녀도 이렇게 잘 커서 이제 어른이 돼서 할머니 생각도 많이 해주고, 전화도 자주 해주고…. 그래서 이 할머니는 지금이 참 좋아. 우리 손자 성오하고 손녀 주현이하고 너희 엄마, 이모, 박서방. 우리 식구가 있어서 할머니가 살지."

2013년의 설이 나에게 더 특별할 수 있었던 건 할머니와의 인터뷰 덕분이었다. 할머니가 살아오신 삶을 들으며 함께 울며 웃었던 이번 인터뷰는 할머니를 더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올해 내 나이가 한국나이로 스물여덟. 부모님한테도 할머니한테도 아직 마냥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애 같은 나와 달리 44년 전 스물여덟 살의 할머니는 혼자서 많은 짐을 짊어지고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왠지 더 짠한 기분이 들어 할머니에게 앞으로도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항상 귤 하나, 천원 짜리 하나라도 손에 더 쥐어주시는 푸근한 외할머니로 우리 옆에 있어주셔서 그 자체로 감사함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었다.

/박주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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